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 갈라디아서 3:26~28[박경미 교수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3-01-15 17:04
조회
2307
2023년 1월 1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본문: 갈라디아서 3:26~28
박경미 교수(이화여대)



조셉 니담의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는 중세 유럽에서 자주 행해졌던 동물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법정에서 동물의 재판과 구형이 자주 행해졌고, 정식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고 합니다. 조셉 니담이 예로 든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자연의 법칙을 어긴 동물에 대한 처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유럽에서는 수탉이 알을 낳는 “가증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죄”에 대해 수탉을 앞에 놓고 재판을 해서 산채로 화형 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스위스 바젤에서는 1730년에도 이렇게 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당시 해부학의 수준으로는 그런 변이를 설명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일 것입니다. 니담은 자연의 이상현상에 대한 동서양의 태도 차이를 말하기 위해 이 예를 들었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개신교인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접할 때마다 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암탉이 알을 낳는다는 경험적 인식이 자연의 섭리라는 이름의 보편적 진리가 되고, 마땅히 암탉만 알을 낳아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원칙으로 진화합니다. 그리하여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엄한 닭들은 불태워집니다.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경험은 문화나 제도, 지식 형성의 출발점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경험의 무게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은 경험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고, 또 개인적, 집단적 주관과 편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보편화해서 하느님의 명령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편견을 강요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험적 인식이 이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무시간적 윤리적 원칙으로 포장하기 위해 소위 자연의 섭리, 하느님의 뜻, 또는 상식이 동원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암탉이 알을 낳는다는 것은 경험적 진실일 뿐, 생명체가 모두 암수로만 구성되어 있는지, 암수의 구별을 어떻게 하는지는 자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명하지 않은 것을 자명한 듯이 강요할 때 소수자나 예외적인 집단은 산채로 불태워진 저 불쌍한 수탉의 신세가 됩니다. 인식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간단히 그것은 폭력입니다.
오늘날 인류학자들은 모든 인간 사회가 이성애적인 것은 아님을 밝혀주었고, 동물행동학자들은 포유류, 특히 사회생활을 하는 영장류들이 번식을 위한 짝짓기 이후까지 이성애적 생활을 지속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주었습니다. 생물학적 번식은 당연히 이성애적이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가 반드시 이성애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 역시 후손을 낳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결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이성애 중심주의, 이성애 문화가 지배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중세 기사들의 우정, 고대 철학자들 사이의 우정에는 에로틱한 표현과 행위가 넘쳐납니다. 학자들의 연구결과는 이성애 중심주의와 거기 근거한 성소수자 억압이 인간 본성이나 신적 창조질서에 근거해 있다는 본질주의적 이해에 반합니다. 인간 사회가 지속하기 위해 이성애를 통한 재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생물학적 기본 조건일 수밖에 없지만, 이성애 문화는 본질적이고 신적인 질서가 아니라 역사적 현상입니다. 기독교는 이성애만이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른 유일하고도 지배적인 인간 성애의 형태라고 규범화함으로 다른 성애의 형태들을 억압하는 데 일조했지만, 기독교에 의해 이루어진 이 과정 역시 하나의 역사적 현상입니다.
