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무지’도 문제지만, ‘무지에의 욕망’이 더 문제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8-27 20:32
조회
49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2026년 제4차 에큐포럼
‘무지의 충돌’을 넘어 -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평화로운 공존을 향하여
2026년 8월 27일(목) 오후 3~5시



‘무지’도 문제지만, ‘무지에의 욕망’이 더 문제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20여 년 전 9.11 테러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한 권의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칼 언스트, 『무함마드를 따라서 – 21세기에 이슬람 다시 보기』(Carl W. Ernst, Following Muhammad: Rethinking Islam in the Contemporary World)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관심이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터라 선뜻 번역 작업을 맡았다.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시에 이슬람 세계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제3시대연구소에서 몇 차례 강의를 진행하였고, 교회에서도 몇 주간 교우들과 더불어 공부할 수 있었다. 그 책 번역 후기 가운데 일부를 그대로 회고하고 싶다.

“기독교 신학을 하는 역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번역한 일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수반한다. 먼 길을 떠날 때면 항상 그 교차되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결국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떠나기 전에 가졌던 두려움의 기억은 사라지고 그 여행의 보람과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 찬다. 마치 그런 느낌이다.
통념상 기독교와 이슬람, 또는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은 전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인식 기반에서 서구 문명은 흔히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곧 성서의 예언 전통과 그리스의 철학 전통이라는 두 가지 기둥을 골간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들은 서구 문명의 배타적인 원천만은 아니다. 그 두 가지 기둥은 이슬람 문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꾸란에 나와 있듯이 무슬림들은 유대교인 및 기독교인과 함께 자신들을 ‘성서의 백성들’이라 생각한다. 무슬림들의 성서 꾸란은 히브리 성서와 기독교의 성서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신학과 윤리 사상은 그리스 철학을 커다란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서구 세계에 라틴어로 소개된 그리스 철학의 고전이 사실은 아랍어 번역본을 대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평균적인 서구인들은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중세 기독교 신학의 거장 토마스 아퀴나스가 읽은 그리스 철학의 고전들은, 그리스어에서 아랍어로 옮겨진 것을 다시 유대인들이 라틴어로 옮긴 것들이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문명간의 관계의 본질이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사무엘 헌팅톤은 문명의 충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서구 내지는 미국 중심의 위기관의 반영일 뿐이다. 역사적 진실을 바로 보자면 문명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발전하고 공존한다. 서구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간의 관계 역시 그와 같은 교류와 공존을 중요한 기축으로 하여 왔다는 것을 역사는 입증해 주고 있다. 그것이 서로 별개이고 이질적이어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 또는 한편의 우월한 문명이 열등하고 쇠락한 문명을 흡수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은 지극히 일방적인 억견일 뿐이다.
기독교 신학을 하는 입장에서 나는 신앙의 요체를 타자를 향한 개방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절대자에 대한 관심은 사실은 낯선 곳, 낯선 이들을 향한 관심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병행시키는 성서의 요체는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내가 서슴없이 이 ‘이방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악의 축’과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이 흉흉하게 떠도는 오늘 세계 현실에서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태도를 이 책은 시사해 주고 있다.”(2005.11.)

오늘 이주화 이맘께서 이슬람 신앙의 요체를 간결 명료하게 알려주시고, 더불어 특히 기독교인들의 편견과 무지를 콕 짚어 주셔서 감사드린다. 덕분에 무지의 편견을 넘어 평화의 공존을 향한 훌륭한 안내도를 갖게 되었다. 여기서 제기한 과제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확실히 무지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어떤 이의도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할 때, 그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편견을 갖게 된 것인가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보다는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편견을 강화하지는 않을까? “진리란 우리가 싫어하는 그 무엇”(마이다 슈이치)이라는 경구가 새삼 떠오른다. 사람은 알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알고 싶어하지 않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경구이다.
왜 알고 싶어하지 않을까? 어째서 진실 앞에 서는 것을 주저할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지키고 있는 신념,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상이 무너질 때 겪을 수 있는 혼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자신의 세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이른바 확증편향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자리하고 있는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편견은 이로부터 비롯되는 측면이 더 크지 않을까?

분단 체제하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 오랜 시간 동안 한국 기독교는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습성에 익숙해져 왔다. 반공주의를 신앙의 차원으로까지 내면화하여 ‘빨갱이’를 저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는 그 단적인 사례이다. 분단 이데올로기에 균열이 생기고 국제적 정세의 변화와 사회적 다원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그 적대의 대상이 바뀌고 있다. ‘중국인’을 둘러싼 음모론,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 ‘이슬람 공포’(Islamophobia)의 조장 등에 공조하며 주도하는 현상이 그 예이다.
사회적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교세의 감소까지 더해지며 내적 위기를 겪고 있는 교회가 수세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대응은 단기적으로는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서는 사회적 고립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철회는 이미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는 교세의 감소가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 신뢰의 철회라는 것이 그 본질적 요체이다.

한국 기독교가 신뢰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공성을 지향함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개방성을 지향하여야 한다. 더불어 그것이 가능한 내적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것이 곧 신앙의 요체와 부합한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이슬람 신앙을 따르는 무슬림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은 기독교 신앙을 위태롭게 하기보다는 훨씬 풍요롭게 한다.

“‘무지의 충돌’을 넘어: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평화로운 공존을 향하여” 세미나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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