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의 공동체, 포기할 수 없는 이상 - 사도행전 2:41~4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7-31 13:09
조회
5097
2022년 7월 3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의 공동체, 포기할 수 없는 이상
본문: 사도행전 2:41~47



본문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4:32~37의 말씀과 더불어, 간결하지만 초기 교회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단 초기 교회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특정 텍스트를 꼽자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본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단지 교회의 이상을 함축할 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이상을 함축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오래된 미래’라고 할까요? 본문말씀이 전하는 진실을 함께 새겨보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직후 베드로의 설교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사건의 실체는 모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민중의 언어를 아무런 문제없이 알아듣고 소통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저마다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건으로서 성령사건의 실체를 말해 줍니다. 이 증언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는 그 기이한 장면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상황에 대한 변호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술 취한 것 아니냐고 하자 그 모든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며, 그 놀라운 일이 나사렛 예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설파합니다.
본문말씀은 그 설교를 듣고 무려 3천 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공동체 곧 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그렇게 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사도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이 계속 전파되었고, 그 말씀과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새로운 삶의 관계를 퍼뜨려 나간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갈릴리의 나사렛 사람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의 실체를 가늠해볼 수 있는 여러 정보를 담고 있지만, 간략히 그 주요 특징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공동체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재현하는 공동체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며 진정으로 사귀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사귀는 일, 곧 친교(koinonia)는 매우 근원적인 차원을 함축합니다. 인간과 인간을 가르는 원천적인 조건을 철폐하고 사람과 사람이 그 자체의 인격으로 만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말씀은 엄연히 개인 소유권이 보장되어 있는 현실에서 각자의 재산과 소유물을 공유하여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였다고 전합니다.
세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밥상을 함께 나눴습니다. 한솥밥 먹는 사이라는 말이 있듯이, 함께 밥상을 나눈다는 것은 이 공동체가 진정으로 새로운 가족으로 다시 탄생했음을 말합니다. 기존의 혈연으로 제한된, 그래서 그 혈연적 이기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서로 격의 없는 가족 관계를 이뤘다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스스로 이룬 것에 자족하여 스스로 우상에 빠지는 것을 넘어 궁극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개방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막연히 그 어떤 힘에 기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인간들의 차이가 결코 절대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내 곁의 타인을 거리낌 없이 용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공동체를 보고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워했다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혔다는 것이 아니라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경외감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되었습니다. 당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교회가 그렇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을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4:32~37 말씀 또한 그 대의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면, 공동체성의 물질적인 기초라고 할까요, 구체적으로 물질을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된 공동체의 실상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기여한 두드러진 인물로서 바나바를 명시한 점에서도 더 구체적입니다.
2장과 4장에서 공통적으로 증언되고 있는 핵심적인 진실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적 차원에 한정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파급력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도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4:32) 조금 다른 번역으로 새기면 이렇습니다. “많은 수의 신도들이 하나의 심장, 하나의 영혼이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존재가 재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그들에게는 공동적이었던 것이다.”(에른스트 블로흐 / 박설호 역,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261)
한 마음 한 뜻, 하나의 심장 하나의 영혼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상상력이 허용되지 않는 획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 온전히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형성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격은 곧 소유를 의미하는 현실에서, 소유와 상관없는 진정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서로에 대한 믿음, 곧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그 공동체는 시작되었고, 생명력을 유지하였습니다.
그 공동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4:34~35)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진술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공동체의 점층적인 발전 과정을 함축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앞의 이야기는 개인적 소유를 전제하고 있고, 뒤의 이야기는 그 개인적 소유마저 내놓은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의 말씀은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되 소유권의 배타성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소유를 공동선을 위해 활용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뒷부분의 말씀은, 전 재산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진 소유 자체를 아예 공유로 돌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되 공동선을 위해 그 소유를 활용했다는 것은 그리스적인 미덕과 정의에 부합합니다.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의 근거가 되는 『니코마스 윤리학』이 말하는 이상적 상태입니다. 재산을 가진 자유로운 시민 공동체의 이상입니다. 플라톤의『국가론』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스 윤리학』은 그 이상의 중요한 기초를 제시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 신약성서의 말씀은 그리스ㆍ로마 세계 안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증언은 그 세계가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상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구현했다는 자긍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34~35절의 증언 곧 유력한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내놓았다는 증언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져 온 오랜 이상이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는 자기 재산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다수는 갈릴리 출신의 가난한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여기에 점차 다른 지역 출신의 비교적 유력한 사람들이 결합하였는데, 키프러스 출신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내놓을 수 있을 만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초기교회에 그렇게 몇몇 사람들의 기여가 큰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증언은 신명기의 말씀을 환기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 그러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당신들이 참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신명 15:4) 성서는 이와 같은 뜻을 지닌 말씀을 일관되게 전합니다. 본문말씀과 더불어 병행본문으로 제시된 만나 이야기(출애 16:2~3, 11~18), 오병이어 이야기(요한 6:1~15)가 모두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주의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의 증언은 그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드디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초기 교회의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코뮌에 관한 이 증언은, 초기 교회가 예배 공동체에 한정되지 않고 삶의 공동체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대안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관한 사도들의 증언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들(4:33)이 경험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이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역사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념, ‘공동체’에 대한 관념을 자극하고, 여러 역사적인 운동들을 추동하였습니다. 교회만의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추구하였던 모든 운동을 추동하는 끊임없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류 공통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 정신은 가장 급진적으로는 진정한 공유사회를 구현함으로써 그 어떤 속박도 없는 자유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이상으로 펼쳐지고 있는가 하면, 온건한 형태로는 공공성에 대한 인식과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의 밑바탕을 이루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국가의 정책이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는 것으로만 심각하게 쏠려 있고, 그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경쟁과 효율, 그리고 그 경쟁을 보장하는 ‘공정’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말이 ‘자율방역’이지 공공의 안전을 위한 아무런 적극적 조치도 없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국가의 정책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 효과도 기대되는 것이지 그 믿음이 없는 현실에서는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은 그 현실을 되돌아보도록 이끕니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을 말합니다. 규범경제학이 아니라 실증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단 한 번도 사실로 입증된 바 없는 엉터리 경제 가설이 어떻게 그렇게 질기도록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지 탄식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부자감세’로 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는 현실에서 한 번도 사실로 입증된 바 없고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만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폴 크루그먼은,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극소수의 영향력 있는 집단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기에 진실이 아닌 ‘좀비 아이디어’가 질기게 비척거리며 계속 돌아다닌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신약성서 시대 저자들의 정신세계에서 늘 문제시되었던 로마제국마저도 가뭄이 오면 귀족전용 수도를 가장 먼저 끊고 공중수도를 마지막까지 흐르게 했습니다(홍세화 “분노로 일렁이던 눈가에 이슬 한 방울”, <한겨레> 2022.7.29.).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떨까요? 31일 동안 스스로 0.3평 쇠창살 감옥에 있다 내려온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유최안씨는 말합니다. “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만나봤어요.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인간답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지 다시 새기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인간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이상, 그 전망을 너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의 그 보편적 정신과 메시지를 다시금 새기며 그것이 우리 사회에 구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화의 진정한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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