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 열왕기상 19:1~9a[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3-20 17:52
조회
9724
2022년 3월 2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다
본문: 열왕기상 19:1~9a



예언자 엘리야의 이야기는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오른 것으로 전해지고, 그래서 다시 올 메시아의 한 원형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열왕기에 기록된 흥미진진한 엘리야의 이야기는 성서가 지향하는 세계, 곧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현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아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이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시절 곧 오므리 왕에서 아합 왕으로 이어지는 오므리 왕가 시대에 활동했습니다(주전 9세기). 흔히 다윗-솔로몬 시대의 영화에 비견되지만, 오히려 다윗-솔로몬 이야기가 성서 외에 다른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반면 오므리 왕은 다른 역사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오므리 왕은 사마리아를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고 왕권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아울러 활발한 대외 정복과 교역을 통하여 강성한 나라로 국력을 신장시켰습니다. 그 강력한 왕권과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방 페니키아(시돈)와 유대를 돈독히 하여 그 공주 이세벨을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의 종교인 바알종교를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풍요종교인 바알종교를 수용했다는 것은 경제 성장주의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수용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면 신자유주의 곧 시장 만능주의 이데올로기를 국가정책의 근간으로 삼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바알종교에 의해 재가된 강력한 왕권과 국가체제는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국가나 어떤 사회가 외형적 규모를 지향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소외현상이 두드러졌고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국력은 신장되었는데 도리어 민중들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17:8~24)는 단지 자연적 기근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과 국가체제가 빚어낸 사회적 기근의 상황을 전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항상 자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입니다.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 왕에 이르러 왕권은 더욱 강화됩니다. 원래 개인의 사유 대상이 될 수 없었던 땅을 권력을 이용해 빼앗은 사건을 전하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21장)은 아합 왕대의 사회적 불평등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바로 그와 같은 국가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대항했던 불과 같은 예언자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아합 왕이 엘리야더러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불렀을까요? 엘리야는 불의에 대항해서는 그렇게 서릿발과도 같았지만, 그 불의한 권력에 희생당하는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와 그 아들에게 베푼 기적은,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가장 절박한 삶의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엘리야를 보여줍니다. 반면에 갈멜산 정상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사제 800여명을 물리친 사건은, 불의를 옹호하는 나팔수들에 대한 응징으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예언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은 권력의 불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정의는 사랑의 사회적 번역”이라고 이야기했듯이, 엘리야는 누구보다도 그 의미를 극명하게 자신의 인격과 삶으로 보여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 사제들을 물리친 사건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의 지명수배를 받은 엘리야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민중들을 도탄에 빠지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장주의 이데올로기를 부르짖는 나팔수들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것은 잠정적이고 일시적일 뿐이었습니다. 그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권력의 실세는 버젓이 살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 대에 이르러 오므리 왕가를 끝장낼 때까지 그 체제는 유지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사제들을 물리쳤을 때, 그때까지 왕권의 배후에 있던 바알세력의 실세 이세벨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성서에서 페니키아에 대한 언급이 중립적이었다가(삼하 5:11) 명백히 부정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 대목에서부터입니다. 이세벨의 역할은 일종의 유혹자로서 남자를 조종하는 여자의 몫이 아닙니다. 이세벨의 역할은 명백히 정치적이고 종교적입니다. 그 왕권의 정책과 이념을 제공한 실세로서의 역할입니다. 그 실세가 적나라하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놓고 그 저항세력과 마주합니다. 일부 번역본(70인역, 고전라틴어본)은 그 극적 대결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가 엘리야라면 나는 이세벨이다.”(19:2) ‘야훼는 나의 하나님이시다’(엘리야)라는 이름과 ‘왕(바알)이 어디 있느냐?’(이세벨)라는 이름이 대변하는 실세의 맞대결입니다.
살아 있는 권력과 직접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엘리야는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의 브엘세바에 이르렀다가 거기서 다시 홀로 광야에 이릅니다. 피신 길에 지친 엘리야는 로뎀나무(대싸리) 아래 쉬는 동안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피할 곳 없이 쫓겨야 하는 엘리야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발 목숨을 거두어주기를 간청했습니다(19:4).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자 의지의 인간인 주인공 역시 상처를 겪을 수 있고 낙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삶의 진정한 목표를 향해 달리는 우리 모두 겪을 수 있는 아픔입니다.

