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민중은 누구인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9-08 22:40
조회
27
「종교와 평화」202호(2026년 3월호)
우리 시대 민중은 누구인가?
최형묵(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 연세대 겸임교수)
‘민중(民衆)’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 말 자체로 보면 그저 ‘피지배 다수자들’ 정도의 의미를 지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동적 주체로서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민중은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발전하는 가운데 그 주체로 인식되었다. ‘민중’은, 정치·경제·사회적 모순관계 속에서 억압과 수탈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 억압과 수탈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주체로 인식된 것이다. 민중이 1970년대에 새삼 부각된 까닭은 한국적 근대화가 본격화한 시대적 맥락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로서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민중은 그 경제개발을 가능케 하는 실질적 주역이었음에도 경제개발을 위한 동원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뿐 정당한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저항이 촉발되었고, 민중은 그 저항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민중이 1970년대에 비로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통치의 객체에서 정치적 주체로서 민중의 탄생은 곧 근대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1894년 3월 동학 농민군의 격문은 궐기의 주체를 ‘민중’으로 호명하였다. 자생적 근대화의 길이 좌절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한 국면에서 일어난 1919년 3·1혁명 이후 ‘민중’에 대한 의식은 더 분명해졌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은 저항과 혁명의 주체로서 민중을 분명히 내세웠다. 1970년대 민중 인식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특정 계급 대신에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부각된 것은 한국 근대화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근대화는 부르주아적 시민계급 주도에 의한 전형적인 자본제 확립과는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자생적 근대화의 길이 차단당한 채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국제적인 자본제 질서에 편입되는 역사적 과정을 경유한 까닭에 그 유산의 영향 아래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및 그 세력 구성면에서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민중은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매우 복합적인 사회적 세력으로서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는 민중의 구성이 국면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고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시대 민중은 누구인가?’ 이 물음은 민중의 개념 자체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 1세대 민중신학의 선구들이 강조하였다시피 민중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그때그때 역사적 국면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역동적 실체이다. 민중신학은 그때그때 역동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민중을 주목하는 가운데 신학적 성찰을 발전시켜 왔다.
앞서 말했듯, 1970년대 새삼 부상한 민중은 피지배층으로서 배제당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현실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이중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1세대 민중신학은 고난의 담지자이자 동시에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이중성을 주목하였다. 사실 1세대 민중신학이 더욱 방점을 둔 것은 ‘고난’의 담지자로서 민중이었다. 사회적 부조리에서 비롯되는 고난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극복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저항하는 데서 역사의 주체로서 나서는 민중의 잠재력을 주목한 셈이었다. 이때 민중은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아우르는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소외와 배제를 겪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1세대 민중신학은 그 역동적인 민중이 일으키는 사건을 주목하고 이를 증언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민중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였다. 민중은 선언적 주체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 주체로 부상하였다. 민중은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여러 계급 계층별 부문 운동이 성장하였다. 민중운동은 산발적 양상을 벗어나 조직적 연대의 양상을 띠었다. 여기서 민중은 노동자와 농민 등 생산자층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아우러지는 사회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1987년 그 민중운동이 절정에 이르러 민주화의 전환을 불러일으켰을 때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역할은 의심의 여지 없었다. 2세대 민중신학은 민중운동에 동참하는 운동의 신학으로서 성격을 지향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1990년대 이후 자본의 지구화가 본격화할 즈음 민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다.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이 부상하였고 이전의 역동적 민중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민중의 일식(日蝕)이라고 할까?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해 배제된 민중은 이제 사회적 시민권조차 사실상 부정당할 만큼 주변화하는 듯했다. 이제 그 이름은 집단적 주체로서 민중으로서보다는 다양한 소수자들로 불렸다. 여전히 인구학적으로 다수를 이루고 있는 노동자는 물론 촘촘히 위계화되어 있는 사회질서 안에서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소수자’로 범주화되었다. 그 상황에 직면하여 3세대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통’을 주목하였다. 민중의 ‘고난’이 주체화의 전제조건으로 이해되었다면 민중의 ‘고통’은 그 가능성마저 부정당한 절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민중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2024년 12·3 권력 집단의 무모한 친위쿠데타는 강력한 민중의 저항을 촉발하였다. 그 저항의 주체는 줄곧 ‘시민’으로 호명되었지만, 실상은 ‘민중’의 전형에 가까웠다. 계급과 계층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구성을 이루었고, 구세대와 신세대가 어우러졌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다양한 소수자들의 참여다. 다른 국적의 거주민과 이주민들이 함께하였다. 장애인들이 위화감 없이 동참하고, 성소수자들도 참여 또한 두드러졌다. 정치적 시민권이 없거나 정치적 시민권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시민으로서보다는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이 함께하였다.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시대 민중의 등장이다. 고통의 탄식에 머무르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는 민중의 모습이다. 이들이 보여준 정치적 직접 행동과 사회적 연대 행동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향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우리 시대 민중은 누구인가?
