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삶의 곤경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 - 예레미야애가 3:21~3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9-19 17:21
조회
484
2021년 9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삶의 곤경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
본문: 예레미야애가 3:21~33



‘애가’는 ‘슬픔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눈물의 노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첫머리가 “아, 슬프다!” 시작하고 있듯 삶을 고통과 슬픔으로 느끼는 모든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입니다. 애가는 전통적으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어(역하 35:25), 그 제목도 ‘예레미야애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예레미야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한 시대 민중들의 탄식이 집약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노래는 유대 민족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여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전 587년 남 유다 왕국이 멸망하였을 때 그 지도층들은 바빌론으로 붙잡혀갔고, 바로 그 시기는 성서의 원형이 형성된 중요한 시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애가는 포로로 잡혀간 이들의 상황보다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머물며 살아간 민중들의 상황을 짙게 반영합니다. 대체로 성서가 포로기의 경험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반면 애가는 폐허가 된 역사의 현장에서 질긴 삶을 이어가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포로가 된 이들은 그들대로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폐허가 된 본토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이들의 고통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애가는 정복자들에 의한 폭력과 인륜의 파괴 현상을 적나라하게 전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애가는 유대 민족 국가의 멸망을 기념하는 날 읽혀졌습니다. 그러나 애가는 비단 그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노래로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닙니다. 삶 자체를 고통으로 느끼는 모든 사람들의 탄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애가는 마치 홀로된 여인이 탄식하듯이 슬픈 상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섯 편의 탄식시로 구성되어 각 시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을 따르고 있는 애가는 끔직한 폭력, 버림받았다는 절망감, 고발과 악감정을 그 정조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탄식시, 예레미야서, 욥기 등에 나타난 정조와 유사합니다. 그것이 너무 적나라하기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 애가는 경건한 기도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여기는 견해마저 생겼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가는 비단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슬픔과 고난의 의미를 새길 때마다 음미되어 왔습니다. 또한 고통을 겪고 슬픔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절망과 고통,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을 절절하게 표출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치유의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애가는 그 감정을 표출하는 가운데 바닥에 처해 있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깊은 성찰로 안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탄식시가 알파벳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한편으로 매우 절제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되 그것이 갖는 의미를 스스로 응시하고 극복하도록 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애가는 고통과 슬픔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책으로서 몫을 해 왔습니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실마리로 하고 있지만, 그 특정한 상황을 넘어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슬픔과 고통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애가의 한 가운데 있는 시로서, 그 위치뿐 아니라 내용상 절정에 해당하는 세 번째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근거로서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고백은 너무 식상하게 여겨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 곳곳에 증언되고 있는 이와 같은 고백은 성서가 형성된 당대의 현실에 비춰보면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애가는 성서의 정신세계가 형성된 바로 그 시대 한복판에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전의 종교적 정신세계 안에서 인간의 문제 해결 방식은 주술적 힘에 의존하는 것이었습니다. 희생제의를 핵심으로 하는 제의를 드리는 것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 명문화된 율법 조문을 따르는 것으로 인간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성서는 이와 같은 믿음의 세계를 모두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원형이 형성될 때 또 하나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오늘날 ‘신약’이라는 말의 근거가 되는 예레미야서 31장 31절 이하의 33절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외적 형식이나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으로, 정신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삶의 태도에서 근본적 변화를 뜻합니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인간, 그럼으로써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탄생입니다. 이것은 인간정신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뜻합니다. 이른바 ‘축의 시대’의 정신적 전환입니다.

본문말씀 또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에 이르기 전까지 여전히 고통에 대한 탄식입니다. 그 탄식이 본문에 이르러 바뀝니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21~24).
그리고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젊은 시절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고,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좋다.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이것은 내적인 확신에서 비롯되는 구원의 희망입니다.
어떻게 이런 전환이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 자체에서는 명시적인 실마리가 없지만, 이어지는 39절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 죄값으로 치르는 벌을 불평하느냐?”
지금까지 겪은 고통이 스스로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 말씀 역시 오늘 우리에게 너무 뻔한 이야기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모든 문제를 그 죄 탓으로 돌려버리는 현실에서 식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죄의 고백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적 성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대 민족의 국가가 완전히 멸망했을 때, 예언자들은 왜 그 고난을 겪게 되었을까 통찰했습니다. 자신들의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강대국의 횡포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성서는 그 강대국의 횡포를 규탄하고 있고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의 선포는 항상 공동체 내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회내부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으라는 촉구입니다. 예언자들은 종교는 건재하지만 정의가 부재한 현실을 그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사람들이 정의를 배반한 현실을 놓고도 그것을 죄로 느끼지 못한 데에,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원인이 있다고 진단한 것입니다. 죄의 고백은 바로 그 자각을 뜻합니다. 그 고백은 죄를 조장하는 삶의 논리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천명을 뜻하고, 그 의지를 가질 때 구원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말씀은 그 희망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이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새롭게 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입니다. 본문말씀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좋다.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이것은 악을 악으로 갚는 삶의 원리와 다른 것을 말합니다. 불의에 대해 이의제기하지 않고 따르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불의를 조장하는 그 삶과는 다른 삶의 원리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처절한 슬픔과 고통, 분노와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신실한 하나님 앞에서 희망을 되찾는 본문말씀의 뜻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오늘 우리는 저마다 삶의 곤고함을 느낍니다. 마냥 삶이 행복하고 즐겁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나름 복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을지라도 힘겹다고 느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게 힘겹다고 느낄 때 많은 사람은 마치 자기만 그렇게 힘든 것처럼 느낍니다. 그 느낌에 빠지면 더더욱 힘들어집니다. 애가가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버려졌다는 느낌과 분노의 감정이 일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자기연민의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오늘 본문말씀은 그 출구를 열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이 그 출구입니다.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기도할 때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얼굴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렵다면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다고 여기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저 의례화된 행위가 아니라 정말로 그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어떤 답이든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연민의 상태에 몰입되었을 때, 문제의 사태 그 자체에 몰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다른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나락의 상태에 빠져 있다고 느낄 때 절망합니다. 그러나 내 곁에 누군가가 있다고 느끼거나 또 실제로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며 자신의 곤고함을 토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빛을 찾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다른 시선에서 보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성찰 행위이며, 그 가운데 주어지는 답을 찾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일쑤입니다. 좋은 일을 경험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나쁜 일을 경험하면 아직 응답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아예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따라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삶의 의지를 되묻게 만드는 근원, 그래서 어떤 경우이든 그 뜻을 새기게 만드는 근원, 그렇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신실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까불면 죽어!” 하는 식으로 똘똘 뭉친 자기아집에 사로잡힌 것과 다름없는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처한 곤경에서 헤어 나오게 해주시며, 나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 가능성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바로 그 깨달음으로 진실한 믿음에 이르며, 삶의 희망을 밝혀나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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