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난과 위로, 또는 절망과 희망의 모순 - 고린도후서 1:3~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3-27 18:19
조회
13143
2022년 3월 2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고난과 위로, 또는 절망과 희망의 모순
본문: 고린도후서 1:3~7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의 첫 대목입니다. 말 많고 탈 많은 고린도교회에서 바울이 심하게 공격을 받았지만(2:3) 바울을 공격한 사람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2:5~10; 7:6~15)는 소식을 접한 후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말씀은 그저 의례적일 수도 있는 것과는 달리 예사롭지 않은 인사말입니다. 바울 자신의 체험과 확신, 그리고 고린도교회와의 관계가 깊게 배어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첫머리에서 모든 위로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고 받아들여준 고린도교회에 교우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통상적인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보다는 첫머리에서 위로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에게는 물론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도 위로가 절실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위로는 어쩌면 매우 평범하고 인간적인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공격한 일부 교우들이 뉘우치고 있다니 사도에게 위로가 되었을 것이며, 동시에 공동체 안에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근본적인 차원의 위로를 말합니다.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 편지는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것은 자신들로 하여금 환난 당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고 확신합니다(4절).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로해 주시는 구체적 증거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5절)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도와 그 일행이 겪는 환난과 위로는, 사도와 그 일행을 신뢰하며 하나를 이루고 있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에게 구원과 위로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6절) 이 대목에서, 사도와 그 일행, 그리고 나아가 고린도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겪는 고난과 위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는 구체적인 징표가 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7절)

본문말씀은 환난과 위로, 고난과 위로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 또는 교회의 실존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평범하게 그 의미를 헤아리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겪는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기 위해 위로를 나누는 공동체로 실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그 평범한 기대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고난과 위로는 별개의 것으로 병렬되지 않고 동시적인 것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진정으로 하나되게 만드는 정점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5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위로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쳐난다면, 동시에 그리스도의 위로 또한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두 가지 초점을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갖는 대속성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지만, 대속론의 남용과 오용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정말 잘 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대속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제의적ㆍ주술적이거나 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됨으로써 저절로 다른 사람들이 죄 없이 된 것이 아니며,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을 대리해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해 방편일 뿐, 그렇게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해할 때 대속의 사건에 믿는 자의 주체적 결단과 참여는 없습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무고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결국 나와 연루되어 있다는 진실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나와 무관한 사건이 아니라 나의 무심함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는 것은 그 진실을 온 몸으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진실을 깨닫고 나 역시 그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고난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부조리한 현실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그 부조리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위로가 우리에게 넘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용기를 갖고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고난과 위로는 동시성을 띱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내가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고난을 겪으면서 동시에 고난을 극복할 힘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요즘 부끄러운 나라에서 살 수 없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사람들, 엉엉 울어버렸다는 국수집 아주머니... 다 같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은 공감하지만 만일 어딘가 도피처를 찾는 방식으로 해법을 삼는다면 우리 사회는 구원의 손길로부터 멀어집니다. 넘치는 고난과 넘치는 위로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처한 현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삶의 용기와 의지를 지니는 적극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두 번째로는 고난의 연대성을 생각합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이야말로 고난을 겪는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고난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고난을 겪는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이 하나님에서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에서 우리(사도)로, 우리에서 여러분(공동체 회중)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리구조로 되어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의 고난을 전적으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하나님,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그리스도,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아는 사도와 그 일행, 그 사도와 일행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신도들, 바로 이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본문말씀의 요체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6절) 이 말씀이 바로 그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잘못된 길로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의 불행을 자기의 불행으로 아는 사람은 구원에 동참하지만, 남의 불행을 자기의 행복으로 아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파멸로 이끕니다. 자기와 그 세력에게는 유익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강요하는 일을 국가정책으로 구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파국입니다. 사회의 온갖 혜택을 누리며 살아온 사람이 뒤처진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리고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고난의 연대가 가능해지고 진정한 위로가 가능해집니다. 그것이야말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요?

독일의 시인이자 가수인 볼프 비어만이 2005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과 공연을 할 때 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우선 그의 시이자 노래인 <멜랑콜리>의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을 인용합니다. “희망을 설교하는 자, 거참 거짓말쟁이지. 하지만 희망을 죽인 자, 개자식이야. 난 두 가질 다하지.”
김누리 교수는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라고 새겼는데, 이해하기는 쉬어졌지만 원래 표현의 긴장감은 떨어졌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원래 표현에는 작가의 자전적 자조가 섞여 있습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동독의 스탈린식 체제를 비판하고 희망을 역설했는데, 자기가 선포한 그 희망이 오히려 체제를 붕괴시키고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자조감이 반영된 시요 노래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말하는 그 ‘멜랑코리’를 단순한 슬픔이나 우울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멜랑콜리는 극단적인 감정의 모순, 말하자면 ‘이유 있는’ 절망과 ‘이유 있는’ 희망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양편 가운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위험성을 안고 삽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어두운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고, 반대로 바보 같은, 어리석은, 몇 푼 안 되는 희망의 광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과 희망의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온 몸으로 견뎌낸다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습니다. “지성의 비관주의와 행동의 낙관주의. 희망과 절망 사이의 모순을 간직하라.” 이 말은 그 긴장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현실을 냉혹하게 인식하되 어디론가 도피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긴장감만큼 역사는 변화되며, 저마다의 삶 또한 변화됩니다.

고난 가운데 받는 위로의 의미입니다. 고난 끝에 누리는 위로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 받는 위로입니다. 고난 가운데 위로를 받기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 사건이 그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나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만인의 고통을, 피조물의 고통을 봅니다. 그것을 껴안는 하나님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고통의 연대, 고난의 연대 가운데 있다는 진실을 체감합니다. 이로부터 위로를 받고 거듭나는 삶의 희망을 바라봅니다.
한 교우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몸만 왔으면 좋았을 것을 병까지 안고 와서 교회에 심려를 끼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고통을 겪는 이들이 함께 그 짐을 나눠짊어지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서로 위로를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고통이,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잘 난 것, 잘 나가는 것만 자랑하려면 다른 사교클럽을 찾는 게 좋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되새기는 이 절기에 고난 가운데 누리는 위로의 의미를 깊이 새기며 삶의 희망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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