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피조물의 탄식과 희망 - 로마서 8:18~25[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1-07 19:48
조회
7409
2021년 11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피조물의 탄식과 희망
본문: 로마서 8:18~25



극도의 비탄과 극도의 환희, 절망적인 현실과 희망적인 미래가 교차하는 본문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 당대의 시대인식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지만, 오히려 그 당대보다는 오늘의 시대상황 가운데서 훨씬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한정하면 크게 세 대목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 현재 겪는 고난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희망의 대전제(18), 그 다음은 피조물의 탄식과 희망(19~23), 마지막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진정한 희망에 대한 확언(24~25)입니다.

먼저 그 첫머리는 사도 바울이 인식하고 있는 시대상황의 엄중함을 말합니다. 지금 고난 가운데 처해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쉽게 생각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는 초기 교회의 상황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말씀을 살펴보면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피조물, 곧 피조세계 자체의 고난을 함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 있는 세계현실, 그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의 현실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의 세계인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지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므로 희망을 가질 것을 말하기 위해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환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세계인식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19~23)
이 심오한 말씀의 뜻을 어떻게 헤아릴까요? 몇 가지 중요한 초점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째서 이 대목에서 갑작스럽게 ‘피조물’을 언급할까요? 언뜻 보기에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와 구별되는 다른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선민과 이방인 또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대조하는 맥락에서 의미를 지니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바울이 굳이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세계에 대한 역사인식에서 철저하였습니다. 그 체제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선포한 것이 그의 메시지의 초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대목에서 ‘피조물’을 말함으로써 그 역사인식은 피조세계 전체로 확장됩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오늘날 겪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가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한 사도 바울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현대의 과학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 말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순간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에서 나아가 자연, 그리고 그 자연 가운데 속해 있는 한 성원으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로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한 신앙의 수용 여부,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의 면모, 그것만으로 해명되지 않은 인간 삶과 자연에 대한 통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현대의 과학적 인식 이전의 진정한 지혜에 따른 통찰이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피조세계 자체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통찰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이 그렇게 허무에 굴복한 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했다고 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늘 부딪히는 난제에 다시 봉착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지 않고 결함을 안은 상태로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신앙고백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진솔한 인식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곧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의 과정을 동반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개별적 존재들은 한계를 지니지만 만물이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하나를 형성해가는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적어도 본문의 맥락에서 간략히 줄여 말하면, 하나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는 창조세계, 피조세계의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자는 자의로 고통에 처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에 이른 진실입니다.
그 통찰 자체로 우리는 강력한 암시를 받습니다. 인간의 잘못된 역사로 훼손된 피조세계의 현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고통의 신음 가운데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 세계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통찰은 다음 구절에서 본격화됩니다. 바울이 진정한 소망을 역설하는 대목에서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 곧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이들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이 영광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그 소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두 가지 초점을 강조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는 것, 더불어 첫 열매로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함께 고통을 겪으며 신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세계인식과 동시에 그 세계 안에서의 책임을 말합니다. 굳이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 한정짓는 것이 문맥상 부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피조세계의 신음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이 곧 세계를 새롭게 하는 실마리를 쥐고 있는 책임적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측면, 곧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서두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로마 1:20)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사에서 제대로 주목을 받지 않거나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 온 말씀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2) 이 말씀은 바로 그 말씀에 상응합니다. 피조세계를 살펴보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안다는 것은 따라서 피조세계 안에 구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측면, 곧 우리도 함께 신음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을 일깨웁니다. 피조물의 신음과 고통 안에서 우리 역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기에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을 일깨웁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완료형이 아니라 미래형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자유롭게 되지 않고서는 우리도 결코 자유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만이 배타적 구원의 세계 안에 있다는 인식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을 겪는 현실을 만들어낸 인간의 책임을 일깨우며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는 세계를 향한 인간의 책임을 일깨웁니다. 음으로 양으로 연대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피조물의 고통을 알고 있고, 동시에 우리 역시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바로 그 진실 때문에 소망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 본문말씀의 마지막 초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전혀 새롭게 펼쳐질 세계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 세계는 지금 경험하는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 세계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르지만, 사실은 어쩌면 잊혀져버린 어떤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을 이야기하는 본문말씀은 끊임없이 창조세계의 본래 모습을 환기합니다. 인간의 죄악이 시작되기 이전, 곧 사람을 차별하고 자연을 착취함으로써 피조세계를 망가뜨리기 이전의 세계질서입니다. 그 회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점에서 창조세계의 회복입니다.
마지막 말씀에서 또 하나의 초점, 곧 참으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그저 수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본문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마침내 이뤄질 해방의 구원은 사랑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로마서 8장은 종결되고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현실에 굴복하고 인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깊은 뜻은 우리에게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기에 여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지만 자제하겠습니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오늘 본문말씀은 오늘의 시대상황 가운데서 훨씬 절절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에서 훨씬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그 현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무한한 이윤추구와 무한한 욕망충족을 향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비롯된 위기입니다. 인간의 문명 자체가 빚어낸 위기입니다. 마치 본문말씀은 그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을 현실을 두고 선포한 말씀과 같습니다.
지난 주간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26)에서 대통령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두고 기업과 보수언론에서는 우리만 과속한다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기후악당국가에서 탈탄소화를 주도하는 국가로 변모하겠다는 약속을 나무라서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도록 국가와 시민사회, 기업이 협력할 때 희망이 있습니다. 그 현실적 맥락에서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간 외면되어 오거나 부차화되어 왔던 본문말씀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온 생명에 대한 통찰입니다(장회익). 낱 생명으로 완결되는 생명이 아니라 온 생명으로 비로소 완결되는 생명에 대한 이해입니다. 20여년 천안살림교회 역사 가운데서 누차 강단에서 그 뜻을 새길 기회를 가졌거니와 장회익 선생님께서 함께 하고 계셔서 같이 공부할 기회도 여러 번 누렸습니다. 오늘 문명의 위기 가운데 그 과학적 인식과 통찰,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는 정말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꼭 필요한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영광된 자유를 누리는 세계를 향한 믿음의 여정에서 저마다 역할을 감당하며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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