최형묵(한국교회인권센터 이사장 / 연세대 겸임교수)
‘민중(民衆)’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 말 자체로 보면 그저 ‘피지배 다수자들’ 정도의 의미를 지니지만,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동적 주체로서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민중은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이 발전하는 가운데 그 주체로 인식되었다. ‘민중’은, 정치·경제·사회적 모순관계 속에서 억압과 수탈을 받으면서 동시에 그 억압과 수탈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는 주체로 인식된 것이다. 민중이 1970년대에 새삼 부각된 까닭은 한국적 근대화가 본격화한 시대적 맥락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로서 경제개발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민중은 그 경제개발을 가능케 하는 실질적 주역이었음에도 경제개발을 위한 동원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뿐 정당한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되지 않았다. 이로부터 저항이 촉발되었고, 민중은 그 저항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민중이 1970년대에 비로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통치의 객체에서 정치적 주체로서 민중의 탄생은 곧 근대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1894년 3월 동학 농민군의 격문은 궐기의 주체를 ‘민중’으로 호명하였다. 자생적 근대화의 길이 좌절되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한 국면에서 일어난 1919년 3·1혁명 이후 ‘민중’에 대한 의식은 더 분명해졌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은 저항과 혁명의 주체로서 민중을 분명히 내세웠다. 1970년대 민중 인식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특정 계급 대신에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부각된 것은 한국 근대화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근대화는 부르주아적 시민계급 주도에 의한 전형적인 자본제 확립과는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자생적 근대화의 길이 차단당한 채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국제적인 자본제 질서에 편입되는 역사적 과정을 경유한 까닭에 그 유산의 영향 아래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및 그 세력 구성면에서 복합적인 양상을 띠었다. 민중은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매우 복합적인 사회적 세력으로서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는 민중의 구성이 국면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고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시대 민중은 누구인가?’ 이 물음은 민중의 개념 자체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 1세대 민중신학의 선구들이 강조하였다시피 민중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그때그때 역사적 국면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역동적 실체이다. 민중신학은 그때그때 역동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민중을 주목하는 가운데 신학적 성찰을 발전시켜 왔다.
앞서 말했듯, 1970년대 새삼 부상한 민중은 피지배층으로서 배제당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현실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이중성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다. 1세대 민중신학은 고난의 담지자이자 동시에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이중성을 주목하였다. 사실 1세대 민중신학이 더욱 방점을 둔 것은 ‘고난’의 담지자로서 민중이었다. 사회적 부조리에서 비롯되는 고난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극복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저항하는 데서 역사의 주체로서 나서는 민중의 잠재력을 주목한 셈이었다. 이때 민중은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아우르는 동시에 여러 측면에서 소외와 배제를 겪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1세대 민중신학은 그 역동적인 민중이 일으키는 사건을 주목하고 이를 증언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민중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였다. 민중은 선언적 주체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 주체로 부상하였다. 민중은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여러 계급 계층별 부문 운동이 성장하였다. 민중운동은 산발적 양상을 벗어나 조직적 연대의 양상을 띠었다. 여기서 민중은 노동자와 농민 등 생산자층을 중심으로 하여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아우러지는 사회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1987년 그 민중운동이 절정에 이르러 민주화의 전환을 불러일으켰을 때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역할은 의심의 여지 없었다. 2세대 민중신학은 민중운동에 동참하는 운동의 신학으로서 성격을 지향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1990년대 이후 자본의 지구화가 본격화할 즈음 민중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다. 정치적 주체로서 ‘시민’이 부상하였고 이전의 역동적 민중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민중의 일식(日蝕)이라고 할까?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해 배제된 민중은 이제 사회적 시민권조차 사실상 부정당할 만큼 주변화하는 듯했다. 이제 그 이름은 집단적 주체로서 민중으로서보다는 다양한 소수자들로 불렸다. 여전히 인구학적으로 다수를 이루고 있는 노동자는 물론 촘촘히 위계화되어 있는 사회질서 안에서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소수자’로 범주화되었다. 그 상황에 직면하여 3세대 민중신학은 민중의 ‘고통’을 주목하였다. 민중의 ‘고난’이 주체화의 전제조건으로 이해되었다면 민중의 ‘고통’은 그 가능성마저 부정당한 절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민중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2024년 12·3 권력 집단의 무모한 친위쿠데타는 강력한 민중의 저항을 촉발하였다. 그 저항의 주체는 줄곧 ‘시민’으로 호명되었지만, 실상은 ‘민중’의 전형에 가까웠다. 계급과 계층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구성을 이루었고, 구세대와 신세대가 어우러졌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다양한 소수자들의 참여다. 다른 국적의 거주민과 이주민들이 함께하였다. 장애인들이 위화감 없이 동참하고, 성소수자들도 참여 또한 두드러졌다. 정치적 시민권이 없거나 정치적 시민권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전형적인 시민으로서보다는 소수자로 불리는 이들이 함께하였다.
시민의 이름으로 귀환한 민중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시대 민중의 등장이다. 고통의 탄식에 머무르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는 민중의 모습이다. 이들이 보여준 정치적 직접 행동과 사회적 연대 행동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향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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