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다 - 누가복음 4:16~21[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1-01 17:17
조회
2056
2023년 1월 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예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다
본문: 누가복음 4:16~21



새해가 시작되는 첫 주일이자 동시에 천안살림교회 23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선포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나사렛에서 목수, 곧 건축 노동자로서 30년을 살았던 예수께서 공적인 영역에 등장하는 모습을 전해주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분명하게 집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지향점을, 또한 동시에 교회의 지향점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 바로 앞에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유혹, 그것은 예수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인간의 삶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의 없는 경제, 끝없는 권력의 욕망, 종교적 허영이 세 가지 유혹의 실체이며, 예수께서는 그 유혹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전망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유혹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써 비로소 사람들 앞에 공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복음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그 유혹을 이겨내고 본래 자신의 삶의 출발점인 나사렛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그 회당 안에서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당시 회당 예배는 두 가지 기도 곧 ‘쉐마’(신명 6:4~9)와 축복의 기도에 이어 율법과 예언서 낭독과 이에 대한 해설(설교) 후 마지막 사제의 축복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성서(율법과 예언서)를 읽고 해설하는 것은 성인 누구에게나 허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한 것은 어떤 특권에 따른 것이 아니라 모든 성인에게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건축 노동자 신분에 해당한 예수께서 어떤 특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한 말씀을 찾아 읽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

명확하게 사회적 성격을 띠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 선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며, 포로 된 사람들이 해방되며, 눈먼 사람들이 다시 보고, 억눌린 사람들이 풀려나는 사건을 일으키는 선포입니다. 이사야서(61:1~2)를 낭독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본문말씀은 그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가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가 깃들어 있습니다.
‘은혜의 해’는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서가 말하는 ‘희년’(레위 25:8~55)을 뜻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때입니다.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리고, 땅마저도 휴식을 취함으로써 원상 복구되는 때입니다.

이 땅과 이 땅에 거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어째서 은혜의 해, 은총의 해, 희년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이 땅의 현실이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 의가 지배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누려야 할 하나님의 선물을 사유화하고, 그렇게 누리는 것을 자신의 의와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만연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방식이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옳음을 내세우고 저마다 자신의 능력을 내세울 때 현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펼쳐졌습니다. 땅은 피폐해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나뉘어졌습니다. 경제적 빈곤으로 자신의 몸을 팔아야 했고 따라서 자유를 잃은 사람도 발생했습니다. 억압을 겪어야만 하는 사람들, 눈을 뜨고도 진실을 보지 못하고, 진실을 보고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의 실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현실을 보고, 당신의 은혜를 일깨우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환기하도록 촉구하시고, 그 은총을 기억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희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삼 선포하고 계시는 은혜의 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체험하는 것은 내 마음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심리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나 혼자만의 의지나 능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삶의 관계성과 연대성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떠받쳐 주는 존재들로 살아가고 있다는 진실,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다면 그 진실을 새삼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의 출발점에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일깨우는 말씀을 찾아 읽은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 스스로의 자의식을 의미하며, 동시에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만의 능력과 업적을 내세우는 삶의 원리와는 다른 삶의 차원, 곧 삶의 관계성과 연대성을 환기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뤄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진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돈과 재물이 능력이 되는 현실이 아니라 공정한 정의가 이뤄지는 현실을 말합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격차가 심화되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공평한 삶을 누리는 현실입니다. 포로 된 사람들이 해방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인신을 구속당한 사람들, 몸은 움직이지만 사실은 갖가지 제약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펼치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눈먼 사람들이 다시 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감추어졌던 진실이 드러나고 누구나 그 진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현실입니다. 진실을 감추려는 온갖 장애물들, 또는 진실을 대면하기에 두려운 자신의 어떤 욕망 때문에 보지 못했던 진실을 비로소 온전히 보게 되는 현실을 뜻합니다. 억눌린 사람들이 풀려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억울하게 짓눌리고 굴종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 자신의 영혼에 상관없이 영혼 없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했던 사람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들 때문에 피해를 입고 상심해야 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뤄지는 주님의 은혜의 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천하에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공적 생애를 향한 출사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선포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순간 예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 오늘 이루어졌습니다.”(4:21) 장차 이뤄질 일이 아니라 지금 그 일이 이뤄졌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과 선포 그 자체로 이미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를 그리거나 막연한 미래에 기대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저마다 삶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만드는 삶의 조건 가운데 있습니다. 배타적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삶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노고에 대한 배려를 망각하게 만들고 근원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더하여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공정의 개념은 그 사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경쟁과 효율성의 개념이 최고의 도덕적 개념으로까지 여겨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연대와 협력, 돌봄과 보살핌은 약자들의 미덕으로만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흉내 내는 국가적 제도 가운데 하나가 사면권입니다. 과거 군주시대의 유습이지만, 그 취지가 지니는 긍정적 의미 때문에 오늘날 민주적 헌정국가에서도 대개 허용되고 있습니다. 국민통합의 기능 또는 사법적 판결의 오판가능성에 대한 최후의 교정 장치로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존속하는 제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면권마저도 특정한 세력에게 면죄부를 허용하고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고 있는 사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수단이 정의를 훼손하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할 틈은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의 소유와 자기 의만 자랑하는 형국입니다. 그 은혜가 그저 마음 한켠 심리적 현상으로 유폐된 사연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삶 가운데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자랑할 만한 능력이 없어도 서로 마땅히 존엄한 삶을 누리는 세계를 예수께서는 선포하시고, 그 말씀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 가운데 그 세계가 실현되었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지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23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의 지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사랑의 온기를 충분히 누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맘껏 누리는 세계를 향하여 정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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