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 한일간 신학적 대화를 향하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5-11-22 10:43
조회
1013
『民衆神学の概念地図』刊行記念イベント
2025年 11月 19日(水) 18時より/ 京都 日本基督教団 洛南教会
2025年 11月 20日(木) 15:00–17:00 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 한일간 신학적 대화를 향하여
民衆神学とは何か - 日韓の神学的対話に向けて
崔亨黙(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한국 민중신학의 고유성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 고유의 역사적 맥락 가운데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로 표현할 때조차 ‘민중’을 달리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Minjung)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고유한 맥락과 그에 따른 고유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자생적 근대화의 길을 차단당한 채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이로부터 벗어나자 곧 남북으로 분단되어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을 뿐 아니라 이후 오랫동안 독재체제를 겪는 가운데 이에 맞선 민중의 저항은 확실히 한국 현대사의 고유한 특수성을 보여주었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찰로서 민중신학의 고유성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민중신학 형성의 배경으로서 국제적 연대와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
그러나 민중신학을 형성한 실질적 계기가 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은 광범위한 국제적 연대를 중요한 한 배경으로 하였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통하여 독재체제를 강화하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맞서 저항하였고 더불어 고난을 겪었다. 특별히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서울 남산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에서 권력의 부당성을 알린 전단을 돌린 사건)으로 박형규(朴炯圭)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구속되자 그리스도인들은 비상한 마음으로 움직였다. 먼저 해외에 흩어진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결속하여 그 네트워크로서 ‘기독자민주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이어 여러 해외 교회들에 연대를 요청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를 비롯하여 여러 해외 교회들이 그 연대의 대열에 동참하여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였다.
그 연대의 중심에 일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연대는, 일제의 한국 식민화, 그리고 이어진 분단과 전쟁, 정치적 권위주의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다. 그 점에서 그 연대는 일방적이기보다는 상호협력과 재귀적(再歸的)인 자기 성찰의 성격을 띠었다. 즉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를 조직하여 연대하였다. 또한 일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국제적 연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 요인도 있었다. 당시 엄혹한 정치적 상황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해외 인사들의 한국 출입마저 자유롭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국 직항로가 없어 해외에서 한국을 향할 때 대부분 도쿄(東京)를 경유해야 했다. 일본 기독교회관에 ‘기독자민주동지회’의 ‘도쿄자료센터’가 만들어지고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한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이 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1973년 5월부터 1988년 3월까지 16년 동안 『世界』 지에 TK生의 이름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 게재된 것도 그런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민중신학의 탄생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일로,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또한 그러한 배경에서 작성되었다. 그 선언은 민중신학의 맹아를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민중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선언이 작성된 곳은 도쿄였다. 물론 그 선언은 한국인에 의해 작성되었다. NCCK 관계자 등과의 교감 가운데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한국인들에 의해 선언이 작성되었다. 그 선언이 세계 교회에 파장을 일으켜 연대를 촉발하게 한 것은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몫이었다. 이번에는 주로 교토(京都) 중심의 간사이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그 선언 1주년에 즈음하여 1974년 5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지에 미국 그리스도인에 대한 호소와 더불어 그 선언의 영문 번역본을 전면 광고로 내보냈다.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민중신학자들이 자주 강조하는 것처럼 민중신학은 1970년대 민중의 발견으로부터 촉발된 것이지만, 그것이 뚜렷한 하나의 신학적 경향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여러 배경이 있고 그 가운데 일본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한 국제적 연대 또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민중신학자들은 그 국제적 연대 가운데서 용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세계 교회와 교감할 수 있는 신학적 언어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최초의 민중신학 담론으로 평가받는 1975년 안병무와 서남동의 두 편의 글이 발표된 이래 1979년 그 신학적 경향을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이라 이름하게 된 것도 그 국제적 네트워크의 하나인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신학협의회에서였다. 물론 1970년대 이래 한일간 신학자들의 대화도 활발히 이어졌고,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민중신학을 형성해가는 일련의 과정이 되었다. 바로 그 점에서 민중신학은 국제적 연대를 통한 소통과 교감의 결과이기도 했다.
지속되는 한일 그리스도인들의 협력과 신학적 대화
한일 그리스도인들의 협력과 신학적 대화는 1970~1980년대 활발했던 것에 비하면 아쉽게도 오늘날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다. 상호협력과 대화의 긴박함과 절실함이 사라진 탓일까? 아니면 여러 가지 차원에서 민간교류가 활발히 이뤄진 탓에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약화된 것일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일간에는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면들이 많고,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1970~1980년대 깊은 유대의 경험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 경험을 되살린 상호협력과 대화는 여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서로 대화하고 배우는 과정은 자신의 세계를 더 넓히고 풍요롭게 한다. 이미 상호협력과 대화의 경험을 지닌 한일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협력과 대화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은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 협력과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가야마 히로또(香山洋人) 선생과 칸요우출판사 마츠야마 켄(松山献) 사장께 깊이 감사드린다. 가야마 히로또 선생은 한국 민중신학에 정통한 학자로서, 세대를 달리하는 가운데 지속되고 있는 한국 민중신학의 동향을 깊이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주요 신학적 저작을 꾸준히 번역하는 가운데 한일간 신학적 대화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이번에 이 책의 번역을 맡아주시어 저자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칸요우출판사는 「그리스도교문화」를 통해 한국의 신학적 논의를 꾸준히 소개할 뿐 아니라 여러 장르에 걸쳐 한국의 저작들을 일본에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주고 있다. 특별히 일본어판 안병무(安炳茂)저작선집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일에도 매진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을 맡아주신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함과 아울러 거듭 감사드린다. 이 일에는 번역자 김충일(金忠一)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협력해 주셨다. 협력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1980년 광주항쟁 직후 신군부의 독재정권하에서 『世界』지를 통해 세계를 접할 수 있었던 기억을 지닌 필자에게 한국어 저작이 일본어로 소개되는 일은 특별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기왕에 공저를 비롯해 몇 권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으나 일본어판 서문을 쓰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그 소회를 밝힌다. 나의 책이 한일간 신학적 대화를 위한 하나의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 더불어 20여 년에 걸쳐 한일 교회간 교류에 깊이 관여하는 가운데 도움을 받은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먼저 한일간 가교에 애쓰며 여러모로 궂은일을 맡아주고 일본에서 수시로 나의 입을 대신해 주는 이상경(李相勁) 목사를 비롯한 여러 재일 한국인 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더불어 지난 27년간 한국 교회와 협력을 지속해 온 교토교구 동역자 여러분들, NCC와 URM 등의 네트웍을 통해 한일간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협력해 온 일본의 여러 동지들께 감사드린다. 책의 서문에 많은 분들의 이름을 명기하였지만,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 분들은 그렇게 한정되지 않는다. 이름이 빠졌다 하더라도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은 것은 아니다. 이 자리를 빌어 양해를 구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시 만난 세계,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
한국 민중신학은 비상계엄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비상계엄은 민중신학의 탄생과 관련하여 중대한 계기였다. 1980년 신군부의 쿠데타와 비상계엄 이후 상황은 2세대 민중신학을 형성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뜻하지 않게 이 책의 일본어판 번역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비상계엄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에 대한 한국 민중의 저항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번역자 가야마 히로또 선생의 요청으로 그 사태와 관련하여 일본어판에는 한국어판에 없는 보론을 추가하였다.
한국에서 이 책을 처음 내놓은 2023년 가을은 윤석열(尹錫悅) 정부 출범 1년 남짓한 시기였다. 이 책 바로 앞 말미에 간략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몹시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시장의 법칙을 전면에 내세워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날것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심히 우려되었다. 더불어 검찰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과정 자체를 무시해 버리고 권위주의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 우려되었다. 그렇게 공(公)적인 것이 소멸되는 상황 가운데서 민중신학의 의의를 새삼 확인하였다.
그로부터 또 1년 남짓 지나고 그 우려했던 상황은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2024년 12월 3일 밤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명백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반한 계엄령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바로 그날 밤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시민의 저항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민주주의를 정상화하게 되었다.
2024년에서 2025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일어난 저항운동은 매우 특기할 만한 양상을 띠었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어우러진 가운데 정치적 직접 행동에서 사회적 직접 행동으로 이어지는 양상이 그 단적인 특성이다.