동성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 존재해왔습니다. 많은 동물이 동성애 행위를 하며, 거기에는 인간도 포함됩니다. 기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사람이나 동물이나 소수지만 동성애를 하는 생명체들을 허락하셨고, 또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생물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다수는 아니라도 동성애는 언제나 자연 생명세계 속에, 그리고 인간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있어왔습니다. 만일 동성애나 양성애가 소수지만 특정 집단 안에 존재하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부자연스럽지 않다면, 동성애자에게 이성애를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이치와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은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를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럽습니다. 세상에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 존재하고, 또 이성애만이 아니라 동성애가 존재한다면, 남녀 양성 중심, 이성애 중심의 법과 제도, 문화는 그렇지 않은 소수 집단에게 그 자체로서 하나의 폭력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 그러한 자연법적 원리가 하느님의 명령과 겹쳐지고 성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향이 더해지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는 “죄와 벌”이라는 법적, 재판적 응징의 구도 안에서 작동하며, 따라서 폭력성이 훨씬 증폭됩니다. 세속 법체계 안에서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 자체가 범죄로 규정되지 않음에도, 독자적으로 종교적 법체계가 작동하면서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은 엄격히 죄로 규정됩니다. 이로 인해 근대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 성소수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법적, 사회적 평등권, 기본권을 부정하는 행동이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권장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문제와 관련해서 개신교인들이 보여준 행태에서 이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극우 개신교 집단은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본인이지만 성소수자들과 관련해서도 그들의 자유와 평등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성소수자든 아니든 인간은 성적 존재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한 계기이자 출발점이 되는 것이 인간 존재의 성적 층위라는 점을 밝혀주었습니다. 인간에게 성은 생식만이 아니라 삶의 전 차원과 관련됩니다. 성은 지극히 육체적이면서 지극히 정신적입니다. 그래서 성의식이 왜곡되거나 성적인 측면에서 억압받고 상처받을 때 인간은 전존재가 흔들리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누군가의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인정하지 않고 억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를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교회와 사회가 어떤 태도를 갖느냐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가늠하는 사안이며, 영적인 문제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이 문제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세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 수 있는가, 성서가 가르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실천하며 살 수 있는가 하는 윤리적 실천의 문제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셨고, 바울은 하느님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최근 대표적인 개신교 집단이 성소수자와 그들을 돕고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취하고 있는 폭력적인 조치들은 이웃사랑이라는 복음의 원뜻에 배치됩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할례받은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받아들여질 수 있었듯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되지 않고도 교회와 사회의 온전하고도 평등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것일까요? 동성애자를 이성애자로 개조하고 나서야 온전한 신자로 받아들이겠다는 교회의 아집에서 할례를 고집했던 예루살렘 교회 유대주의자들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특정 성적 지향을 죄악시하는 것은 오랜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근거해 있습니다. 전통과 경험, 관습에 근거한 만큼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경우 특히 성서가 그 근거로 내세워지기 때문에 더욱 완강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부터 늘 새롭게 제기되는 시대적 도전을 통해 성서의 역사적 경험들을 재해석해온 전통이 있습니다. 당대의 윤리적 도전과 현실인식에 입각해서 성서를 재해석해온 전통이 기독교 자체 안에 뚜렷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성서 자체 안에서도 예수 자신과 바울이 구약성서와 유대교 전통에 대해 해석학적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치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안식일 계명을 어겼고, 안식일 본문을 상대화했습니다.(막 2:27)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나 정결법 규정보다 앞섭니다. 마가복음 2:23-28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면서 밀이삭을 자르는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을 향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2:27)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이 계명보다 우선합니다. 예수께서는 삶의 곤궁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 주목하고, 그 곤궁으로부터 벗어나 생명을 구하고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율법과 계명의 본뜻임을 천명하셨습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은 전해져온 히브리 성서 전통을 예수께서 자신의 삶의 경험에 근거해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때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무시하고 위반한 것이지만, 문자적인 율법 규정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땅에 발딛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과 행복을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음으로써 율법과 예언의 기본정신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사회의 법체계에 의해 더러운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고, 그들을 하느님나라로 초대했습니다. 법에 의해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이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죄인을 이웃으로 바꾸는 사랑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는 기존사회의 법과 통념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다시 한번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다수성에 근거한 도덕적 우월감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인간의 윤리의식이 지니는 상대성과 한계를 드러내고, 법과 윤리가 근거해야 할 근원적 토대로서 하느님의 급진적인 사랑을 제시했습니다.
