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죽재 서남동 민중신학 사상의 주요 내용과 발전적 전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9-17 19:56
조회
35
『농촌과목회』 2026년 가을호(통권 111호) 특집

죽재 서남동 민중신학 사상의 주요 내용과 발전적 전개

최형묵(목사, 천안살림교회, 연세대 겸임교수)


1. 죽재의 삶과 신학 여정

한국 신학계의 안테나로 알려진 죽재 서남동(1918.2.5~1984.7.19)은 과연 그 별명답게 첨단의 신학 사조에 민감하였고 그로부터 받은 영감으로 자신의 신학적 사유를 발전시켜 나갔다. 죽재는 신학 수업의 여정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나는 매번 새로운 충격을 받아서 그것을 가능한 한 극단으로 표현해 온 것 같다.”1) 그 몇 차례의 신학적 충격의 계기를 스스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첫 번째는 성경에서 익힌 지명들이 ‘지구 위에 있는 땅’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고 한다. 죽재는 신안군의 한 섬 자은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소학교 5학년 때 목포에 있는 교회학교에 진학하여 처음으로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중학교 2학년쯤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전주 신흥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충격이었던 것은, 성경이 그저 천상의 이야기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가 지상에서의 역사적 실체를 지닌 이야기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받은 “충격은 상당히 크고 영속적인 무엇이었다”고 술회한다.
두 번째 신학적 충격은 대학 예과를 마치고 신학과 1학년에 들어갔을 때(1938년)였다.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시절이다. 일본인 도미노모리 교수의 ‘신약문학개론’, 미국 선교사 캅 교수의 ‘구약문학개론’을 통해 배운 문헌비판에서 학문의 엄격성을 배웠고, 그때 받은 충격이 역력히 기억되었다고 한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성경학교 교사로, 그다음 해부터 대구에서 10년간 목회하는 동안 가장 많은 감화를 끼친 것은 야나이하라의 「嘉信」지, 바르트, 부르너 등의 위기신학, 그리고 니버의 ‘정치적 현실주의’ 신학들이었다. 더불어 함석헌의 성경강해, 그리고 김재준을 통해 접하게 된 소로킨의 사회학, 토인비의 역사관 등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이후 죽재는 새로운 신학 사조를 접할 때마다 충격을 받았고 이를 체화하는 신학적 여정을 걸었다. 그가 시대정신에 얼마나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신학적 성찰을 수행하였는지 그 여정은 잘 보여주고 있다. 죽재가 받은 신학적 충격 가운데 자신의 “신학 형성에 가장 크고 영속적인 힘을 가진 것은 틸리히의 신학”이었다. 1951년 틸리히의 『프로테스탄트 시대』를 처음 읽은 후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가르치는 동안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틸리히의 신학을 강의하였다. 융의 심리학을 접한 것도, 요아킴의 ‘성령의 제3시대’를 안 것도 틸리히의 신학을 통해서였다.
1955년 캐나다 토론토 임마누엘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C.H. 다드와 불트만의 신약신학, 그리고 베르쟈에프의 종교철학과 엘리아드의 종교사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즈음 신학적인 충격다운 충격을 준 것은 1964년에 읽은 본회퍼의 『옥중서신』이었다. 그즈음부터 10년간은 세속화론(1965), 신의 죽음의 신학(1966), 그리고 희망의 신학(1968) 등에 몰입하였다. 이 시기를 죽재는 “거듭거듭 밀려오는 신학의 파도를 타고 넘으려고 안간 힘을 다했다”고 기억한다.
1969년부터 1974년 여름까지는 “침착한 마음으로 한국의 신학계를 등지고 서재에서 현대의 과학기술문명과 더불어 신학적 싸움을 했다.” ‘안간 힘을 다했다’ ‘싸움을 했다’고 고백해야 할 만큼 당대의 첨예한 주제들을 붙들고 씨름했다는 이야기일 터이다. 이즈음 죽재를 사로잡은 신학적 문제의식도 주목거리이지만 신학계를 등지고 서재에서 골몰해야 했던 사정 또한 심상치 않다. 떼이야르의 진화론에 기초한 신학과 과정신학, 날로 발전하는 생명과학에 대한 탐구, 결국 과학과 종교의 종합으로 수렴되는 신학적 성찰의 과제가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신학적인 충격을 받고 전율하면서” 몰두해야 할 만큼 버거운 과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신학적 공론장을 등져야 할 만큼 압박감을 주었을까? 이밖에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통일교의 『원리강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2)을 발표한 이후 파장도 한몫하였을 듯하다. ‘정통’과 ‘이단’의 프레임을 넘어 현대 신학의 성취 맥락에서 자유로운 토론을 의도하였던 죽재의 충정은 당시 교계나 학계에서 쉽사리 수용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민중신학으로의 전환이 이뤄지기 전까지 죽재의 신학 여정이었다.