과거 끔찍했던 계엄의 기억 탓에 또다시 야만의 시대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참여한 구세대들에서부터,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조건으로 여겨졌던 민주주의가 순식간에 파탄 나 저마다의 일상적 삶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참여한 신세대들에 이르기까지 그 세대의 폭이 넓었다. 계급과 계층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구성을 이루었다.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과 종교인, 또는 특정 시민단체 회원들로 구성된 그간 시위 행렬의 전형성과는 달랐다. 평소 살기에 바쁜 여러 생활인들이 함께하였다. 그 가운데 특별히 2030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것만이 두드러진 특성은 아니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다양한 소수자들의 참여다. 이른바 시민권을 갖지 못한 다양한 소수자들이 어우러졌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깃발들에는 그 다양한 주체와 요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른 국적의 거주민과 이주민들이 함께하고 팔레스타인인들도 함께하였다. 장애인들이 위화감 없이 동참하고, 성소수자들도 참여하여 당당하게 단상에서 발언을 맡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들이었다. 언제나 시위 현장은 모두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부당한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직접 행동이 타자들과의 연대를 지향하는 사회적 직접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사연은 바로 그 시위 현장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이라고 해야 할까? 줄곧 그 저항의 주체가 ‘시민’으로 호명되고 있지만, 실상은 ‘민중’적 전형에 가까웠다.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서 시민은 통치의 근본이 되는 주권자로서 민(民)을 의미하기에, 그 뜻을 거스른 통치행위를 바로잡고자 하는 주권자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비상계엄 이후 저항의 국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저항의 주체는 전형적인 시민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아예 정치적 시민권이 없거나 정치적 시민권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시민으로서보다는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이 함께하였다. 그 비율이 얼마만큼 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저항의 대열이 이들에게도 열려 있었고 함께 주체를 형성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보여 왔던 전형적인 민중적 현상에 해당한다. 한국 민중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주체로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결합하면서 정치적 권리 요구에 더하여 생존권의 요구가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 온 점이다. 민중은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 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억압되어 천민·죄인으로 전락했”지만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회복을 주체적으로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徐南同) 선생의 통찰은 바로 그 민중의 운동을 직시한 결과이다. 민중신학을 형성하는 데 실천적 기반을 다진 박형규(朴炯圭) 목사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이웃사랑도 할 수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안병무(安炳茂) 선생 또한 그 인식을 공유하였다. 이는 민중의 생존권적 요구와 정치적 권리의 요구가 결합할 수밖에 없는 한국 민중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민중운동의 현장 가운데서 민중신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서 그 몫을 다하고자 한다.
모쪼록 이 작은 책이 한일간 신학적 대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겠다.*
*** 2025년 11월 20일 코베학생센터에서 함께 발표한 가야마 히로또 선생의 글을 첨부합니다. ***
『民衆神学の概念地図』刊行記念イベント
民衆神学とは何か−日韓の神学的対話に向けて
2025年11月20日(金)15:00〜17:00、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

일본사회와 민중신학
香山洋人
1. 『민중신학 개념지도』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올해 민중신학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75년에 발표된 서남동과 안병무의 논문이 민중신학의 일성이었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1) 최형묵의 『민중신학 개념지도』는 50년 민중신학의 흐름 속에서 처음 등장한 가이드북이다. 사실 『민중신학입문』이란 이름의 서적은 1995년에 출간됐다. 이는 임태수를 중심으로 한 민중신학연구소의 논문집으로 10명의 저자가 각기 논고를 실었다.2) 이들 논고는 각기 중요한 의미가 있어 나 자신은 많은 것을 배웠지만(특히 권진관, 김명수), 한 권의 저작으로서 ‘입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고, 그 내용으로 보면 아마도 ‘이것이 새로운 민중신학이다’라는 서명이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존의 민중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을 바탕으로 기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판은 임태수의 서문에서 밝혀지고는 있지만 수렴된 글이 모두 같은 자세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도 일관성이 결여된 저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1995년 『민중신학입문』은 전혀 입문서가 아니었다.
최형묵의 저작을 굳이 가이드북이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이른바 입문서가 아니라 개념지도라는 독특한 착상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가이드북에 지도는 붙기 마련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진호가 쓴 서평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 문화』 25호(2025.6.)에 게재되어 있는데, 민중신학 전체를 부감하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도이며, 가이드북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때 ‘개론’이나 ‘총론’과 같은 저작을, 그 분야의 제일인자로 지목되는 학자가 자신의 연구 인생을 총정리하는 형태로 집필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작품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학문 자체가 더 이상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흔들림 없는 체계로 간주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해방 신학’ 등장 이후 활발해진 문맥화된 문제제기, 즉 특정 상황에 근거한 신학에 대해 ‘속격의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야유적인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해방의, 여성의, 민중의, 아시아의’와 같은 조건 설정은, 저자/발언자가 어디에 서서 말하고 있는가를 명시하는 대전제를 담고 있다. 이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하느님이 던진 물음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와 통하는 질문이다.3) 자기 자신의 포지셔너리티를 명시하지 않는 학문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인문학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다.
신학의 경우 입장성, 포지셔너리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자/발언자가 어떤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는가이며, 그것은 ‘신앙고백’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적인 신앙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학적 발언의 토대이자 그 배경이 되는 ‘삶의 자리’의 문제다. 강원돈은 민중신학에 있어서 신학자 자신이 신학의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4) 그런 의미에서 최형묵은 대학 연구실을 본거지로 하는 학자가 아니라 교회의 목회자이며, 에큐메니컬 운동의 리더이자 교회개혁 운동의 당사자이며, 사회의 민주화와 평등 실현을 위해 헌신해 온 활동가이기도 하다. 물론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교회와 사회의 교차점에 축을 두고 사유하는 연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자의 민중신학 가이드북이 바로 『민중신학 개념지도』다. 따라서 이 책은 특정한 입장에서 쓰인 저작이다. 더구나 ‘한국신학연구소’ 출범 이후 ‘민중신학회’의 창립을 향해 나아가던 시기, 즉 안병무를 중심으로 한 신학자들이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지배에 맞서 신학을 통해 응전하고자 했던 그 시대에 신학생으로서 직접 그 움직임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중신학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고자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맺음말에 갈음하여’에서 최형묵은 자신의 신학적 편력을 되새기고 있지만 사실 이 책 전체가 저자 자신의 신학적 여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삶을 결정지은 민중신학과의 만남 속에서, 그는 안병무와 서남동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 핵심 개념들을 풀어내며 그것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성찰하고 있다.
‘한 손에 쥐고 보는’라고 저자가 의도한 대로 이 책의 분량은 많지 않다 (원저 215쪽, 일어역 171쪽).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강원돈의 『기독교경제윤리론』이 말 그대로 한 손으로 들 수 없는 대저(12231쪽)인 데 비해, 『민중신학 개념지도』는 부담 없이 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가볍다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최형묵은 서남동이나 안병무가 제시한 다방면의 문제설정 속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경청해야 할 핵심 개념들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보다 큰 맥락 속에서 재조명하며, 오늘의 시대 상황 속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나아가 이러한 개념들을 계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학에 대해서도 고찰하는 고도로 창조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어려운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해설본이 아니다.
이번 일본어판에 즈음해, 보론 「12・3 비상 계엄, 그것에 맞서는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을 새로이 덧붙인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민중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해설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민중신학은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생생한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2. 일본・사회와 신학
이번 출판기념행사에 즈음해 제시된 주제는 ‘일본사회와 민중신학’이다. 주최자가 요구한 것은 여기서 제시된 민중신학의 중요 개념들을 일본의 상황 속에서 풀어내 보라는 작업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그럴 역량은 없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이번에 주어진 주제를 두고 내가 느낀 바를 자기 비판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민중신학은 1970년대의 한국, 즉 군사독재정권과 그에 맞서는 민중운동, 민주화운동이라는 현실에 입각해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 사회에서 그러한 민중신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신학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5) 그리스도교가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가지며 신자 수가 많은 한국과 그렇지 않은 일본의 차이라는 대전제도 있긴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차이가 아니다. 교회 그리고 신학 쪽에 ‘일본 사회’라는 말/개념이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아 왔는가 하는 문제다. 내가 아는 한, 조선 그리스도교사에서 ‘사회’ 혹은 ‘민족’은 항상 중요한 주제였다. ‘신앙으로 나라를 구하다’, ‘예수 그리스도, 민족의 희망’ 같은 일본에서 보면 거창한 표현들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반면 일본의 경우 교회와 그 신학이 자신들의 책임 범위 속에 ‘일본 사회’를 인식해 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목회자들은 모여 있는 신자와 그 가족, 보육원이나 유치원 관계자, 그리고 인근 주민들, 기껏해야 패리시(parish, 사목구)의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나 지역 속에서 교회가 미움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주요 관심사이며, 적어도 일정한 존재감을 발휘하고자 지역 공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한다.
존속 자체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교회의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듯한 교조화된 신학이 있다. 그리스도 고백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과제와 그것 없이도 가능한 과제(이른바 사회문제)를 구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신학자에게 있어서는, 종교 전통이나 문화적 테마로서의 ‘일본’에는 관심이 있어도, ‘일본 사회’라는 문제 설정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서 ‘일본사회와 민중신학’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우선 일본에 있어서 사회와 신학이 단절되어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각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믿으며, 선교와 목회의 과제를 지니고, 또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자각이 일본의 교회 전체 속에서 서서히 쇠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적어도 1995년, 전후 50년을 계기로 교회가 역사 앞에서 스스로를 검증하고자 했던 그 시절을 정점으로, 일본 교회 안에서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언급이 점차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3. 현장과 괴리된 신학
일본의 신학은 서구신학을 소개하는 데 열심이었고, 그 자세는 구미포수라는 평을 받아 왔다. 그러나 민중신학을 비롯한 해방신학 계열의 여러 신학들도 결국 수입신학에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자신의 현장을 ‘일본’으로 파악하고 사회적 책임을 주제로 한 일본의 독자적인 신학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이인하의 『기류의 백성의 외침(寄留の民の叫び)』(신교출판사, 1997), 구리바야시 데루오 『형관의 신학(荊冠の神学)』(신교출판사, 1991)일 것이다.6) 핵무기, 미군기지, 공해, 미일안보, 평화헌법, 야스쿠니신사국가수호, 부락차별, 외국인등록법, 전후보상, 성차별, 장애인차별, 원죄(冤罪), 노숙노동자, 그리고 한국 및 필리핀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지역과의 국제연대 등 다양한 과제에 대처하는 현장에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관련되어 왔다. 이러한 활동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교구나 교단 전체, 그리고 에큐메니컬 단체들이 공적인 연대활동을 전개해 온 역사가 있다. 일본에서 그리스도인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시민운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인들의 각종 운동은 다양한 ‘시사적 신학’, ‘신학적 문제제기’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신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물론 70~90년대의 『복음과 세계』에는 사회적 책임을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논고들이 실렸지만, 그것들은 그리스도교 전체에 도전하는 한 덩어리의 신학적 언설(일관된 신학적 담론)로서 발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찍이 위르겐 몰트만은 신약성경에서의 석의학적 발견이 새로운 교회운동이나 새로운 신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면서, 그 몇 안 되는 사례로 루터의 로마서 석의가 종교개혁을 야기한 것이고, 또 다른 사례로 안병무에 의한 예수와 가난한 백성 사이의 전혀 밀접한 상호관계의 발견을 들었다.7) 성서학 분야에서 일본 신학은 뛰어난 업적이 많다. 그 중에서도 안병무의 「석의적 발견」에 영향을 준 다가와 겐조의 마르코 연구와, 그 후의 연구의 집대성한 신약성서 개인역은 기념비적 위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것이 ‘새로운 교회 개혁이나 새로운 신학’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또 다른 위업으로 평가되는 혼다 테츠로의 신약성서 개인역 역시, 비록 민중 현장과의 연대가 만들어 낸 석의학적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현재로서는 그로부터 ‘새로운 교회 개혁이나 새로운 신학’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야마우라 하루쭈구의 개생어역 신약성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 성경 읽기에 영향을 받은 목회자나 설교자가 있고, 공감하는 독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인 이외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 교회 운동’의 맹아가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그것이 ‘새 신학’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다.