예수만이 아니라 바울 역시 전통을 자신의 경험에 입각해서 재해석했습니다. 예수가 촌락들을 중심으로 떠돌아다니며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했던 떠돌이 설교가요, 귀신축출자, 치병가였다면, 바울은 헬레니즘적 도시들을 중심으로 이제 막 태어난 공동체들을 그리스도의 소식에 기초해서 키우고 가꾸어야 할 책임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해방선언인 복음의 기본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달라진 상황 속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려 애썼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급진적인 해방의 소식은 바울의 선포 곳곳에서 살아 숨쉽니다. 바울이 쓴 편지 중에는 로마서 1:26-27처럼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본문이 있는가 하면, 근본적으로 그러한 시대적 편견을 무효화하고,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시대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편견과 혐오를 지양하고 새로운 포용을 향해 나가도록 하는 본문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께서 가르친 복음의 급진적 포용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때로는 모순과 한계를 보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고투했던 사람 중에는 단연 바울이 제일 앞줄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그 점을 잘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종과 계급, 성별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임을 역설하는 힘찬 해방의 선언이자 급진적 포용주의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6-27에서 동성애적 행위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던 바로 그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급진적인 포용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천명하는 대로 교회는 역사적으로 그 구성원의 범위를 계속해서 확대해왔습니다. 유대교 언저리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될 무렵 일차적인 포용의 대상은 이방인이었고, 바울은 그의 전 선교활동에 걸쳐 이방인이 조건 없이 동등한 공동체 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고 맞서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소명을 받은 바울은 할례 문제와 관련해서 마지막까지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은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입장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들이 보기에는 성서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을 차별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복음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이러한 기본적인 확신에 따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성서의 규정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영에 따라 성서를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초기 기독교 역시 예수와 바울의 선례를 따라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성서를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새로운 사랑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결론 지었으며, 이 외에도 음식과 정결에 대한 구약성서의 규정들을 무효화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렇게 했다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하느님과 동일한 하느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 예수와 바울의 하느님을 믿었지만, 구약성서의 내용 전체가 동일한 권위를 지닌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자연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고 축복하신 하느님, 고통스러운 역사 한가운데서 구원과 해방의 역사를 펼치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계승했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경험적 한계 안에 있었던 많은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정신과 현재적 경험에 입각해서 초기 기독교가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석학적 유연성을 지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러한 해석 전통은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롭게 얻게 되는 지식으로 인해 각 시대마다 자연세계와 인간, 사회적 관계들에 대해 계속해서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적 통찰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통찰들은 과거 성서 시대에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을 재고하게 만들었고, 가령 오늘날 교회는 노예제도와 신분차별은 복음과 성서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바울은 종이나 주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하면서도 노예제 자체에 도전하지 못했고, 바울 이후 바울 계열 교회들은 노예제와 관련해서 바울보다 퇴행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딛 2:9-10; 딤전 6:1-2)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은 노예제를 거부합니다.
성서해석의 역사에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성평등, 섹슈얼리티 문제는 비교적 최근에 인식되었고, 현재 교회는 이 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가부장주의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해석학적 과제 중 하나이며, 성소수자 문제는 그중 가장 첨예한 논란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과거 신앙의 선배들보다 더욱 의식적으로 이 해석학적 과업을 수행해야 하며, 더 확고하게 과거의 해석과 맞서야 합니다. 적당히 무마해서 성서 본문이 지니는 억압적 성격을 은폐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성서 본문 자체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긴다면, 인간의 성에 대한 성서의 이해 중 일부는 적합하지 않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레위기나 바울이 성소수자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우리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젠더와 성소수자 문제는 오늘날 특히 급진적인 해석학적 변화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오늘날 지동설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듯이, 성소수자를 인정한다고 해서 바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혼을 인정한다고 해서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성이 존재할 수 있고, 인간은 이성애자만이 아니라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성서와 신앙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언제나 우리를 새로운 시대적 도전 앞에 세웁니다.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인간의 성에 대한 성서의 이해가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며,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실은 예수와 바울,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교회가 이미 선구적으로 보여준 태도이기도 합니다. 결국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해서 교회는 그동안 그래왔듯이 시대적 한계를 지닌 과거의 이해를 오늘의 새로운 이해로 보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은 성서의 진리에 헌신하고 거기에 따라 기꺼이 변화해왔던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운동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로마 헬레니즘 사회에서는 비슷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이 상례였는데, 특이하게 교회공동체는 원칙적으로 모든 신분의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초대교회의 이러한 개방성과 급진적 포용주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갈라디아서 3장 26-28절은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세례고백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 입교했던 사람들은 세례 때 이 고백을 함으로 새로운 삶의 결단을 나타냈습니다. 