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믿음의 상상력과 그 결실 - 누가복음 17:5~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9-12 13:54
조회
6819
2021년 9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믿음의 상상력과 그 결실
본문: 누가복음 17:5~6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모두 ‘아멘!’ 하셨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유사한 병행구가 등장합니다. 마태복음(17:20)에는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되어 있고, 마가복음에는 역시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핵심은 같습니다.
한편 도마복음에도 역시 병행구가 등장하는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그들이 산을 향해 ‘여기에서 옮겨가라!’라고 하면 그것이 옮겨갈 것입니다.”(48) 도마복음은 믿음을 말하지 않고 화목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구별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우선 누가복음의 본문말씀을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말 그대로 믿음이 좋으면 뭍에 있던 뽕나무를 바다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일까요? 또는 여기 있는 산더러 저리 가라고 하면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일까요? 옛 이야기 가운데 그래도 산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럼 내가 옮겨 가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과연 믿음이 좋으면 초자연적 기적마저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마치 요술쟁이라도 되는 듯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일까요?
본문말씀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상상력의 빈곤을 들러낼 뿐입니다. 예컨대 상전벽해(桑田碧海), 곧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의 뜻을 문자가 표현하는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놀라운 변화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어지는 사태, 이 산이 저리 움직이는 사태 역시 그와 같이 놀라운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1장이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이 그 놀라운 변화를 가능케 하는 믿음의 힘을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자체로서 의미가 없는 것 아니지만, 정작 본문말씀의 전후맥락에서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복음서의 기록자 누가가 이 말씀을 이 대목에 기록한 것은 그 나름의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어록만을 모아 놓은 경우(Q복음서, 도마복음서)에도 배열된 위치에 따라 어느 정도 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의 일관된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는 복음서에서 그 의미는 맥락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될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 앞뒤로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앞부분(1~4)은 죄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뒷부분(7~10)은 신실한 종의 도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일깨우는 본문말씀은 그 전후 이야기가 함축하는 의미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 청중은 모두 제자들입니다.

앞부분 이야기를 볼까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본문말씀도 그렇거니와 이 이야기에서도 예수님의 어법은 매우 단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만 하면 됐다.’ ‘이 정도면 나는 의인 축에 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다그쳐 세우면서 자신을 근본부터 되돌아보게 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뜻은 그렇게 다그쳐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처한 현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기 위하여 그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말씀하시는 그 어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넘어지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를 넘어지게 하는 일’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가,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의 차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는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죄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닌 그 누군가를 잘못 대하는 문제입니다.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잘못 대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사람으로 제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관계입니다.
그 잘못된 관계를 푸는 방법, 그것이 용서입니다. 그렇게 잘못을 범한 사람이 스스로 잘못한 것을 알고 돌이킬 때 용납해 주는 관계로 회복하라는 것이 용서의 참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존재를 무시하여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실족하지 않게 서로의 존재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삶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아무리 작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당한 존재로서 대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삶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곧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 이야기 끝에 제자들과 예수님이 묻고 답하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 곧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하는 말씀은, ‘믿음이 있다면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뜻은 도마복음의 말씀과 상당히 가깝게 통합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서로 화목하고, 그들이 산을 향해 ‘여기에서 옮겨가라!’라고 하면 그것이 옮겨갈 것입니다.”(48)

바로 그 본문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신실한 종의 도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이 이야기는 현대적 관념, 오늘의 인권의식으로 보면 참 불편합니다. 주인과 종이라는 관계 설정 자체가 그렇고, 종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는 주인의 태도 또한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가 권위주의와 맹목적인 순종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오용되고 있는 교회 현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불편해집니다.
그러나 주인과 종의 관계 설정은 예수님 당대의 시대적 환경을 반영하는 것일 뿐, 그 배경 자체가 메시지의 초점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놓고 어떤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교훈이 필요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의에 대해 언제나 질타하셨습니다. 사도로 불리는 제자들 역시 초기교회에서 그와 다르지 않은 태도에 빠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종의 자세로, 섬기는 자세로 일관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이것은 일체의 공로주의와 업적주의를 배격하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는 데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의 기대로 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의 기대를 갖는 사람들의 관계는 결국 이익집단으로 귀결될 뿐 진정한 공동체일 수 없다는 진실을 뜻합니다.
앞의 이야기와 더불어 이 이야기 역시 결국 사람들의 관계를 형성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상시 나누는 평범한 인사말 가운데 예수님께서 던지신 말씀과 통하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이게 정상적인 인사법입니다. 마땅한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사랑에 어떤 보상이 필요할까요? 사랑하는 그 기쁨이 바로 사랑의 목적일 뿐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이 문답에 덧붙여진 말씀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놓고 어떤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그 자체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뒷이야기에 이어지는 본문말씀은 그런 뜻을 함축합니다.

결국 믿음의 놀라운 능력을 강조하는 오늘 본문말씀은 그 문맥에서 볼 때 그 믿음이 분명한 실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대하고, 그렇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하면서 다른 어떤 보상을 기대하기보다 그 자체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그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저 한 대상에 대한 믿음, 곧 절대자에 대한 믿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곧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이루는 모든 생명을 그저 이해관계 안에서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에서 그와는 다른 삶의 관계가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미 십 수 년 전(2004년) 독일어협회가 그해 최악의 단어로 꼽은 일이 새삼 떠오릅니다. ‘인적 자본’(Humankapital)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인간을 단순히 경제적 척도로 잴 수 있는 존재로 격하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바꿔 말하면 돈이 되는 인간과 돈이 되지 않는 인간으로, 인간들을 분류하도록 만드는 단어입니다. 상업자본, 산업자본이 전부인 것으로 알았는데 어느새 금융자본이 더 막강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인간 존재 그 자체마저도 자본으로 간주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실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그 압도적인 현실을 넘어설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그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상전벽해요,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는 사태입니다. 그 진실을 믿고 정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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