교단립의 보수적 신학대학, 신학부, 신학교가 ‘서구포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큐메니컬 계열 신학부와 신학교도 수입된 해방신학을 배우는데 치중했을 뿐, 자신들의 현장과 삶의 자리를 증언하는 신학을 구축하는 데에는 결코 열심이 아니었다. 이는 신학과 현장 상황 간의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억압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경시되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실천을 위한 지혜이자, 스스로를 고무하고 묻고 새로운 활력원이 될 무언가였다. 그것은 사회과학적뿐 아니라 운동의 장이 갖는 문화, 인간과의 만남이었고, 혹은 개인적 체험이나 신앙이었다면 증언으로서의 신학이 거기서 싹틀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런 현장에는 신학화하려는 욕구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운동에서 ‘신학’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현장은 ‘신학’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8)
신학 측도현장과의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복음적 현실에 눈을 돌려 연대하는 신학자들이 일본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은 세계의 해방신학들을 소개하며 일본 현실과의 관계성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그로부터 새로운 신학이 창출되지는 않았다. 과거 안병무는 한국에서 신학하는 것의 행복은 ‘현장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9) 민중신학은 현장의 물음과 민중의 고통으로부터 성서을 다시 읽어 신학적으로 응답하고자 했지만, 일본 신학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과는 다른 현장이 제기한 물음을 수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최형묵은 민중신학을, ‘민중사건을 목격하고 나아가 스스로도 민중경험을 하게 된 일단의 신학자들’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10) 그렇다면 일본 신학자 자신의 민중 경험이란 무엇일까. 설령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그것을 신학화할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자들의 활동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들의 가장 큰 공헌은 번역이며,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른다면 ‘구미 포수’와 같은 구조에 머무르는 것일 뿐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자들도 과거에는 서구 신학을 배우고 그것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대학 소속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방향을 전환하여 민중신학 창출로 나아갔다. 그런 ‘사건’이 없으면, 자신의 전문적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신학을 창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4. 일본에 민중신학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서구 신학의 모방이 아닌 일본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개신교 초기부터 있었고, 그로부터 ‘일본의 신학’이 형성될 가능성은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와 신학은 그러한 흐름을 계승하지 못했다. 그 원인을 ‘내면화된 식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 교회에는 여러 측면에서 ‘아시아 신학’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민중신학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있을 터인데, 그 수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즉, 민중신학의 독자는 있어도 민중신학자는 없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는 민중신학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는 그에 비견되는 독자적인 신학이 형성되지 않았는가.
서광선은 민중신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신학자는 물론 그리스도인 학생, 노동자, 신문기자, 대학교수, 농민, 저작가, 지식인의 정치적 체험에 대한 신학적 반성의 집적과 표현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신학이요, 억압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학적인 응답이요, 게다가 한국의 교회와 그 선교에 대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응답이다. 민중의 신학은 지하 고문실에서 법정에서 군법회의에 직면해 검찰관의 소추를 듣고, 또 스스로 최후변론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숙고해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창조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참여에 대해 감방 안에서, 옥중에서 가족과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전 세계 친구들이 보낸 책을 읽으며, 실업 중에, 가택연금 속에서 그들의 활동을 온종일 감시받는 가운데, 또 친구를 방문하는 가운데 숙고했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전기이다. 그것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고 행동하며 기도하고 성찬에 베풀었던 여정이다.”(「한국의 민중과 신학-아시아 신학협의회에 대한 전기적 보고」, 17쪽).11)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정권하의 모순과 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운동이자 신학이지만,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던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등의 에큐메니컬한 네트워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일본에는 그런 ‘고난의 현장’이 없었던 것일까. 물론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같은 상황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단순히 그 차이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에는 있고 일본에는 없었던 요소는, 고난의 현장에서 우러나온 신학적 에너지를 신학화하는 의지와 장(場)이라 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이다. ‘서대문민중신학교’로도 불리는 이곳은, 한국신학대학 신학대학원이 폐쇄된 뒤 교단이 세운 신학교로, 민주화운동으로 탄압받은 학생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을 민중신학으로 현장에 내보냈다. 여기서 민중교회 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이 많이 나왔지만 민중교회와 민중신학 사이에는 점차 거리가 생겨나 현장에서 민중신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앞서 언급한 『민중신학입문』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이 현장과 직접 연결되는 실천성을 띠는 데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 한편 안병무가 독일 개신교회의 원조를 받아 1973년 설립한 곳이 ‘한국신학연구소’다. 이곳은 연구자들의 모이는 공간이자, 신학잡지 『신학사상』을 발행하고 신학서적 출판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권진관은 ‘민중신학의 산실은 고난의 길이었고, 키운 것은 한국신학연구소와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이라고 말했다.12) 그러나 실제로는 민중신학의 기반을 만들고 성장시킨 주된 역할을 ‘한국신학연구소’가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두 거장 안병무와 서남동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에 공명하고 영향을 받아 각자의 자리에서 독자적인 전개를 시도한 이들에 의해 발전해 온 신학운동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강원돈에 따르면 민중신학이란 ‘민중에 신학의 초점을 두고 역사 앞에서 민중과 함께 신학하는’ 것이며,13) 이 신학은 ‘민중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 현실을 타파하는 실천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14) 이 이해는 곧 안병무와 서남동의 신학이 바로 그러한 신학이며 그런 기능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에 공명하는 신학자들이 전개하는 신학운동은 안병무나 서남동을 인용하거나 반복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 있어 민중에 초점을 맞춘 실천적 이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 등장의 배경에는 억압적인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었지만, 학술세계에서의 탈식민지주적 움직임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요인 중 하나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안창호와 유영모, 그리고 해방 후 민주화 투쟁에도 깊이 관여한 함석헌 등의 신학은 ‘토착화 신학’으로 불리는데, 그것은 반(反)구미 신학이자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을 문화신학적으로 계승한 것이 유동식과 윤성범이라면, 민중신학은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이고 탈식민지주의적 방향으로 전개된 신학이라 할 수 있다.15) 일본에 있어서 독자적인 신학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는 우치무라 간조의 이름을 들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제국시기의 국가주으적인 ‘일본의 신학’ 시대를 거침으로써 이 흐름은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식민주의를 내면화한 일본과 그에 대한 저항을 지속적으로 계승해 온 한국이라는 역사적 현실의 차이가 이후의 신학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신학에 있어서 ‘역사’란 주로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는데 민중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와 연결되는 ‘역사적 지평’ 속에서의 해석과 증언이다.16)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성과 체험성을 내포한다. 즉, 실재했던 역사적 예수(과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 자신이 경험하는 추상화되지 않은 민중의 현실(현재) 속에서 나사렛 예수가 철저히 사건의 지평에서 합류한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지평이라는 감각은 객관성을 내세우며 안전한 의치에서 관찰자로서 신학을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5. 끝으로: 일본에 있어서의 현장이란