28절은 구체적 실천을 담보로 하는 고백문으로서 현실에서의 객관적인 변화, 지금까지의 사회적 역할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는 모두 하나다”라는 말은 예수운동의 인종적, 사회적, 성적 포용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하나됨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 heis, 즉 “하나”라는 말은 포용과 통일성을 뜻합니다. “예전에 서로를 서로에게서 분리했던 구별이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부터 모두 하나”라는 포괄적인 포용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차별 없는 포용이 핵심입니다. 인종적, 성적, 계급적 구분이 실제로 제거되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 노예와 주인, 남성과 여성의 관계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새로운 자세를 가지고 실제로 변화된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부장적 계급사회 안에서 명백히 하위집단에 속했던 사람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고 불리면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사회 내에서 실질적인 차별철폐까지 요구하는 사회적 평등선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교회는 이러한 급진적 포용주의를 통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안에 전혀 다른 인간관계,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 누룩처럼 번져가게 했을 것입니다. 일단 누구나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한 공동체 안에서 이질적 사회집단이 함께 부대끼면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차츰 사회적 평등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가능해진 은혜와 용서, 자비에 모두 동등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수 사후 초기 교회에서의 평등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가부장적 계급사회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대안적인 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노예나 여성은 이런 자유와 해방의 선포를 공연한 빈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진실로,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해방을 가져다주는 말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보편화된 남녀차별 사회 속에서 이 말을 충격적으로, 있는 그대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삶과 초기 가정교회에서 실현된 평등한 제자직에 관한 기독교의 비전은 많은 노예와 여성을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막연한 공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공동체를 찾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초대교회의 급진적 포용주의는 공동체 밖에서도 파장을 일으켰고, 이것이 기독교가 당시 지중해연안에서 백가쟁명하고 있던 다양한 종교들 가운데서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공동체들의 기본바탕을 이루었던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선언은 여성들, 노예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쁜 해방의 선언이었지만, 부유한 노예소유자나 남자들에게는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동성애자를 받아들이기 어렵듯이 용납하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열등한 존재로 여겨왔던 노예나 여성을 형제요, 자매로 인정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동성애자를 있는 그대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듯이, 그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공동체 안에 끊임없이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공동체 내의 다양한 분쟁과 갈등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 이후 바울 계열의 저자들이 쓴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목회서신의 가정생활지침에서는 다시 신분적, 성적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퇴행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내포하는 혁명적 변화가 교회 내에 야기한 혼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절들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세례고백문이 가져온 실질적인 파급력을 입증하는 역설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누구나 인종과 계급, 성별에 따른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역할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그들의 제자됨과 섬기는 능력에 따라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었다는 바울의 선포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심리적 태도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존재의 변화,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새로운 공동체로의 가입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인 세례는 바로 그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러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의 변화에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관계 역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있는 그대로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 받아들였듯이, 오늘 우리는 성소수자에게 이성애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교회의 동등한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바울을 가로막았던 시대적, 경험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고, 바울보다 더 바울적이 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떤 지배구조와 차별도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세 가지 범주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는 인종, 계층, 성별의 구분과 무관하게 모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상황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조항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하나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당시 사회에서 혼란과 갈등을 초래했듯이, 이 새로운 조항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가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선언을 지키고 실천해왔듯이, 오늘 우리도 동성애자를 비롯하여 성소수자를 그리스도의 몸의 온전한 지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오랜 역사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지켜온 복음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성소수자는 이방인 고넬리오의 선교에 앞서 미리 베드로의 환상 속에 나타난 하느님이 질색하는 베드로를 향해 먹으라고 했던 온갖 더러운 벌레들 중 마지막 남은 벌레인지도 모릅니다.(행 10) 이때 거부하는 베드로를 향해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 “하느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행 10:15)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성소수자를 우리가 더럽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특정 성적 지향을 죄악시하는 것은 오랜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존립근거인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 근거해서 이제 기독교인들은 오랜 편견을 떨치고 살아 있는 인간,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웃인 성소수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수지만 우리 가운데 일부는 동성을 향한 성적 지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면 이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자신의 성적 지향을 도덕적으로 책임 있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길을 막는 것이야말로 성서와 율법을 앞세워 예수와 바울을 배격했던 사람들 편에 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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