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세계관의 변화, 그 결단의 위대성 - 사도행전 9:1~1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09-04 14:04
조회
1150
2022년 9월 4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세계관의 변화, 그 결단의 위대성
본문: 사도행전 9:1~19



사도 바울은 예수사건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보편화하는 데 기초를 닦았습니다. 갈릴리 예수사건이 사도 바울을 거치지 않았다면 오늘 그 사건의 위대성이 세계인에게 알려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위대한 삶의 전환을 극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 ‘개종’ 또는 ‘전향’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 사건은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도중에 일어난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열렬한 박해자였던 사울이 그 정반대로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열렬한 사도 바울로 변모하게 된 계기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샅샅이 찾아내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고 다마스쿠스로 향한 사울은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환하게 비쳐 그는 그만 그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대체 누구시냐고 묻는 물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응답과 함께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다마스쿠스에서 해야 할 일을 일러 주십니다. 이 일로 사울은 눈이 어두워져 겨우 사람들에게 부축을 받아 몸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시력을 잃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아나니아가 나타나 세례를 주고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자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거듭나는 극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은 본문 말고도 두 번(22:6~16, 26:12~18) 더 이 사건을 반복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한 묘사가 조금씩 다릅니다. 바울 자신이 직접 기록한 친서를 보면(갈라 1:17; 고전 9:1; 15:8), 그 사건의 실체는 어렴풋하지만 ‘내가 예수를 만났다’ 하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 사건의 서술적 개요를 그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하나님께서 이 역사에 개입하신 데 대해 한 인간이 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를 받아들인 한 인간의 태도와 그 정황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 인간이 세계를 전혀 달리 이해하게 되는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수용한 결단의 위대성을 함축합니다. 인간은 변화되기 어렵다는 비관론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인간 변화의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열렬한 그리스도의 박해자가 어떻게 가장 열렬한 전도자로 변화되었을까요?

먼저 사울은 어째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되는 유대교의 가르침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도’(道)가 다르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를 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 기반을 뒤흔들 만큼 위험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첫째 야훼를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둘째 그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민으로 삼았다고 믿었습니다. 셋째 그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율법을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분파에 따라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에 차이가 있기는 했습니다. 예컨대 당시 최상위층에 속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은 데 반하여 사울이 속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를 믿었습니다. 또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을 믿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믿음과 훗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믿음은 많은 부분 공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달랐을까요? 유대인 바리새파 사람인 사울에게 위협적일 만큼 다른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 안에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까지도 받아들여 함께 식탁을 나눴습니다. 그 어떤 소수자이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선민으로서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당시 정통 유대인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백성을 구원할 메시아는 마땅히 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그 만한 위엄을 갖춘 분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통념상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신명 21:22~23). 또한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의 정치범에게 부과된 가장 잔혹한 처형이었습니다. 그렇게 처형된 사람이 반역자이자 동시에 패배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수치’였습니다. 그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이 사울에게 용납될 리 없었습니다. 그 믿음을 따르는 이들이 유대사회 안에 공존하는 한 선민의 거룩함은 무너진다고 보았습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까닭입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변모했습니까?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섰습니다. 선민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무너뜨렸습니다. 자신은 정통 유대인 엘리트로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기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에 섰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고수해왔던 ‘거룩함의 정치’를 팽개치고 ‘사랑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전면에 내세웠고, 그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가장 핵심적인 믿음의 진실로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에게서 십자가는 기존의 모든 상식, 기존의 모든 정당성, 기존의 모든 합리성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대미문, 전인미답의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표지로서 십자가를 우뚝 세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 조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을 ‘넘어서는’ 데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표방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 십자가를 내세웠을까요? 십자가야말로 예수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응축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버린 하나님,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오셔서 아무것도 아닌 자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예수의 삶을 그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은 바울이 어떻게 그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실마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점을 주목하면서 그 체험의 실체를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이 사건을 통해 사울이 예수를 만났다는 점이요, 둘째는 이를 계기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점입니다.

첫째로 사울은 광채 속에서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의 주인공을 곧바로 예수로 인식합니다. 사울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과 예수의 연속성, 동일성을 말합니다. 예수는 여전히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현존해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직접 예수와 삶을 공유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재연된 예수의 삶을 사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몰랐으면 박해도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는데,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기에 박해를 한 것입니다.
광채와 음성 가운데 그 예수께서 사울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이 부정했던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입니다.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나타나셨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친서 표현을 따르면 예수를 만났다고 한 것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사도 2:1~13)에서처럼 영의 임재로 말한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장 낮은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예수의 삶의 실제를 직시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떻게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까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지속되는 예수의 삶을 통해서였습니다. 이제껏 그 의미를 부정했지만, 이제 그것이 지금 자기에게 요구되는 삶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 극적인 사건과 더불어 눈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사흘간 어둠 가운데 있다가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진정한 거듭남을 뜻합니다. 또한 바울은 곧바로 아라비아로 간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는데(갈라 1:17),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광야에서 겪은 체험을 연상시킵니다. 그 일련의 과정 가운데서 바울은 예수의 삶을 스스로에게 새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만난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9:15) 바울은 유대인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어와 아람어를 구사했고, 히브리어를 알았으며, 라틴어까지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것은 이전에는 자신에게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예수를 따르는 이들 가운데서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왕의 선민 가운데 전파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의 삶 자체가 이미 모든 경계를 무너뜨렸다고 인식한 것입니다. 삶 자체가 그것을 이미 보여주셨고, 십자가는 그 극한을 보여주신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오셨다면, 그 사이에 어떤 경계도 있을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동시에 화해의 표징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죄를 만들어내고, 적대감을 만들어내는 그 모든 조건들을 걷어치우도록 만드는 진정한 화해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해 예수의 삶의 진실을 온몸으로 새기고, 그로부터 바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진실을 온전하게 직면하게 된 빛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바울은 세계를 이전에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그와 달리 전적으로 거꾸로 보게 되었습니다. 체제를 수호하고자 하는 입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세계관의 혁명을 경험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의 회심 사건은 그리스도교의 탄생 계기를 알려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한 인간의 극적인 변화 가능성과 그 실제를 보여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참 완고하여 도무지 변화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인간사회 문명의 도약은 언제나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존 지식의 한계, 기존 판단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인간사회 자체가 변화되어 왔습니다.
바울의 회심 사건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새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비범한 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서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인간의 변화, 더불어 세계의 변화를 믿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여정을 신실하게 따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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