‘현장’이라는 개념의 모호성 혹은 위험성은 중요하다. 교회의 사목자는 이른바 거리의 교회를 현장이라고 부르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병설되어 있으면 그곳이 현장이 된다. ‘현장’은 발언자 자신의 ‘삶의 자리’를 가리키며, 그것을 굳이 비판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종종 자기중심성과 배타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동시에 지닌다는 점이다. 기지 반대 투쟁이나 노숙자 지원을 ‘현장’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도시지역 교회나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여기가 우리의 현장이다’라고 해도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현장, 필드’를 둘러싼 논의나 연구는 많고, 신학에서도 이미 오래된 주제임을 알고 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 속에서 놓쳐버린 것 같아 다시 언급하고 싶은 개념이 있다. 그것은 일찍이 피에르리스가 말한 ‘인간적 기초 공동체’(Basic Human Communities, BHC)이다.18) 이는 해방신학이 중시했던 ‘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Basic Christian Communities, BCC)를 염두에 두고 제시된 것으로, 성서나 교회의 전통을 재해석하기에 적합한 장(場)을 의미한다. 본고의 맥락에서 본다면, 민중의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이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면, 이 논의는 한없이 확장되어 수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론가이든 활동가이든, 혹은 그 말에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사회적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인간이 고통받는 현실(장場)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부조리함을 느끼고 분노하는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또한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공감과 공고(共苦)의 경험을 자기 내면에서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미 이 사회의 문제성을 고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괴로움과 부조리에 직면한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야말로 곧바로 ‘현장’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곳에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고, 그 괴로움을 낳는 구조적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그 현실 속으로 돌진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자신의 장소는 ‘현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서 있는 자리가 현장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밑을 파고들 때 장소는 ‘현장’이 된다. 만약 그 파고듦이 오로지 자기 내면으로만 향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실존주의가 되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 구조적 모순, 그리고 권력구조라는 요소다. 문제는 개인의 내면 혹은 생활권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 때문에 70년대에 한국의 신학자나 그리스도인은 사건의 현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신학자들을 현장으로 이끌었다. 사건에 참여함에 따라 장은 현장이 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있다. ‘세상에는 진정한 현장, 유일무이한 현장이 있다’는 식의 위험한 발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해방운동이 가부장주의에 지배되는 듯한 기만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공감’이라는 연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만 타파하면 민중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단일한 ‘제악의 근원’을 찾아서는 안 된다. 계산이 아니라 말려들어가듯 사람은 스스로의 현장에 선다. 민중신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다시 읽고, 그때까지의 신학에 재검토하고, 그 성찰을 한 덩어리의 신학적 언설(일관된 신학적 담론)로 삼은 것이 민중신학이다. 그러나 왜 그것이 ‘신학’이어야 했을까. 그것은 민중신학을 발신한 이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교 속에 희망을 찾았으며, 신학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그들은 신학에 의한 교회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19)
안병무는 한국의 신학에는 현장이 있고 일본의 신학에는 그것이 없다고 했는데, 오해가 없도록 캐물으면 일본 사회에 현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신학이 현장으로부터 괴리돼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많은 신학자들에게 신학적 ‘삶의 자리’는 탈역사적이고 비사회적인 공간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들이 던진 물음은, 역사의 한가운데서 솟아오른 절박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내면적 과제로만 받아들여져 온 것은 아닐까. 역사의 와중에서 빚어지는 사건들에 직접 맞서거나, 사회적 구조적 모순 때문에 고통에 허덕이는 인간의 현실속으로 휘말려 치달게 하고, 즉 ‘속절없는’ 상황 속에서 현장과 호응하면서 신학을 다루는 듯한 경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은 사실 나 자신을 향한 성찰이기도 하다. 성실한 신학자 제현을 끌어들여 비판하는 듯한 태도는 삼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민중신학과 일본의 신학상황과의 비교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의 솔직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후주】
1) 1975년, 서남동의 「예수·교회사·한국교회」(『기독교사상』 2월호),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같은 해 4월호), 안병무의 「민족·민중·교회」(같은 4월호)가 공개되었다. 참고로, 안병무는 1972년 『역사와 증언』에서 이미 민중을 주제로 다루었다고 하며, 서남동 또한 1974년 강연 「예수와 민중」을 자신의 민중신학 출발점으로 언급하고 있다. 서남동의 두 논문은 『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되어 일어 번역도 존재하지만, 안병무의 「민족·민중·교회」는 일어 번역이 없다.
2) 일본 독자들을 위해 차례를 소개하는 내용이라 한국역에서는 생략한다.
3) 필자의 글 「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참조.
4) 필자의 글 「解題」263쪽.(이하, 주의 페이지수는 일어, 일어역판의 페이지수이다.)
5) 내가 생각하는 ‘일본’은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국경으로 구획된 영토나 국적, 인종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는 공유 가능한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지역, 그리고 그 공용언어(일본어)를 매개로 한 것이다. 기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국명’을 접두사로 한 표현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편리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국가나 국적, 민족·인종을 전제로 하는 사고방식에 빠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주석 없이 사용되는 ‘일본의〜,한국의〜, 유럽/미국의〜’ 등의 표현은 단지 편의적인 것이며, ‘일본어로 쓰인 저작’ 또는 ‘지역으로서의 일본을 기반으로 한 저작’을 간략화한 표현에 불과하다.
6) 물론 일본에서도 자신들의 상황과 대면하는 창조적 신학적 시도는 존재한다. 미완이지만, 카네코 케이이치의 「지금, 여기의 신학」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필자의 글 「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 참조). 최근에는 페미니스트 신학과 퀴어 신학이 활발하다. 그러나 민중신학과 비교할 때, 이는 그리스도교 전체를 향한 포괄적 신학 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존 교리와 제도를 비판하며 새로운 제안을 제시하고, 더 나아가 교회를 넘어서는 운동과의 연계를 고려한다면, 「거류민의 신학」과 「가시관의 신학」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각 학자의 비판을 기다리고자 한다.
7) 몰트만 『神学的思考の諸経験』 310쪽 참조.
8) 일용직 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던 한 기독교 활동가가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을 읽고 ‘이런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잘라버렸던 일화를 떠올린다.
9) 安炳茂『民衆神学を語る』 60쪽.
10) 崔亨黙『民衆神学の概念地図』 22쪽 참조.
11) 이는 1997년 아시아신학협의회를 거쳐 출판된 영어 Minjung Theology: People as the Subjects of History/ edited by the Commission on Theological Concerns of 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CTC-CCA)의 Orbis판(1983)을 위해 쓰인 글(영어)이 원문이며 한국어판을 찾아볼 수 없다. 서광선의 이 글은 민중신학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한 귀중한 것이며, 영문판에서 나온 일어역 기독교아시아자료센터편 『民衆の神学』에 수록되어 있어 다행이다. 그 중요성에 비추어 (일부 말을 수정해) 장문을 굳이 인용했다.
12)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 487쪽 참조. 서대문민중신학교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글 「解題」 294~296쪽 참조.
13) 姜元敦「民衆神学の胎動と発展」9쪽.
14) 같은 책, 57쪽.
15) 박경미는 민중신학의 배경에 일본 식민통치 하의 독립운동 전통과 민중사상 전통이 있다고 지적한다(필자의 글 「解題」 266쪽). 또한 변선환은 정치신학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종교다원주의적 해방신학」을 제안한다. 민중신학의 탈식민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パラダイム転換としての民衆神学」 및 「脱植民地主義神学としての民衆神学」 참조.
16) 최형묵, 29~30쪽.
17) 신학자로서 ‘장’과 ‘현장’의 차이에 주목한 이는 카네코 케이이치였다. 필자의 글 「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 참조.
18) 이 주제에 관한 피에리스의 주장은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T&T Clark, 1988)에 집약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주로 Interreligious Dialogue and Theology of Religions: An Asian Paradigm (1993, 일어역 「신학 다이제스트」 81호, 1996년, 42~51쪽) 참조.
19) 1999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간된 안병무의 신학평론집 제목은 『기독교 개혁을 위한 신학』이었다. 메츠는 교회는 사회 비판 기능을 갖춰야 하며, 신학은 이를 위해 교회 비판의 사명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필자의 저서 『주체화의 신학』 170쪽 및 주29 참조). 몰트만은 민중신학을 ‘한국에서의 최초 정치신학’이라고 평가하며(전거서 312쪽), 최형묵은 이를 ‘보편적 비판 담론’으로 위치시킨다(46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본에는 아직 진정한 의미의 정치신학은 탄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일본어
安炳茂,『民衆神学を語る』(金忠一訳、かんよう出版、2016)
李仁夏、木田献一監修,『民衆の神学』(キリスト教アジア資料センター編、教文館、1984)
香山洋人,「パラダイム転換としての民衆神学」(패러다임 전환으로서의 민중 신학)『キリスト教学』四八・四九号(立教大学キリスト教学会、2006,2007)
___,「脱植民地主義神学としての民衆神学」(탈식민주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現代宗教二〇〇九』(国際宗教研究所編、秋山書店、2009)
___,「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당신은 어디에 있는가)『キリスト教学』五二号(立教大学キリスト教学会、2010)
___,「解題」『民衆神学の課題と展望』(姜元敦他、かんよう出版、2024)
___,『主体化の神学−救済論の民衆神学的再解釈』(かんよう出版、2025)
姜元敦「民衆神学の胎動と発展」(민중신학의 태동과 전개)『民衆神学の課題と展望』(姜元敦他、香山洋人訳、かんよう出版、2024)
崔亨黙,『民衆神学の概念地図』(香山洋人訳、かんよう出版、2025)
ユルゲン・モルトマン,『神学的思考の諸経験−キリスト教神学の道と形』(沖野正弘訳、新教出版社、2001)
한국어
최형묵,『민중신학개념지도』(동연, 2023)
민중신학연구소 편, 『민중신학 입문』(한울, 1995)
서대문민중신학교 역사편찬위원회 편,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동연, 2020), 개정증보판.