2. 민중신학으로의 전환, 방외신학자의 길

그렇게 일종의 침잠 가운데 있던 죽재에게 또 다른 충격이 다가왔다. “작년 금년 내가 받은 신학적 충격”이 그것이다. 죽재는 “그 충격의 계기들을 밝히는 것은 보류하기로 하되” “그 충격을 민중의 신학으로 극단화(radicalize)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죽재가 이와 같이 신학의 여정을 술회한 시점은 1976년 3월 1일이다. 죽재도 서명한 「3·1민주구국선언」 발표일이다.
책의 서문에 명기된 이 날짜는 책의 출간일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작 그 서문을 쓸 때는 문익환 목사가 선언을 준비하면서 동의를 구하던 즈음일 수도 있고, 요즘과 같은 컴퓨터 편집이 아니라 활판 인쇄 사정을 감안하면 그보다 이른 시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작년 금년’으로 환기하고 있는 시점은 1974년에서 1976년 초에 이르는 기간일 수 있다. “그 충격의 계기들을 밝히는 것은 보류하기로 하되”라고 자제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당시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와 연루된 처지에서 신중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즈음이라면 여러 사건이 벌어졌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벌어지고 같은 학교 동료인 김찬국 교수가 감옥에 갇혔다. 그해 죽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나이로비 총회를 앞두고 열린 신앙과직제위원회 회의로 출국하였다가 해외 인사들로부터 한국 민주화운동 상황과 시인 김지하의 안부를 묻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한국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양심수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시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부끄러움으로 인한 충격은 컸고, 급히 김지하의 시 세계를 파고 들었다. 죽재의 민중신학이 김지하의 시 세계로부터 가장 짙은 영향을 받은 것도 그 경험 탓이었다. 1974년 한 해 동안만 하더라도 죽재는 학계 및 교계의 여러 시국선언에 동참하였고 당국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 그해 11월에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이 발표되었고 죽재 역시 이에 서명하였다. 그 성명의 초안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그리고 1975년 2월 처음으로 민중신학을 공표한 글로 여겨지는 “예수·교회사·한국교회”, 이어 4월에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75년 6월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실로 죽재의 삶 자체를 뒤바꾸는 충격이었다. 이 일련의 과정만으로도 이미 그 이전에 지적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결정적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6년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고 그 서명자들은 일제히 구금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여성인 이우정 교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혹독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선언을 주도하고도 공동번역 성서 번역작업을 마무리하고자 서명하지 않았던 문익환 목사도 결국 들통나 옥고를 치렀다. 대다수 성직자이자 교수였던 이들은 심각한 인격적 모독을 동반한 옥고를 치렀다. 육체적 고문을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후에도 그 경험을 내내 직접 표현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인격 모독을 감내해야 하는 나락의 경험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 감옥 안에서 이른바 온갖 잡범들을 만나며 민중의 실상을 경험하였다. 그 경험은 상아탑 안에서 겪었던 지적 충격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적 현장에서 스스로 감내해야 했던 경험이었다.
죽재가 민중신학으로의 전환을 이루기 전 신학 여정을 정리하는 저술의 서문을 작성한 날로 기록된 1976년 3월 1일은 서남동과 안병무4)가 의도적으로 운명의 날을 새기고자 한 ‘공모’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이제 더는 되돌아설 길이 없다는 것을 예고하는 섭리의 결과였을까? 이후 죽재는 종횡무진하는 지적 편력을 자랑하는 신학의 안테나로서보다는 민중신학의 선구로서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다시 대학의 상아탑에 복귀된다면 나는 아마도 다시 과학종교의 비전을 추구할 가능성이 큰 것 같다”5)고 전망하였지만, 죽재의 생애에서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980년 일시 복직되었다가 다시 해직된 후 1984년 다시 복직의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학교로 되돌아가지 못하였다.6)
죽재 신학의 귀결점은 민중신학이었다. 죽재는 이제 상아탑의 서재에 머무는 신학자가 될 수 없었다. 방외(方外)의 신학자7)로서 실천 현장에의 참여와 그때그때 긴박하게 요구되는 신학적 성찰을 수행해야 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로서 선교교육원 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그것이 네모반듯한 연구실 환경을 갖추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선교교육원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목사 후보생들을 교육하는 과정을 운영하고 있었다. 애초 교단의 위촉으로 한신대 제적생들을 교육하는 과정이었으나 여러 학교에서 제적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 교수들도 대학 강단에 서지 못하는 해직 교수들이었다. 학생과 교수 모두 실천적 체험에서 비롯되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교육 과정에 함께 하였다. ‘서대문 민중신학교’라는 별칭으로 불린 그 과정은 말 그대로 민중신학의 중요한 산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죽재는 해직 교수들을 중심으로 하는 갈릴리교회에 동참하였고, 해직교수협의회와 기독자교수협의회 등의 활동을 펼쳤고, 여러 민중운동 현장과 연대하는 가운데 민중신학을 더욱 첨예화시켜나갔다. 죽재의 운명적 조건이었고 민중신학의 운명적 조건이었다. 민중신학의 방법과 내용은 그 조건 가운데서 벼려졌다.


