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길, 인간의 길 - 이사야서 40:1~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12-11 16:07
조회
2414
2022년 12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길, 인간의 길
본문: 이사야서 40:1~8



대림절이면 가장 자주 마주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길을 평탄하게 닦으라는 메시지가 주는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두 번째 이사야(40-55)의 첫머리입니다. 첫 번째 이사야보다 약 2세기 뒤 곧 6세기의 기록으로 보이는 두 번째 이사야의 예언은 매우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민족적 신앙을 넘어 보편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비로소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 보편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는 데서 어찌 보면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서로 다른 기조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야훼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에 대한 기대와 환호로 희망을 선포하는가 하면 그 하나님의 섭리를 마침내 이루게 될 고난의 종을 노래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승리의 영광과 그에 대한 환호와, 고난에 대한 깊은 통찰은 명백히 대비되는 기조입니다. 두 번째 이사야는 그 대비되는 기조 가운데서 고유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야훼 하나님의 인도로 그 백성이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의 선포를 기조로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두 번째 이사야의 대립되는 기조를 살짝 엿보이고 있습니다.

절대로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대제국 바빌론이 쇠퇴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예언자는 포로 된 백성에게 희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 목소리가 외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았다 ... ”
여기서 ‘복역’은 ‘강제노동’으로 새기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자의에 따른 수고가 아니라 타의에 따른 노역을 뜻합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이 아니라 타의에 매인 삶입니다. 예언의 목소리는 그 삶이 끝났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그 삶의 종식이 갖는 의미를 선포합니다. 죄에 대한 형벌도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의에 따르는 삶이 백성들 스스로의 잘못 때문에 비롯된 측면에 대한 성찰을 함축합니다. 예언자들의 일관된 선포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공동체 안에 정의를 이루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 위로의 선포와 더불어 본문말씀은 새로운 구원의 길을 닦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주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이사야가 선포하고 있는 ‘주의 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길을 예비하라’는 표현은 두 번째 이사야의 독특한 어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예언자가 살았던 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가 길을 말할 때 그 길은 바빌론제국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위엄을 자랑하는 반듯한 바빌론 도성의 ‘큰 길’입니다. 로마의 세계지배보다 훨씬 앞섰던 바빌론제국의 길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 그 길의 선구 격이었습니다. 그 길은 대제국 바빌론의 위용을 상징하며 바빌론의 세계지배를 상징합니다. 그 길은 승리한 왕과 그의 군대가 개선행진을 하는 길이며, 그들의 신(벨)의 영광을 드러내 주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말하는 길은 바빌론의 왕과 신을 위한 길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과 그 백성을 위한 길입니다. 도성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고향으로 향하는 광야의 길입니다. 바빌론의 길이 끌어 모으는 길이라면 광야의 길은 풀어 헤치는 길입니다. 바빌론의 길이 지배와 억압을 상징한다면, 광야의 길은 해방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길로 끌려가면서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길은 치욕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마련될 광야의 길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영광의 길입니다. 광야의 길은, 이전에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해 걸었던 그 해방의 길이며 영광의 탈주로입니다.
예언자는 그 길을 닦으라고 외칩니다.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케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야 낼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야훼 하나님과 그 백성의 영광을 위해서는 꼭 닦아야 하는 길입니다. 이사야는 그 길을 닦으라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그 길을 닦으라고 합니다.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마침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현장을 목격할 것이고, 그 길을 길이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우리의 옛 선인이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은 길입니다.

그 길을 닦으라는 하나님의 음성과 함께 “너는 외쳐라” 하는 소리에 놀라 예언자가 묻습니다.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반문입니다. 그 반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새로운 해방의 길을 닦으라는 장엄한 선포에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시편(39, 40, 90)과 욥기에서도 반복되는 내용으로, 그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인생무상을 노래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예언자가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한 공감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꿈꾼다 한들 그저 한 순간 영화를 누리다가 사라지는 들꽃과 다르지 않거늘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하는 민초들의 심정과 같은 예언자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 예언의 맥락에서 이 탄식은 매우 독특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위력 앞에서 도무지 어떤 희망을 기댈 수 없는 민초들의 절망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민초들의 입장에서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다가왔던 바빌론제국의 운명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이 탄식은 반전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이 말씀은 그 반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민초들이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민초들이 다시 일어서는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체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난관 가운데서도 결코 체념하지 않고 새 길을 닦는 사람들의 의지와 실천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갓 인간이 만들어놓은 굴레에 매여 신음하는 처지였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며, 그 굴레는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전한 나락의 경험은 가장 높은 하늘을 바라보는 계기가 됩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세계를 새롭게 인식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언의 말씀에서 탄식은 그와 같은 반전의 계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자가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을 노래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고난은 부조리한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며, 이로부터 고난의 연대를 이끌어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세계가 이뤄집니다. 이는 인류 정신사의 기축 시대 인간실존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여기에서 ‘민중의 메시아성’ ‘한의 속량적 성격’을 통찰하였습니다.
예언자는 인간이 처한 한계적 상황을 오히려 새로운 반전의 계기로 받아들이도록 이끕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는 믿음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운명의 굴레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고 그것을 헤치고 새롭게 길을 닦는 이들에게 열린 세계입니다.

성서의 집요한 희망의 약속 가운데서 오늘 우리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특별히 인권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봅니다.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초고속 성장을 이룬 한국사회의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성장의 가도를 내달려 왔습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혀서...’ 탄탄대로를 달려온 것일까요?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동안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적 격차와 차별이 극단화되었습니다. 오히려 굴곡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가치전환은 이뤄지지 않은 채 여전히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생명보장과 인권 존중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의 위협이 일상화된 현실 가운데 있습니다. 세월호와 이태원의 참사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살고자 일하는 그 일터에서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줄지 않고 있습니다. 매년 그 희생자들은 한 번의 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몇 배에 달합니다. 살아 있다고 해서 모두가 삶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옥과도 같은 경쟁에 허덕이며 각자도생에 몰입해 있는 이들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출산율 0.8%, 이는 우리 사회가 결코 살 만한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현 정부의 출범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기득권의 카르텔은 더욱 강고해진 반면 사회적 소수자들은 기본권을 제약당하는 가운데 궁지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시민적 기본권은 물론 사회적 기본권 역시 심각하게 제약당하고 있습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연구를 위해 자료를 소지한 것을 두고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으며,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서는 취재 자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노동권, 교육과 복지 등 사회적 기본권들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헌법에도 국제규약에도 위배되는 업무개시명령으로 강제노동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정치는 사라지고 법치를 내세운 검찰권력이 전횡을 일삼고 있습니다. 자기 안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통치세력만 있을 뿐,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 할 국가는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굴곡에 굴곡이 더해지는 첩첩산중의 형국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길은 경제성장의 가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제국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안전과 인간 존중이 보장되는 길을 여는 것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길이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보장하는 길입니다. 절대빈곤의 상황에서 ‘잘 살아보세!’를 외쳤던 것은 납득할 만합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격차가 심화되고 매일매일 사지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여전한 것은 부끄러움입니다.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길을 닦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믿고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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