2025年 11月 19日(水) 18時より/ 京都 日本基督教団 洛南教会
2025年 11月 20日(木) 15:00–17:00 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

민중신학이란 무엇인가 - 한일간 신학적 대화를 향하여
民衆神学とは何か - 日韓の神学的対話に向けて
崔亨黙(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한국 민중신학의 고유성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 고유의 역사적 맥락 가운데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어로 표현할 때조차 ‘민중’을 달리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Minjung)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고유한 맥락과 그에 따른 고유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다. 자생적 근대화의 길을 차단당한 채 일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이로부터 벗어나자 곧 남북으로 분단되어 처참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을 뿐 아니라 이후 오랫동안 독재체제를 겪는 가운데 이에 맞선 민중의 저항은 확실히 한국 현대사의 고유한 특수성을 보여주었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찰로서 민중신학의 고유성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민중신학 형성의 배경으로서 국제적 연대와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
그러나 민중신학을 형성한 실질적 계기가 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은 광범위한 국제적 연대를 중요한 한 배경으로 하였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통하여 독재체제를 강화하자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맞서 저항하였고 더불어 고난을 겪었다. 특별히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서울 남산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에서 권력의 부당성을 알린 전단을 돌린 사건)으로 박형규(朴炯圭)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구속되자 그리스도인들은 비상한 마음으로 움직였다. 먼저 해외에 흩어진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결속하여 그 네트워크로서 ‘기독자민주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이어 여러 해외 교회들에 연대를 요청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를 비롯하여 여러 해외 교회들이 그 연대의 대열에 동참하여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였다.
그 연대의 중심에 일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연대는, 일제의 한국 식민화, 그리고 이어진 분단과 전쟁, 정치적 권위주의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다. 그 점에서 그 연대는 일방적이기보다는 상호협력과 재귀적(再歸的)인 자기 성찰의 성격을 띠었다. 즉 일본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를 조직하여 연대하였다. 또한 일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국제적 연대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 요인도 있었다. 당시 엄혹한 정치적 상황으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해외 인사들의 한국 출입마저 자유롭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국 직항로가 없어 해외에서 한국을 향할 때 대부분 도쿄(東京)를 경유해야 했다. 일본 기독교회관에 ‘기독자민주동지회’의 ‘도쿄자료센터’가 만들어지고 한국 민주화운동에 관한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이 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1973년 5월부터 1988년 3월까지 16년 동안 『世界』 지에 TK生의 이름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 게재된 것도 그런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민중신학의 탄생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일로,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또한 그러한 배경에서 작성되었다. 그 선언은 민중신학의 맹아를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민중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선언이 작성된 곳은 도쿄였다. 물론 그 선언은 한국인에 의해 작성되었다. NCCK 관계자 등과의 교감 가운데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한국인들에 의해 선언이 작성되었다. 그 선언이 세계 교회에 파장을 일으켜 연대를 촉발하게 한 것은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몫이었다. 이번에는 주로 교토(京都) 중심의 간사이 지역 그리스도인들이 그 선언 1주년에 즈음하여 1974년 5월 5일 미국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지에 미국 그리스도인에 대한 호소와 더불어 그 선언의 영문 번역본을 전면 광고로 내보냈다.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민중신학자들이 자주 강조하는 것처럼 민중신학은 1970년대 민중의 발견으로부터 촉발된 것이지만, 그것이 뚜렷한 하나의 신학적 경향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여러 배경이 있고 그 가운데 일본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한 국제적 연대 또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민중신학자들은 그 국제적 연대 가운데서 용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세계 교회와 교감할 수 있는 신학적 언어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최초의 민중신학 담론으로 평가받는 1975년 안병무와 서남동의 두 편의 글이 발표된 이래 1979년 그 신학적 경향을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이라 이름하게 된 것도 그 국제적 네트워크의 하나인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신학협의회에서였다. 물론 1970년대 이래 한일간 신학자들의 대화도 활발히 이어졌고, 그 과정은 그 자체로 민중신학을 형성해가는 일련의 과정이 되었다. 바로 그 점에서 민중신학은 국제적 연대를 통한 소통과 교감의 결과이기도 했다.
지속되는 한일 그리스도인들의 협력과 신학적 대화
한일 그리스도인들의 협력과 신학적 대화는 1970~1980년대 활발했던 것에 비하면 아쉽게도 오늘날 그다지 활발하지 못하다. 상호협력과 대화의 긴박함과 절실함이 사라진 탓일까? 아니면 여러 가지 차원에서 민간교류가 활발히 이뤄진 탓에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약화된 것일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일간에는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면들이 많고,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1970~1980년대 깊은 유대의 경험을 지니고 있는 만큼 그 경험을 되살린 상호협력과 대화는 여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서로 대화하고 배우는 과정은 자신의 세계를 더 넓히고 풍요롭게 한다. 이미 상호협력과 대화의 경험을 지닌 한일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협력과 대화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은 서로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 협력과 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가야마 히로또(香山洋人) 선생과 칸요우출판사 마츠야마 켄(松山献) 사장께 깊이 감사드린다. 가야마 히로또 선생은 한국 민중신학에 정통한 학자로서, 세대를 달리하는 가운데 지속되고 있는 한국 민중신학의 동향을 깊이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주요 신학적 저작을 꾸준히 번역하는 가운데 한일간 신학적 대화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이번에 이 책의 번역을 맡아주시어 저자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칸요우출판사는 「그리스도교문화」를 통해 한국의 신학적 논의를 꾸준히 소개할 뿐 아니라 여러 장르에 걸쳐 한국의 저작들을 일본에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주고 있다. 특별히 일본어판 안병무(安炳茂)저작선집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일에도 매진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을 맡아주신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함과 아울러 거듭 감사드린다. 이 일에는 번역자 김충일(金忠一)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협력해 주셨다. 협력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1980년 광주항쟁 직후 신군부의 독재정권하에서 『世界』지를 통해 세계를 접할 수 있었던 기억을 지닌 필자에게 한국어 저작이 일본어로 소개되는 일은 특별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기왕에 공저를 비롯해 몇 권의 책이 번역 출간되었으나 일본어판 서문을 쓰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그 소회를 밝힌다. 나의 책이 한일간 신학적 대화를 위한 하나의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긴다. 더불어 20여 년에 걸쳐 한일 교회간 교류에 깊이 관여하는 가운데 도움을 받은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먼저 한일간 가교에 애쓰며 여러모로 궂은일을 맡아주고 일본에서 수시로 나의 입을 대신해 주는 이상경(李相勁) 목사를 비롯한 여러 재일 한국인 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린다. 더불어 지난 27년간 한국 교회와 협력을 지속해 온 교토교구 동역자 여러분들, NCC와 URM 등의 네트웍을 통해 한일간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협력해 온 일본의 여러 동지들께 감사드린다. 책의 서문에 많은 분들의 이름을 명기하였지만,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 분들은 그렇게 한정되지 않는다. 이름이 빠졌다 하더라도 그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은 것은 아니다. 이 자리를 빌어 양해를 구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시 만난 세계,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
한국 민중신학은 비상계엄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다. 박정희의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비상계엄은 민중신학의 탄생과 관련하여 중대한 계기였다. 1980년 신군부의 쿠데타와 비상계엄 이후 상황은 2세대 민중신학을 형성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뜻하지 않게 이 책의 일본어판 번역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비상계엄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에 대한 한국 민중의 저항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번역자 가야마 히로또 선생의 요청으로 그 사태와 관련하여 일본어판에는 한국어판에 없는 보론을 추가하였다.
한국에서 이 책을 처음 내놓은 2023년 가을은 윤석열(尹錫悅) 정부 출범 1년 남짓한 시기였다. 이 책 바로 앞 말미에 간략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몹시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시장의 법칙을 전면에 내세워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날것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심히 우려되었다. 더불어 검찰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과정 자체를 무시해 버리고 권위주의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 우려되었다. 그렇게 공(公)적인 것이 소멸되는 상황 가운데서 민중신학의 의의를 새삼 확인하였다.
그로부터 또 1년 남짓 지나고 그 우려했던 상황은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다. 2024년 12월 3일 밤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명백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반한 계엄령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바로 그날 밤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결의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시민의 저항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민주주의를 정상화하게 되었다.
2024년에서 2025년으로 이어지는 겨울에 일어난 저항운동은 매우 특기할 만한 양상을 띠었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어우러진 가운데 정치적 직접 행동에서 사회적 직접 행동으로 이어지는 양상이 그 단적인 특성이다.
과거 끔찍했던 계엄의 기억 탓에 또다시 야만의 시대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참여한 구세대들에서부터,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조건으로 여겨졌던 민주주의가 순식간에 파탄 나 저마다의 일상적 삶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참여한 신세대들에 이르기까지 그 세대의 폭이 넓었다. 계급과 계층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구성을 이루었다. 노동자와 농민, 지식인과 종교인, 또는 특정 시민단체 회원들로 구성된 그간 시위 행렬의 전형성과는 달랐다. 평소 살기에 바쁜 여러 생활인들이 함께하였다. 그 가운데 특별히 2030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것만이 두드러진 특성은 아니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다양한 소수자들의 참여다. 이른바 시민권을 갖지 못한 다양한 소수자들이 어우러졌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깃발들에는 그 다양한 주체와 요구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른 국적의 거주민과 이주민들이 함께하고 팔레스타인인들도 함께하였다. 장애인들이 위화감 없이 동참하고, 성소수자들도 참여하여 당당하게 단상에서 발언을 맡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들이었다. 언제나 시위 현장은 모두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부당한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정치적 직접 행동이 타자들과의 연대를 지향하는 사회적 직접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사연은 바로 그 시위 현장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이라고 해야 할까? 줄곧 그 저항의 주체가 ‘시민’으로 호명되고 있지만, 실상은 ‘민중’적 전형에 가까웠다.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서 시민은 통치의 근본이 되는 주권자로서 민(民)을 의미하기에, 그 뜻을 거스른 통치행위를 바로잡고자 하는 주권자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비상계엄 이후 저항의 국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저항의 주체는 전형적인 시민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아예 정치적 시민권이 없거나 정치적 시민권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시민으로서보다는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이 함께하였다. 그 비율이 얼마만큼 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저항의 대열이 이들에게도 열려 있었고 함께 주체를 형성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보여 왔던 전형적인 민중적 현상에 해당한다. 한국 민중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 주체로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결합하면서 정치적 권리 요구에 더하여 생존권의 요구가 결합하는 양상을 보여 온 점이다. 민중은 “생활가치를 생산하고 세계를 변혁시키며 역사를 추진해 온 실질적 주체이면서도 지배권력으로부터 소외·억압되어 천민·죄인으로 전락했”지만 “역사의 발전에 따라서 자기의 외화물인 권력을 원자리로 되돌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회복을 주체적으로서 이끌어서 그로써 구원을 성취”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徐南同) 선생의 통찰은 바로 그 민중의 운동을 직시한 결과이다. 민중신학을 형성하는 데 실천적 기반을 다진 박형규(朴炯圭) 목사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이웃사랑도 할 수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안병무(安炳茂) 선생 또한 그 인식을 공유하였다. 이는 민중의 생존권적 요구와 정치적 권리의 요구가 결합할 수밖에 없는 한국 민중운동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민중운동의 현장 가운데서 민중신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서 그 몫을 다하고자 한다.
