설교

죽음, 생명, 구원 - 에베소서 2:1~1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8-15 18:23
조회
672
2021년 8월 15(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죽음, 생명, 구원
본문: 에베소서 2:1~10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후대 교회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친서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바울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교회의 시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역설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크게 세 가지 핵심어로 집약됩니다. 죽음, 생명, 구원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은 첫머리에서 허물과 죄로 죽음 가운데 있었던 과거를 회상합니다(1~3). 이 서신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하고 있는 만큼,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죽음과 같은 삶을 말합니다. 허물과 죄는 사실상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그 죄 가운데 있는 삶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죄 가운데 있는 삶의 실상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것이며,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죽음과 다르지 않은 삶입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산다는 것은 사람들이 처해 있는 압도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달리 말하면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를 죽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진실을 함축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압도적인 현실의 힘에 매여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그 반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역설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에게 매여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어지는 주제는 바로 그 구원에 이르는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4~7).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께서는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죄의 죽음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부활하게 해주시는 분, 거듭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삶다운 삶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과 같은 삶이 무엇입니까?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들에 매여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저 주어진 현실의 질서를 그대로 용인하고 그 세상의 법칙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버둥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사건의 의미를 따라 사는 것, 아니 십자가 이전부터 이미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들의 세상 안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해 가장 낮고 천하게 여겨진 사람들까지도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삶다운 삶을 누리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죽음에 대비되는 생명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로 그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고, 그 길이 세세토록 이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세 번째로 본문말씀은 바로 그 삶을 두고 일러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이라 역설합니다(8~10). 진정한 생명의 길이라 말할 수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이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누리는 구원’, 이 초점은 바울 신학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스스로 자랑할 만한 어떤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로 구원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에베소서는 바울 신학의 기초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이 바울이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누리는 구원’을 역설한 것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애초 바울의 초점은 조금 다릅니다. 율법의 행함과 대비되는 복음의 믿음을 강조했을 때, 바울이 그 결과로 강조한 것은 인의(認義, Justification)였습니다.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곧바로 구원을 말합니다. 그 초점이 ‘인의’에서 ‘구원’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차이는 사도 바울이 처했던 상황과 초기 교회 시대 상황의 차이를 반영합니다.
바울이 인의를 말했을 때, 그것은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면 인권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그 밖에 있는 사람이 죄인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그 낡은 기준을 폐했다는 것,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종이 의미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누구나 죄인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옳다고 여기고 은혜의 선물을 주셨으니 서로를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바울의 주장이 구원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애초 그것은 인권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의 사람들은 선민을 자처하지만 바로 그 논리에 의해 한편의 사람들은 차별받고 배제되는 현실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반면 구원의 의미를 강조한 에베소서의 말씀은 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삶의 실상을 돌아보게 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인간의 어떤 속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 누구든 스스로 잘나서 어떤 자랑할 만한 행위, 곧 선행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0)

오늘 이 말씀의 의미에 특별히 주목하고자 합니다.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율법의 행위와 복음의 믿음이 대비될 때 흔히 행위를 배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든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을 누리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선한 행위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선한 일, 선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선행이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자랑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그것으로 구원받은 것인 냥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줄여 말하면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은혜를 누린 사람의 마땅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늘 제기되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주체로서 자기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인가,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 그리고 행위가 의미 없다는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가장 심각한 물음일 수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독특한 성격과 관련된 물음일 수 있습니다.
철저한 자기부정, 완전한 자기비허(自己脾虛, Kenosis), 그것이 그리스도론의 요체이며, 동시에 신자들에게 요청되는 요체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존재의 근원을 인식하는 진정한 주체를 가능하게 합니다. 나의 나됨을 이루는 요건이라 생각했던 것,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 궁극의 근원을 헤아려 알라는 것을 본문말씀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 그리고 결단의 행위 근원까지 깨달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궁극적 경지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깨달음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의 삶 가운데서 부단히 이어지는 자기반성의 삶과 태도에서 비롯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악행이 무엇이고 선행이 무엇일까요? 악행은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지배하는 행위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들이란 그 행위를 아예 구조화한 세력을 뜻합니다. 선행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나를 낮추고 타인을 세우는 행위입니다. 악행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선행이 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입니다. 선한 동기와 의지, 그리고 그에 따른 행위가 오히려 상처를 입히고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이 자기만의 의지의 관철에 그칠 때, 지배의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했을 때 그렇게 귀결됩니다. 예컨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기대를 갖는 순간 선한 의지는 뒤틀리고 악행과 다르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일 뿐이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선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행위가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관계를 뒤틀리게 만들 수 있는 숱한 사례를 우리는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적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향해야 할 삶의 근원에 관한 깨달음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랑하고픈 선행의 의지마저도 그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되돌아보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절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세력에 붙잡혀 죽음과 같은 삶을 이어왔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매여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실현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은 마침 8.15 광복절로서 평화ㆍ통일 주일이기도 합니다.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였지만 분단을 겪고 여전히 평화 통일의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후 세계질서는 각별한 의의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던 제국주의 열강들의 충돌로 세계는 역사 이래 가장 비참한 상황을 경험하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의 비극입니다. 1945년 그 비극의 사태가 종결되었을 때 세계는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안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가 지향해야 공통의 가치로서 인권선언이 선포되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우리 민족의 경우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기도 했지만, 전후 한 동안 인류역사는 또 다른 번영기를 누렸다고 할 만큼 물질적 번영과 함께 문화의 발전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오늘 현실은 어떨까요? 이른바 자본의 지구화 이후 물질적 번영은 더욱 가속화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갖가지 위기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급기야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간의 문명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살겠다고 한 것이 거꾸로 온 생명을 죽이고 스스로를 죽이는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문명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현상 아닐까요? 오늘 공중의 권세를 잡은 힘, 곧 자본이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한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렇게 위기에 처해 있는 세계 현실에서, 위기의 실상을 직시하는 동시에 그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독려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선한 일을 하며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결단과 헌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야 할지, 어떤 과제를 실현해야 할지 끊임없이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지향점을 찾아나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과제라는 것을 명심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일궈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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