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저마다 소중한 삶의 가치 - 마가복음 12:41~4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8-07 16:50
조회
5081
2022년 8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저마다 소중한 삶의 가치
본문: 마가복음 12:41~44



본문말씀은 한국 교회에서 매우 빈번히 선포되는 본문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 어떤 해석이 없이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쾌한데다가, 그 내용이 헌금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 흔히 교회에서 인용하고 선포하기에 더없이 좋은 본문말씀인지도 모릅니다.^^
본문말씀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어떤 해설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의미가 간단명료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러나 과연 이 본문말씀이 그렇게 간단명료하기만 할까요? 모든 종교의 전통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다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교훈에 해당하는 이 말씀은 머리로는 너무나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삶으로는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새기자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말씀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더욱 분명한 의미는 이 말씀이 자리 잡고 있는 전체적인 문맥 가운데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본문말씀을 포함한 앞뒤의 일련의 말씀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한 사건 전후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대목에 이르러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을 보여 주는 여러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을 책망하는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요한 대목에서 그 적대자들과 대비되는 사례로서 본문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본문과 직결되는 앞의 내용을 보면,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논하는 이야기입니다(28~34). 한 율법학자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29~31)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제사보다 그 어떤 종교적 생활보다 낫다고 단언하십니다. 물음을 던진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은, 이 점에서 마음이 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문화된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구현하는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체 높은 율법학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자신들의 위신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그 누군가에게 섬김 받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 하나하나도 진정성을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행할 뿐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38~40).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기과시의 욕망에 사로잡힌 율법학자들을 경고하고 계시는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전 뜰에서 헌금하는 여인들 가운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입니다.

성전 뜰에서 헌금하는 모습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헌금함 곁에 서 있는 사제들이 무엇을 얼마나 드렸는지 큰 소리로 외쳤기에 모든 헌금 내역까지 사람들이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이 넣는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렙돈의 그리스의 화폐 단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의 화폐 단위입니다. 얼마나 되는 금액일까요?
한 렙돈은 한 데나리온 곧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의 1/128에 해당합니다. 렙돈 두 닢이니까 하루 일당의 1/64입니다. 2022년 최저시급 9,160원을 적용해 일당을 73,280원(최저시급 × 8시간)으로 할 것 같으면 1,145원 정도 됩니다. 당시 로마에서 한 고드란트면 목욕탕을 두 번 갈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그 액면가로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하찮은 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돈이 지금 그가 가진 돈의 전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 말씀은 누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들이 섬김 받기를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이 가난한 과부야말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체 높은 율법학자들은 보이는 것을 즐깁니다. 겉으로 보이는 의관,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지위, 그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자신들의 언행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가치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한 그들의 눈에 가난한 과부는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가난한 과부는 존재 자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혹시 그들의 눈에 들었다면 보잘것없게도 헌금이라고 겨우 동전 두 닢 밖에는 하지 못하는 하잘것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들의 눈에 그의 초라한 행색과 가난함은 곧 그의 별 볼 일없는 인생, 나아가서는 하나님께도 별로 드릴 것 없는 변변찮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의 초라한 행색이 문제가 아니었고, 그가 가진 것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진실로 정성을 다하는 그의 삶이 그 누구의 삶보다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삼상 16:7) 이 말씀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자 보십시오.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고 스스로 섬김 받기만을 즐기고, 그와 같은 자족적 시각의 한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과연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율법학자들과 과부를 그렇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계신 예수께서는 명백하게 대비되는 사람들의 현실을 이렇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기록 당시의 초기 교회의 상황 또한 반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는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온전성을 일깨워 주는 말씀으로서 또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 안에는 부유한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사람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취약한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뒷전으로 밀리거나 멸시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는 두 가지 점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혼자 사는 여인으로서, 가난한 계층의 여인으로서’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가난한 과부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본문말씀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교회의 온전한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이야말로 교회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이 밖에도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소유의 문제와 그 소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현실에서 되돌아보아야 할 문제들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 풍요로운 은총을 누리는 셈입니다.
하지만 본문말씀의 본래 자리에서 지니는 중요한 의미를 주목하고, 그 진실을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은, 남들 보기에 결코 주목받을 만한 처지에 있지도 아니하고, 뿐만 아니라 남들 보기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정도의 정성을 드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그 본인에게는 사실상 자신의 전존재와 다름없는 정성을 드린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진실은, 저마다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리의 삶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 소중한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소중한 그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것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어디에 소속해 있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느냐,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하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다 해명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자신의 삶에 대한 진정성을 갖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지에 따라 각자의 삶의 가치는 결정됩니다. 자신의 삶에 정성을 다한다면 그만큼 그 삶은 고귀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입니다. 저마다의 삶의 가치는 비교우위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양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인적 자본’이라는 이 시대 최악의 말이 나타내듯이 시장의 가치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진정성을 다한다면 그 자체로 삶은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더욱이 스스로 진정성을 다하는 삶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하나님을 향한 꾸밈없는 정성을 동반한 것이라면 더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모든 것이 시장의 상품가치로 환원되어 그 가운데서 비교우위를 지니는 것만이 최상으로 여겨지고, 교육도, 심지어 신앙생활도 그에 따라 평가받는 오늘 삶의 현실에서, 이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초등교육 취학연령 5세 인하 정책이 지니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인적 자본’의 육성이라는 잣대로 교육을 재단하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발달과정이라든지 인지능력 등을 감안하여 취학연령을 낮추자는 것이 아니라 더 빠른 사회진출로 더 빠른 노동력을 충당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혼란은 오히려 부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을 상품가치로밖에 보지 못한 태도가 국가정책으로 운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할지,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지를 일깨워 줍니다. 율법학자들과 같은 삶의 태도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삶의 태도가 오늘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 삶으로 각박한 우리의 삶의 현실 가운데 희망을 퍼뜨리고 진정한 기쁨을 맛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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