모쪼록 이 작은 책이 한일간 신학적 대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겠다.*
*** 2025년 11월 20일 코베학생센터에서 함께 발표한 가야마 히로또 선생의 글을 첨부합니다. ***
『民衆神学の概念地図』刊行記念イベント
民衆神学とは何か−日韓の神学的対話に向けて
2025年11月20日(金)15:00〜17:00、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

일본사회와 민중신학
香山洋人
1. 『민중신학 개념지도』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올해 민중신학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75년에 발표된 서남동과 안병무의 논문이 민중신학의 일성이었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1) 최형묵의 『민중신학 개념지도』는 50년 민중신학의 흐름 속에서 처음 등장한 가이드북이다. 사실 『민중신학입문』이란 이름의 서적은 1995년에 출간됐다. 이는 임태수를 중심으로 한 민중신학연구소의 논문집으로 10명의 저자가 각기 논고를 실었다.2) 이들 논고는 각기 중요한 의미가 있어 나 자신은 많은 것을 배웠지만(특히 권진관, 김명수), 한 권의 저작으로서 ‘입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고, 그 내용으로 보면 아마도 ‘이것이 새로운 민중신학이다’라는 서명이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존의 민중신학에 대한 강한 비판을 바탕으로 기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판은 임태수의 서문에서 밝혀지고는 있지만 수렴된 글이 모두 같은 자세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도 일관성이 결여된 저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1995년 『민중신학입문』은 전혀 입문서가 아니었다.
최형묵의 저작을 굳이 가이드북이라고 부른 것은, 이것이 이른바 입문서가 아니라 개념지도라는 독특한 착상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가이드북에 지도는 붙기 마련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진호가 쓴 서평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 문화』 25호(2025.6.)에 게재되어 있는데, 민중신학 전체를 부감하는 시각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도이며, 가이드북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때 ‘개론’이나 ‘총론’과 같은 저작을, 그 분야의 제일인자로 지목되는 학자가 자신의 연구 인생을 총정리하는 형태로 집필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작품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학문 자체가 더 이상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흔들림 없는 체계로 간주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해방 신학’ 등장 이후 활발해진 문맥화된 문제제기, 즉 특정 상황에 근거한 신학에 대해 ‘속격의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야유적인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해방의, 여성의, 민중의, 아시아의’와 같은 조건 설정은, 저자/발언자가 어디에 서서 말하고 있는가를 명시하는 대전제를 담고 있다. 이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하느님이 던진 물음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와 통하는 질문이다.3) 자기 자신의 포지셔너리티를 명시하지 않는 학문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인문학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다.
신학의 경우 입장성, 포지셔너리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자/발언자가 어떤 신앙공동체에 속해 있는가이며, 그것은 ‘신앙고백’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적인 신앙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앙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되어 있으며, 신학적 발언의 토대이자 그 배경이 되는 ‘삶의 자리’의 문제다. 강원돈은 민중신학에 있어서 신학자 자신이 신학의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4) 그런 의미에서 최형묵은 대학 연구실을 본거지로 하는 학자가 아니라 교회의 목회자이며, 에큐메니컬 운동의 리더이자 교회개혁 운동의 당사자이며, 사회의 민주화와 평등 실현을 위해 헌신해 온 활동가이기도 하다. 물론 대학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교회와 사회의 교차점에 축을 두고 사유하는 연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자의 민중신학 가이드북이 바로 『민중신학 개념지도』다. 따라서 이 책은 특정한 입장에서 쓰인 저작이다. 더구나 ‘한국신학연구소’ 출범 이후 ‘민중신학회’의 창립을 향해 나아가던 시기, 즉 안병무를 중심으로 한 신학자들이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지배에 맞서 신학을 통해 응전하고자 했던 그 시대에 신학생으로서 직접 그 움직임에 참여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중신학의 의미를 새롭게 밝히고자 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맺음말에 갈음하여’에서 최형묵은 자신의 신학적 편력을 되새기고 있지만 사실 이 책 전체가 저자 자신의 신학적 여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의 삶을 결정지은 민중신학과의 만남 속에서, 그는 안병무와 서남동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 핵심 개념들을 풀어내며 그것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성찰하고 있다.
‘한 손에 쥐고 보는’라고 저자가 의도한 대로 이 책의 분량은 많지 않다 (원저 215쪽, 일어역 171쪽).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강원돈의 『기독교경제윤리론』이 말 그대로 한 손으로 들 수 없는 대저(12231쪽)인 데 비해, 『민중신학 개념지도』는 부담 없이 한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가볍다고 할 수 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최형묵은 서남동이나 안병무가 제시한 다방면의 문제설정 속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경청해야 할 핵심 개념들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보다 큰 맥락 속에서 재조명하며, 오늘의 시대 상황 속에서 새롭게 해석한다. 나아가 이러한 개념들을 계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학에 대해서도 고찰하는 고도로 창조적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어려운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 해설본이 아니다.
이번 일본어판에 즈음해, 보론 「12・3 비상 계엄, 그것에 맞서는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을 새로이 덧붙인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민중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해설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민중신학은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생생한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2. 일본・사회와 신학
이번 출판기념행사에 즈음해 제시된 주제는 ‘일본사회와 민중신학’이다. 주최자가 요구한 것은 여기서 제시된 민중신학의 중요 개념들을 일본의 상황 속에서 풀어내 보라는 작업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그럴 역량은 없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이번에 주어진 주제를 두고 내가 느낀 바를 자기 비판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민중신학은 1970년대의 한국, 즉 군사독재정권과 그에 맞서는 민중운동, 민주화운동이라는 현실에 입각해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 사회에서 그러한 민중신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일본에서 신학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5) 그리스도교가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가지며 신자 수가 많은 한국과 그렇지 않은 일본의 차이라는 대전제도 있긴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차이가 아니다. 교회 그리고 신학 쪽에 ‘일본 사회’라는 말/개념이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아 왔는가 하는 문제다. 내가 아는 한, 조선 그리스도교사에서 ‘사회’ 혹은 ‘민족’은 항상 중요한 주제였다. ‘신앙으로 나라를 구하다’, ‘예수 그리스도, 민족의 희망’ 같은 일본에서 보면 거창한 표현들은 결코 드물지 않았다. 반면 일본의 경우 교회와 그 신학이 자신들의 책임 범위 속에 ‘일본 사회’를 인식해 왔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목회자들은 모여 있는 신자와 그 가족, 보육원이나 유치원 관계자, 그리고 인근 주민들, 기껏해야 패리시(parish, 사목구)의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나 지역 속에서 교회가 미움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주요 관심사이며, 적어도 일정한 존재감을 발휘하고자 지역 공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한다.
