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말씀의 뜻을 제대로 새기는 법 - 마태복음 5:17~2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8-21 16:20
조회
1092
2022년 8월 2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말씀의 뜻을 제대로 새기는 법
본문: 마태복음 5:17~20



율법과 예언의 근본정신을 환기해주고 있는 본문말씀은 언뜻 보기에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예수님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율법과 복음을 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율법을 옹호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의외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뤄질 것이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의 요지를 간추려 보면, 예수님은 완고한 율법주의자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가 의외로 느껴지는 것은, 예수님의 평소 언행과 상당히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 예수님께서는 율법 조문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안식일법도 지키지 않았고 정결예법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해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확실히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평소 입장과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본문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예수님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율법의 폐기인가 완성인가 하는 것은 계속적인 논란꺼리가 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당대에도, 사도 바울에게서도 문제가 되었고, 오늘날 역시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하나님이냐 신약의 하나님이냐 하는 쟁점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입장으로서 오늘 본문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의 기록자 마태의 해석이 반영된 것이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의 깊은 의중이 담겨 있다고 할 것입니다.
“율법이나 예언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어받고 있는 정신세계의 요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율법이나 예언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성서를 뜻합니다. 특정한 조문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성서, 곧 예수님께서 당대에 알고 있는 성서 전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그 성서의 근본 뜻을 성취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 말씀입니다.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뤄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이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해 철저하게 문자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실제로 이 본문은 오늘날에도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정당화하는 구절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의중으로 이 말씀을 선포했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평소 일관된 태도에 비추어 헤아려야 하고, 또한 마태복음서의 문맥에 비추어 헤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점일획’이라는 단호한 표현이 문자주의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의 평소 언행과 마태복음서의 문맥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율법이 함축하는 정신의 근본취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 정신의 철저성을 그와 같이 표현한 것입니다.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특정 조문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정신을 보다 근본적으로 철저히 따르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안식일법과 정결례법이 사람들을 속박하는 구실을 하고 있을 때, 오히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데 그 근본정신이 있다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따라서 일점일획도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철저하게 그 근본정신이 무엇인지 새기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이요, 동시에 오늘 우리가 성서를 대하는 방식을 일깨워줍니다. 율법 또는 성서 말씀의 권고나 금기를 문자 그 자체에 매여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근본정신을 새겨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의 근본정신을 무엇으로 보았는지는 마태복음서의 문맥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의 본뜻이다.”(7:12) 성서의 황금률로 일컬어지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달려 있다.”(22:37~40)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율법과 예언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보다 더 명쾌할 수 있을까요?
율법주의와 분투하였던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의 본뜻을 그와 동일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역시 너무나 자명합니다.
일점일획이 바로 그 본뜻에 따라 새겨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고 있듯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니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그 본뜻에 따라 새겨야 합니다. 성서 본문이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때 성서는 오용되는 것입니다.
성서 본문을 해석할 때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법조문을 해석할 때도 입법취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요즘 법무부장관이 얼치기 초등학교 국어교사를 자임하는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중’ ‘~등’이 문제입니다. 검찰수사권을 제한하는 입법취지를 무시하고, ‘~등’이라고 되어 있다고 해서 시행령으로 수사범위를 대폭 확대하는 것이 과연 입법취지에 부합하겠습니까? 법문언의 오용입니다. 이러니 ‘법비’(法匪)라 하지요. 이런 오용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트립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 또한 그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 역시 평소 예수님의 언행에 비추어볼 때 의외로 받아들여질 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매섭게 비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이 말씀은 그들에게 일말의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에 일말의 진정성을 깡그리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지닌 일말의 진정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들 하면 예수님과 철저하게 대립하는 세력으로만 생각하지만 그 이미지는 복음서들이 기록될 즈음 후대의 상황을 더 강하게 반영하고 있을 뿐, 예수님 당대에 그렇게 완전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헬레니즘 시대에 현실적응주의자들과는 달리 율법의 정신을 지키고 실현하고자 하는 경건주의 운동(하시딤)으로 등장한 분파 가운데 하나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도 그들의 생각과 공유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과 식사를 함께 나눈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누가 7:36; 11:37; 14:1). 그들이 처음부터 완고하게 문자주의적 태도를 취했던 것도 아닙니다. 어느 시점에 예수님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확연하게 구별되는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그 단절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의 정신을 생활화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이 점차 경직화하고 형식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간파하시고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행위의 진정성을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의 규례 하나하나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를 따지며 자신들의 신실함을 드러내려 할 때, 그 율법의 근본 뜻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그 뜻을 이루려는 태도를 더욱 철저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서 율법의 철저화, 율법의 완성을 지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태도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살인(21절)과 간음(27절), 그리고 맹세, 보복, 원수사랑에 관하여 조목조목 입장을 밝히고 있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기 형제자매에게 성내는 사람, 모욕하는 사람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 ‘간음하지 말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다.’ 모든 경우마다 이런 식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법적ㆍ도덕적으로 정죄 받거나 지탄받을 행위를 하지 않은 것으로 율법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근본적 동기부터 문제삼는 태도입니다.
진정으로 옳은 행동을 한다는 관점에서 율법의 준수 여부를 판단할 것 같으면, 겉으로 보기에 이율배반적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몸소 안식일법이나 정결예법을 무시했던 경우처럼 형식적인 율법의 준수가 오히려 의를 이루는 길이 아니라 사람을 옭아매는 구실을 할 때 그 ‘율법’에 저항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내용들의 경우처럼 겉으로 드러난 율법적 행위를 암만 잘 지켰더라도 근본적인 문제가 간과되었다면 결코 그 행위만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진실은 율법과 예언의 본뜻을 헤아리고 그것을 모든 행위 동기의 밑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태도가 모든 옳음의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말씀이 산상수훈에 이어지고 있는 맥락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어쩌면 불가능한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가가 있습니다. 저마다 인간이 이룬 성취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서로를 용납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이루기 위한 길이 여기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혼자만의 성취에 몰입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를 생각하고 스스로의 밑바탕을 돌아봄으로써 이루는 삶의 평화를, 예수님께서는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가르침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진실한 믿음의 여정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자기만의 의에 매몰되어 누군가를 정죄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진실로 사랑을 나누는 삶의 여정에 함께 하는 것을 자긍심으로 삼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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