그렇게 좌절감에 빠진 엘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잠든 엘리야를 깨운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일어나 보니 구운 빵과 물 한 명이 놓여 있었습니다. 먹고 마신 뒤 다시 잠든 엘리야에게 천사가 다시 나타나 깨우면서 말합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다시 먹고 마신 엘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밤낮 사십일을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산(시내 산)에 도달합니다.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새기며 일어선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엘리야는 조상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또한 말씀을 받았던 호렙산에 이르러 한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침내 엘리야가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나섰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또한 극적입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물음에 깜짝 놀란 엘리야는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고, 불길이 일어났지만 정작 그 현상 가운데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께서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원 뜻은 ‘조용히 자고 있는 바람의 소리’를 말합니다. 거센 바람, 요동치는 지진,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리라 기대한 사람에게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입니다. 온 몸과 마음을 쏟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했던 사람에게만 들리는 음성으로 다가오십니다. 스스로 처한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은, 힘없는 사람을 사랑했고, 그러나 그 사랑의 열정 때문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해 고난을 겪고, 급기야는 깊은 좌절의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좌절하지 않았던 믿음과 희망을 지닌 사람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20대 대선의 후유증이 심각합니다. 사실상 투표자 총합으로만 보더라도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도 패배를 안게 된 진영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분노와 증오의 논리가 난무하는 대결의 장이 되어버린 선거과정도 문제려니와 그 이후 상황 역시 국민통합과는 멀어 보입니다. 기득권세력에 의한 정치구도가 변화되지 않는 한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저마다의 정치적 견해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고 그것을 반영해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마땅한 정치세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인위적으로 진영대결을 할 수밖에 없도록 짜여진 정치구도가 문제입니다. 집권세력과 국민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도입니다.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책머리에 이렇게 썼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을 받는다. 어린이, 노인, 정신질환자, 가난한 사람 그리고 노숙인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고통을 겪을 때 우리 민주주의의 성실성도 고통을 겪는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 덧붙인다면 고통을 겪게 될 이들로 젊은이와 여성을 들 수 있을까요?
위로를 바라는 마음에 오히려 상처를 덧내는 결과를 빚을까봐 조심스럽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보자 인물을 두고 소란했던 선거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차기 정부의 공약집을 들여다보면 사회적 취약계층에 어려움을 더할 수밖에 없는 정책들로 꽉 차 있습니다. 시장 우위의 친기업 반노동(규제완화, 유연화, 최저임금 조정, 노동시간탄력운영 등), 그리고 반페미니즘(구조적 차별은 없다는 인식, 여가부 폐지, 무고죄처벌 강화 등) 정책이 주를 이루고 있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해법은 없습니다(재정건정성, 부동산감세 등). 환경과 에너지 대안(원전강화, 4대강사업 등)은 거꾸로 가고, 남북 및 국제관계에서도 긴장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고 있지만, 시장의 법칙을 전면에 내세워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날 것의 신자유주의 기조입니다. 규제개혁, 자율성, 선택 등이 강조되는 것은 국가의 공공적 책임보다는 시장의 자율성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검찰권력을 중추로 하는 통치방식이 더해질 것입니다. ‘공정과 상식’에 더해진 ‘법치주의’의 강조가 이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두 정치세력이 얼마나 다를까요? 의미 있는 차이가 없지 않으나 많은 부분 공유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선거국면에서 그 경향이 더 강화되었습니다. 능력 있고 성공한 남자들의 상식에 조금 더 가깝다는 것과 그나마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에 살짝 가깝다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시장우위의 친자본ㆍ기업친화적 경제 성장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둘 다 보수주의 정당일 뿐입니다. 그렇게 큰 차이도 없는 세력을 두고 그렇게 큰 상처를 안을 만큼 진영간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정치구도가 통탄스럽습니다.
이번 선거를 두고 부동산 선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부동산 투기를 막겠다는 정책이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효과로 귀결되어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반감을 샀습니다. 그런데 좀 기묘합니다. 단기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불만은 이해할 만하지만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익을 본 사람들도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10억을 벌었어도 100만원의 종부세는 내지 못하겠다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정치세력만을 탓할 수도 없습니다. 보다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통의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한 정치세력은 국민들의 그 욕망에 편승하여 끝끝내 국민을 이용하며 농락할 것입니다. 정치를 끊임없이 거대한 도박판으로 삼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정책적 비전은 사라지고 상대 정치세력의 실수를 흠잡아 권력을 장악하는 지금과 같은 사태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입니다. 빈부, 세대, 성별, 이념, 학력, 종교, 정당 간 갈등이 세계 최고 수준에 해당하는 한국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 모두의 지혜가 절실한 때입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오늘 이 말씀을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양식, 하늘의 말씀을 받아먹고 기운을 차리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기에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분별력을 지녀야 합니다. 그저 내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 여정에서 지치지 아니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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