존속 자체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교회의 현실과, 그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듯한 교조화된 신학이 있다. 그리스도 고백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과제와 그것 없이도 가능한 과제(이른바 사회문제)를 구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는 신학자에게 있어서는, 종교 전통이나 문화적 테마로서의 ‘일본’에는 관심이 있어도, ‘일본 사회’라는 문제 설정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서 ‘일본사회와 민중신학’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우선 일본에 있어서 사회와 신학이 단절되어 있는 현실이 문제가 된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각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믿으며, 선교와 목회의 과제를 지니고, 또한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자각이 일본의 교회 전체 속에서 서서히 쇠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적어도 1995년, 전후 50년을 계기로 교회가 역사 앞에서 스스로를 검증하고자 했던 그 시절을 정점으로, 일본 교회 안에서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언급이 점차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3. 현장과 괴리된 신학
일본의 신학은 서구신학을 소개하는 데 열심이었고, 그 자세는 구미포수라는 평을 받아 왔다. 그러나 민중신학을 비롯한 해방신학 계열의 여러 신학들도 결국 수입신학에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자신의 현장을 ‘일본’으로 파악하고 사회적 책임을 주제로 한 일본의 독자적인 신학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예를 들면 이인하의 『기류의 백성의 외침(寄留の民の叫び)』(신교출판사, 1997), 구리바야시 데루오 『형관의 신학(荊冠の神学)』(신교출판사, 1991)일 것이다.6) 핵무기, 미군기지, 공해, 미일안보, 평화헌법, 야스쿠니신사국가수호, 부락차별, 외국인등록법, 전후보상, 성차별, 장애인차별, 원죄(冤罪), 노숙노동자, 그리고 한국 및 필리핀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지역과의 국제연대 등 다양한 과제에 대처하는 현장에는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관련되어 왔다. 이러한 활동에는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교구나 교단 전체, 그리고 에큐메니컬 단체들이 공적인 연대활동을 전개해 온 역사가 있다. 일본에서 그리스도인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시민운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 그리스도인들의 각종 운동은 다양한 ‘시사적 신학’, ‘신학적 문제제기’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신학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물론 70~90년대의 『복음과 세계』에는 사회적 책임을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논고들이 실렸지만, 그것들은 그리스도교 전체에 도전하는 한 덩어리의 신학적 언설(일관된 신학적 담론)로서 발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찍이 위르겐 몰트만은 신약성경에서의 석의학적 발견이 새로운 교회운동이나 새로운 신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면서, 그 몇 안 되는 사례로 루터의 로마서 석의가 종교개혁을 야기한 것이고, 또 다른 사례로 안병무에 의한 예수와 가난한 백성 사이의 전혀 밀접한 상호관계의 발견을 들었다.7) 성서학 분야에서 일본 신학은 뛰어난 업적이 많다. 그 중에서도 안병무의 「석의적 발견」에 영향을 준 다가와 겐조의 마르코 연구와, 그 후의 연구의 집대성한 신약성서 개인역은 기념비적 위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것이 ‘새로운 교회 개혁이나 새로운 신학’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또 다른 위업으로 평가되는 혼다 테츠로의 신약성서 개인역 역시, 비록 민중 현장과의 연대가 만들어 낸 석의학적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현재로서는 그로부터 ‘새로운 교회 개혁이나 새로운 신학’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야마우라 하루쭈구의 개생어역 신약성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 성경 읽기에 영향을 받은 목회자나 설교자가 있고, 공감하는 독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인 이외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 교회 운동’의 맹아가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그것이 ‘새 신학’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다.
교단립의 보수적 신학대학, 신학부, 신학교가 ‘서구포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큐메니컬 계열 신학부와 신학교도 수입된 해방신학을 배우는데 치중했을 뿐, 자신들의 현장과 삶의 자리를 증언하는 신학을 구축하는 데에는 결코 열심이 아니었다. 이는 신학과 현장 상황 간의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억압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경시되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실천을 위한 지혜이자, 스스로를 고무하고 묻고 새로운 활력원이 될 무언가였다. 그것은 사회과학적뿐 아니라 운동의 장이 갖는 문화, 인간과의 만남이었고, 혹은 개인적 체험이나 신앙이었다면 증언으로서의 신학이 거기서 싹틀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런 현장에는 신학화하려는 욕구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운동에서 ‘신학’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현장은 ‘신학’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8)
신학 측도현장과의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반복음적 현실에 눈을 돌려 연대하는 신학자들이 일본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은 세계의 해방신학들을 소개하며 일본 현실과의 관계성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그로부터 새로운 신학이 창출되지는 않았다. 과거 안병무는 한국에서 신학하는 것의 행복은 ‘현장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9) 민중신학은 현장의 물음과 민중의 고통으로부터 성서을 다시 읽어 신학적으로 응답하고자 했지만, 일본 신학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과는 다른 현장이 제기한 물음을 수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최형묵은 민중신학을, ‘민중사건을 목격하고 나아가 스스로도 민중경험을 하게 된 일단의 신학자들’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10) 그렇다면 일본 신학자 자신의 민중 경험이란 무엇일까. 설령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그것을 신학화할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자들의 활동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들의 가장 큰 공헌은 번역이며,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른다면 ‘구미 포수’와 같은 구조에 머무르는 것일 뿐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자들도 과거에는 서구 신학을 배우고 그것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대학 소속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방향을 전환하여 민중신학 창출로 나아갔다. 그런 ‘사건’이 없으면, 자신의 전문적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신학을 창출하는 것은 쉽지 않다.
4. 일본에 민중신학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서구 신학의 모방이 아닌 일본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개신교 초기부터 있었고, 그로부터 ‘일본의 신학’이 형성될 가능성은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와 신학은 그러한 흐름을 계승하지 못했다. 그 원인을 ‘내면화된 식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 교회에는 여러 측면에서 ‘아시아 신학’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민중신학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있을 터인데, 그 수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즉, 민중신학의 독자는 있어도 민중신학자는 없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는 민중신학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는 그에 비견되는 독자적인 신학이 형성되지 않았는가.
서광선은 민중신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신학자는 물론 그리스도인 학생, 노동자, 신문기자, 대학교수, 농민, 저작가, 지식인의 정치적 체험에 대한 신학적 반성의 집적과 표현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신학이요, 억압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학적인 응답이요, 게다가 한국의 교회와 그 선교에 대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응답이다. 민중의 신학은 지하 고문실에서 법정에서 군법회의에 직면해 검찰관의 소추를 듣고, 또 스스로 최후변론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숙고해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창조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참여에 대해 감방 안에서, 옥중에서 가족과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전 세계 친구들이 보낸 책을 읽으며, 실업 중에, 가택연금 속에서 그들의 활동을 온종일 감시받는 가운데, 또 친구를 방문하는 가운데 숙고했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전기이다. 그것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고 행동하며 기도하고 성찬에 베풀었던 여정이다.”(「한국의 민중과 신학-아시아 신학협의회에 대한 전기적 보고」, 17쪽).11)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군사독재정권하의 모순과 그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운동이자 신학이지만,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던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등의 에큐메니컬한 네트워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일본에는 그런 ‘고난의 현장’이 없었던 것일까. 물론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같은 상황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단순히 그 차이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에는 있고 일본에는 없었던 요소는, 고난의 현장에서 우러나온 신학적 에너지를 신학화하는 의지와 장(場)이라 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이다. ‘서대문민중신학교’로도 불리는 이곳은, 한국신학대학 신학대학원이 폐쇄된 뒤 교단이 세운 신학교로, 민주화운동으로 탄압받은 학생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을 민중신학으로 현장에 내보냈다. 여기서 민중교회 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이 많이 나왔지만 민중교회와 민중신학 사이에는 점차 거리가 생겨나 현장에서 민중신학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앞서 언급한 『민중신학입문』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이 현장과 직접 연결되는 실천성을 띠는 데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 한편 안병무가 독일 개신교회의 원조를 받아 1973년 설립한 곳이 ‘한국신학연구소’다. 이곳은 연구자들의 모이는 공간이자, 신학잡지 『신학사상』을 발행하고 신학서적 출판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권진관은 ‘민중신학의 산실은 고난의 길이었고, 키운 것은 한국신학연구소와 기독교장로회 선교교육원’이라고 말했다.12) 그러나 실제로는 민중신학의 기반을 만들고 성장시킨 주된 역할을 ‘한국신학연구소’가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두 거장 안병무와 서남동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에 공명하고 영향을 받아 각자의 자리에서 독자적인 전개를 시도한 이들에 의해 발전해 온 신학운동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강원돈에 따르면 민중신학이란 ‘민중에 신학의 초점을 두고 역사 앞에서 민중과 함께 신학하는’ 것이며,13) 이 신학은 ‘민중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 현실을 타파하는 실천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14) 이 이해는 곧 안병무와 서남동의 신학이 바로 그러한 신학이며 그런 기능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에 공명하는 신학자들이 전개하는 신학운동은 안병무나 서남동을 인용하거나 반복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 있어 민중에 초점을 맞춘 실천적 이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 등장의 배경에는 억압적인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었지만, 학술세계에서의 탈식민지주적 움직임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요인 중 하나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안창호와 유영모, 그리고 해방 후 민주화 투쟁에도 깊이 관여한 함석헌 등의 신학은 ‘토착화 신학’으로 불리는데, 그것은 반(反)구미 신학이자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원동력으로 하고 있었다. 그것을 문화신학적으로 계승한 것이 유동식과 윤성범이라면, 민중신학은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이고 탈식민지주의적 방향으로 전개된 신학이라 할 수 있다.15) 일본에 있어서 독자적인 신학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는 우치무라 간조의 이름을 들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제국시기의 국가주으적인 ‘일본의 신학’ 시대를 거침으로써 이 흐름은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식민주의를 내면화한 일본과 그에 대한 저항을 지속적으로 계승해 온 한국이라는 역사적 현실의 차이가 이후의 신학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신학에 있어서 ‘역사’란 주로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는데 민중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와 연결되는 ‘역사적 지평’ 속에서의 해석과 증언이다.16)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성과 체험성을 내포한다. 즉, 실재했던 역사적 예수(과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 자신이 경험하는 추상화되지 않은 민중의 현실(현재) 속에서 나사렛 예수가 철저히 사건의 지평에서 합류한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지평이라는 감각은 객관성을 내세우며 안전한 의치에서 관찰자로서 신학을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5. 끝으로: 일본에 있어서의 현장이란
