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 누가복음 11:1~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5-22 14:35
조회
6293
2022년 5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본문: 누가복음 11:1~4



본문말씀은 또 다른 주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예배중 드리는 주기도문을 유일한 것으로 알기 쉽지만, 성서에는 사실 또 다른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의 기도는 마태복음(6:9~15)에 근거한 것이고, 오늘 본문말씀인 누가복음은 또 다른 주의 기도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비해 간결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은 모두 일곱 가지 청원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은 다섯 가지 청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맥락도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수훈이 선포되는 맥락에서 전해지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별도의 독립된 맥락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로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은 아예 기도를 주제로 하는 맥락 안에서 간결한 형태로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는 본문말씀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실 준비되어 있다는 것(11:5~8), 그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11:9~10),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가 들어주는 것 이상으로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11:11~13)을 전하고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기도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두 가지의 주기도문은 기본적으로 구약성서에서부터 이어지는 고유한 개념들을 함축하는 셈어(히브리어 또는 아람어)에 기원을 두고 있고, 전승사적으로는 예수님의 어록(Q복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서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짧은 편집문이 긴 편집문 속에 완전히 다 실려 있다면 짧은 것을 더 원래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의 것보다는 누가의 것이 더 원래적인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보다 간결한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이 초기 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전승되는 가운데 그 본래 뜻의 왜곡 없이 적절하게 보완되고 다듬어진 셈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주의 기도는 보다 본래적인 형태에 가까운 것으로, 그 요체가 분명합니다.

우리 교회는 창립 첫해 2000년 7월 30일 예배중 국어학자 박창해 장로께서 주기도문의 의미와 더불어 우리말답게 번역한 주기도문을 제시해주신 이래 그 주기도문을 따르고 있습니다. 2003년도에는 수요 성서연구로 주의 기도를 석 달간 12회에 걸쳐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마지막 특강은 박창해 선생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김삼락 교우가 국악가락으로 곡을 붙인 주기도문 노래를 2004년 8월 22일 주일부터 예배중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2년 넘는 역사에서 우리 교회의 지향을 형성해온 그와 같은 과정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기며, 오늘 다시 주기도문을 마주합니다. 본문말씀의 주의 기도는 이렇게 간결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그 기도를 마치자 한 제자가 다가와 말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것은 당대 유대인들의 관례를 환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을 예로 들고 있는데, 당시 여러 유대인 그룹들에서는 각기 고유한 기도문을 갖고 있었던 것을 환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약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기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제자의 그 요청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말씀의 기도입니다.
크게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두 가지 차원으로는 나뉘는 기도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청원 두 가지, 그 다음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의 청원 세 가지로 나뉩니다.

맨 먼저 기도는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상대, 지금 말을 나누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길게 수식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간결하게 “아버지”로만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르는 아람어 “아빠”에서 유래하는데, 수식어가 없는 누가복음의 표현이 더 진솔해 보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에 성별 개념을 부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적절한 의견입니다.
다만, 예수님 당대에 ‘아버지’라 부르는 호칭의 의미를 헤아릴 필요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근한 상대로 인식하는 태도를 함축합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은 물론 예수님마저도 ‘주님’이라 부르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게 가까이 하나님을 부르며 드리는 기도는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청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은 그 이름이 욕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한 분이라고 믿는 믿음에서 굳이 이와 같이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청원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 아닐까요? 결국 이 청원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욕되지 않게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는 현상은 우리가 숱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 고백하면서 못된 짓을 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질과 권력에 대한 탐욕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욕된 것입니다. 하늘 두려운지 모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새기며 겸허히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해달라는 기도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되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청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해달라는 기도의 내용을 더욱 구체화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게 해달라, 하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이 땅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합니다. 이 땅의 현실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 정의롭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주의 기도에 이처럼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도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은 심각하게 오용되어 왔습니다. 이 땅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간과되고 저 세상에서 이뤄질 영혼의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그 뜻은 오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누가 18:17, 24, 25)는 말 때문일까요? 그 역시 이 땅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기본적인 관심은 바로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 점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현실에서 역동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청원이 사실상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다면, 이어지는 세 가지 청원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의 충족을 바라는 청원입니다. 여기서 양식은 단지 먹거리를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들을 뜻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를 두고, 의식주 등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외에서 인간의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모든 조건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간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필요 충족에 관한 청원입니다.
필요한 양식, 일용할 양식은 기본적으로 출애굽 여정에서 등장하는 ‘만나’(출애 16장)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청원은 결핍으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는 것인 동시에 필요 이상의 욕구와 소유의 남용을 지양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필요 이상의 욕구와 소유를 금하면 모든 사람이 결핍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서의 경제사회생활의 핵심, 이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를 일깨워주는 청원입니다. 무한한 욕구 충족의 경제가 아니라 필요 충족의 경제를 일깨워줍니다. 민중신학자 문동환 목사는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주의 기도를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와 권력을 남용하고, 무한한 탐욕에 매인 사람은 주의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청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가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죄’는 아람어 의미상 ‘죄’ 또는 ‘빚’ 어느 것으로 번역되어도 되지만, 누가복음에서 ‘죄’의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든 그것은 서로 대등할 수 없는 관계를 함축합니다.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그것은 훗날 사도 바울이 역설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떤 차별도 용인될 수 없으며, 누구나 하나님께 의롭게 인정받는다는 것과 상통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도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공평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다짐을 부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초기 교회에서 이것은 주로 배교의 유혹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오히려 예수께서 광야에서 겪었던 유혹(누가 4:1~13)과 직결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물질적ㆍ경제적 탐욕의 유혹, 정치적 지배의 유혹, 종교적 유혹 또는 기적에의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겪었던 그 유혹을 떠올릴 때, 주의 기도의 다른 청원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기도는 필요한 양식, 일용할 양식 때문에 늘 허덕이는 현실, 서로 물고 물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 언제나 떨치기 어려운 유혹을 겪어야 하는 현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실존적 체험이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현실이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하나님의 뜻이 가로막힌 현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주의 기도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의 기도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의 외침입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는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첫째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요, 둘째 그러나 희망 없이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서 희망을 찾아 나선 이들의 기도가 곧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자세를 일깨워줍니다.
주의 기도는 그저 주문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그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듯,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헌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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