‘현장’이라는 개념의 모호성 혹은 위험성은 중요하다. 교회의 사목자는 이른바 거리의 교회를 현장이라고 부르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병설되어 있으면 그곳이 현장이 된다. ‘현장’은 발언자 자신의 ‘삶의 자리’를 가리키며, 그것을 굳이 비판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종종 자기중심성과 배타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동시에 지닌다는 점이다. 기지 반대 투쟁이나 노숙자 지원을 ‘현장’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도시지역 교회나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여기가 우리의 현장이다’라고 해도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현장, 필드’를 둘러싼 논의나 연구는 많고, 신학에서도 이미 오래된 주제임을 알고 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 속에서 놓쳐버린 것 같아 다시 언급하고 싶은 개념이 있다. 그것은 일찍이 피에르리스가 말한 ‘인간적 기초 공동체’(Basic Human Communities, BHC)이다.18) 이는 해방신학이 중시했던 ‘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Basic Christian Communities, BCC)를 염두에 두고 제시된 것으로, 성서나 교회의 전통을 재해석하기에 적합한 장(場)을 의미한다. 본고의 맥락에서 본다면, 민중의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이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면, 이 논의는 한없이 확장되어 수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론가이든 활동가이든, 혹은 그 말에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사회적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인간이 고통받는 현실(장場)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부조리함을 느끼고 분노하는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또한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공감과 공고(共苦)의 경험을 자기 내면에서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미 이 사회의 문제성을 고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괴로움과 부조리에 직면한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야말로 곧바로 ‘현장’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곳에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고, 그 괴로움을 낳는 구조적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그 현실 속으로 돌진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자신의 장소는 ‘현장’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단순히 서 있는 자리가 현장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밑을 파고들 때 장소는 ‘현장’이 된다. 만약 그 파고듦이 오로지 자기 내면으로만 향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실존주의가 되겠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적 구조적 모순, 그리고 권력구조라는 요소다. 문제는 개인의 내면 혹은 생활권 안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 때문에 70년대에 한국의 신학자나 그리스도인은 사건의 현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신학자들을 현장으로 이끌었다. 사건에 참여함에 따라 장은 현장이 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있다. ‘세상에는 진정한 현장, 유일무이한 현장이 있다’는 식의 위험한 발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해방운동이 가부장주의에 지배되는 듯한 기만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공감’이라는 연대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만 타파하면 민중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단일한 ‘제악의 근원’을 찾아서는 안 된다. 계산이 아니라 말려들어가듯 사람은 스스로의 현장에 선다. 민중신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다시 읽고, 그때까지의 신학에 재검토하고, 그 성찰을 한 덩어리의 신학적 언설(일관된 신학적 담론)로 삼은 것이 민중신학이다. 그러나 왜 그것이 ‘신학’이어야 했을까. 그것은 민중신학을 발신한 이들이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교 속에 희망을 찾았으며, 신학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그들은 신학에 의한 교회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19)
안병무는 한국의 신학에는 현장이 있고 일본의 신학에는 그것이 없다고 했는데, 오해가 없도록 캐물으면 일본 사회에 현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신학이 현장으로부터 괴리돼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많은 신학자들에게 신학적 ‘삶의 자리’는 탈역사적이고 비사회적인 공간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들이 던진 물음은, 역사의 한가운데서 솟아오른 절박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내면적 과제로만 받아들여져 온 것은 아닐까. 역사의 와중에서 빚어지는 사건들에 직접 맞서거나, 사회적 구조적 모순 때문에 고통에 허덕이는 인간의 현실속으로 휘말려 치달게 하고, 즉 ‘속절없는’ 상황 속에서 현장과 호응하면서 신학을 다루는 듯한 경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은 사실 나 자신을 향한 성찰이기도 하다. 성실한 신학자 제현을 끌어들여 비판하는 듯한 태도는 삼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민중신학과 일본의 신학상황과의 비교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의 솔직한 생각임에 틀림없다.
【후주】
1) 1975년, 서남동의 「예수·교회사·한국교회」(『기독교사상』 2월호),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같은 해 4월호), 안병무의 「민족·민중·교회」(같은 4월호)가 공개되었다. 참고로, 안병무는 1972년 『역사와 증언』에서 이미 민중을 주제로 다루었다고 하며, 서남동 또한 1974년 강연 「예수와 민중」을 자신의 민중신학 출발점으로 언급하고 있다. 서남동의 두 논문은 『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되어 일어 번역도 존재하지만, 안병무의 「민족·민중·교회」는 일어 번역이 없다.
2) 일본 독자들을 위해 차례를 소개하는 내용이라 한국역에서는 생략한다.
3) 필자의 글 「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참조.
4) 필자의 글 「解題」263쪽.(이하, 주의 페이지수는 일어, 일어역판의 페이지수이다.)
5) 내가 생각하는 ‘일본’은 국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국경으로 구획된 영토나 국적, 인종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는 공유 가능한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지역, 그리고 그 공용언어(일본어)를 매개로 한 것이다. 기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국명’을 접두사로 한 표현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편리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국가나 국적, 민족·인종을 전제로 하는 사고방식에 빠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주석 없이 사용되는 ‘일본의〜,한국의〜, 유럽/미국의〜’ 등의 표현은 단지 편의적인 것이며, ‘일본어로 쓰인 저작’ 또는 ‘지역으로서의 일본을 기반으로 한 저작’을 간략화한 표현에 불과하다.
6) 물론 일본에서도 자신들의 상황과 대면하는 창조적 신학적 시도는 존재한다. 미완이지만, 카네코 케이이치의 「지금, 여기의 신학」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필자의 글 「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 참조). 최근에는 페미니스트 신학과 퀴어 신학이 활발하다. 그러나 민중신학과 비교할 때, 이는 그리스도교 전체를 향한 포괄적 신학 담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존 교리와 제도를 비판하며 새로운 제안을 제시하고, 더 나아가 교회를 넘어서는 운동과의 연계를 고려한다면, 「거류민의 신학」과 「가시관의 신학」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각 학자의 비판을 기다리고자 한다.
7) 몰트만 『神学的思考の諸経験』 310쪽 참조.
8) 일용직 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던 한 기독교 활동가가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을 읽고 ‘이런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잘라버렸던 일화를 떠올린다.
9) 安炳茂『民衆神学を語る』 60쪽.
10) 崔亨黙『民衆神学の概念地図』 22쪽 참조.
11) 이는 1997년 아시아신학협의회를 거쳐 출판된 영어 Minjung Theology: People as the Subjects of History/ edited by the Commission on Theological Concerns of th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CTC-CCA)의 Orbis판(1983)을 위해 쓰인 글(영어)이 원문이며 한국어판을 찾아볼 수 없다. 서광선의 이 글은 민중신학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한 귀중한 것이며, 영문판에서 나온 일어역 기독교아시아자료센터편 『民衆の神学』에 수록되어 있어 다행이다. 그 중요성에 비추어 (일부 말을 수정해) 장문을 굳이 인용했다.
12)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 487쪽 참조. 서대문민중신학교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글 「解題」 294~296쪽 참조.
13) 姜元敦「民衆神学の胎動と発展」9쪽.
14) 같은 책, 57쪽.
15) 박경미는 민중신학의 배경에 일본 식민통치 하의 독립운동 전통과 민중사상 전통이 있다고 지적한다(필자의 글 「解題」 266쪽). 또한 변선환은 정치신학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종교다원주의적 해방신학」을 제안한다. 민중신학의 탈식민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パラダイム転換としての民衆神学」 및 「脱植民地主義神学としての民衆神学」 참조.
16) 최형묵, 29~30쪽.
17) 신학자로서 ‘장’과 ‘현장’의 차이에 주목한 이는 카네코 케이이치였다. 필자의 글 「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 참조.
18) 이 주제에 관한 피에리스의 주장은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T&T Clark, 1988)에 집약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주로 Interreligious Dialogue and Theology of Religions: An Asian Paradigm (1993, 일어역 「신학 다이제스트」 81호, 1996년, 42~51쪽) 참조.
19) 1999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간된 안병무의 신학평론집 제목은 『기독교 개혁을 위한 신학』이었다. 메츠는 교회는 사회 비판 기능을 갖춰야 하며, 신학은 이를 위해 교회 비판의 사명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필자의 저서 『주체화의 신학』 170쪽 및 주29 참조). 몰트만은 민중신학을 ‘한국에서의 최초 정치신학’이라고 평가하며(전거서 312쪽), 최형묵은 이를 ‘보편적 비판 담론’으로 위치시킨다(46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본에는 아직 진정한 의미의 정치신학은 탄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일본어
安炳茂,『民衆神学を語る』(金忠一訳、かんよう出版、2016)
李仁夏、木田献一監修,『民衆の神学』(キリスト教アジア資料センター編、教文館、1984)
香山洋人,「パラダイム転換としての民衆神学」(패러다임 전환으로서의 민중 신학)『キリスト教学』四八・四九号(立教大学キリスト教学会、2006,2007)
___,「脱植民地主義神学としての民衆神学」(탈식민주의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現代宗教二〇〇九』(国際宗教研究所編、秋山書店、2009)
___,「あなたはどこにいるのか」(당신은 어디에 있는가)『キリスト教学』五二号(立教大学キリスト教学会、2010)
___,「解題」『民衆神学の課題と展望』(姜元敦他、かんよう出版、2024)
___,『主体化の神学−救済論の民衆神学的再解釈』(かんよう出版、2025)
姜元敦「民衆神学の胎動と発展」(민중신학의 태동과 전개)『民衆神学の課題と展望』(姜元敦他、香山洋人訳、かんよう出版、2024)
崔亨黙,『民衆神学の概念地図』(香山洋人訳、かんよう出版、2025)
ユルゲン・モルトマン,『神学的思考の諸経験−キリスト教神学の道と形』(沖野正弘訳、新教出版社、2001)
한국어
최형묵,『민중신학개념지도』(동연, 2023)
민중신학연구소 편, 『민중신학 입문』(한울, 1995)
서대문민중신학교 역사편찬위원회 편, 『서대문민중신학교의 증언』(동연, 2020), 개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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