3. 방외신학의 진면목 『민중신학의 탐구』

그렇게 실천 현장과의 연대와 교감 가운데 가다듬어진 민중신학의 성과가 서거하기 1년 전 『민중신학의 탐구』로 집약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죽재의 신학 여정에서는 물론 민중신학의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70년대 민중적 관점을 공유한 여러 신학자의 글을 집약한 책으로 처음 출간된 것은 『민중과 한국신학』8)이었다. 그 시점은 1982년이었다. 이미 민중신학이 합의된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던 그즈음 이 책이 민중신학을 표제로 달지 못한 데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그 대본은 먼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에 의해 영어로 먼저 출간되었고, 그 표제로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을 내걸었다.9) 그럼에도 한국어판에서 모호하게 ‘민중과 한국신학’이라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책이 금서가 되었고 신학 서적으로는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10)이 그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형편이었으니, 민중신학자들은 아슬아슬하게 그 칼날을 피할 묘책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은 금서의 목록에 오르지 않은 가운데 유통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중운동이 절정을 향하여 달리던 그즈음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갔고, 따라서 민중신학의 단초가 되는 20편의 글들을 모아놓은 그 책으로는 그 관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즈음 죽재의 『민중신학의 탐구』가 출간되었다. 초판 간행 시기가 1983년 11월이니, 당시 군사정권의 소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우리말로 된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죽재의 생애에서 두 번째로 출간한 이 책은 이전의 『전환시대의 신학』과는 다른 저작이었다. 생애 동안 출간한 두 권의 책11)은 민중신학 이전과 이후를 분명히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다. 한 신학자의 삶에서 입장의 선회가 이뤄질 때 그 단절성과 연속성의 문제는 늘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죽재의 신학에서도 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민중신학을 배태한 역사적 상황과 그 가운데서 신학자 스스로 겪은 체험의 충격을 고려할 때 우선 그 차이를 주목하여 볼 수밖에 없다. 죽재 자신도 『전환시대의 신학』이 “혼자 배워서 혼자 써낸 것”인 반면 『민중신학의 탐구』는 “혼자서 한 일이 아니”고 “친구들이 같이 토론하고 같이 생각”한 결과로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다.12)
처음부터 단일 저작을 의도하고 조목조목 써 내려간 책이 아니기에 그 내용 구성상의 체계성을 갖춘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반듯한 연구실이 아닌 거리에서 방황하는 가운데13) 쓴 글들을 엮은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내용들을 엮고 있는 확실한 얼개가 두드러진다.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풍부한 민중신학적 ‘영감’과 그 영감으로 빚어낸 민중신학의 기본 얼개에 있다. 아마도 민중신학 1세대를 대표하는 저작 가운데 그 이론적 얼개와 방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저작일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에게 민중의 역사 주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공통되지만 더불어 각기 고유한 이해와 관심의 방향을 드러내고 있는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신학적 얼개와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분명한 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는 죽재 스스로 누누이 밝히듯이 특정한 문제의식을 첨예화하는 사고방식의 경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4. ‘두 이야기의 합류’와 ‘계시의 하부구조’

죽재는 민중을 발견하고 스스로 그 체험을 공유한 충격 이후 민중을 입지점으로 하는 신학적 구상을 본격화하였다.14)

1) ‘두 이야기의 합류’

죽재가 추구하는 신학의 방법과 그에 따르는 신학적 얼개는 ‘두 이야기의 합류’ 구상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민중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이 현재 한국교회의 ‘신의 선교’ 활동에서 합류되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현재 눈앞에 전개되는 사실과 사건을 ‘하느님의 역사개입’, 성령의 역사, 출애굽의 사건으로 알고 거기에 동참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다.”15)

민중을 이 합류의 해석학이 갖는 독특성은, 그것과 전통적 신학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해명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죽재는 ‘두 이야기’ 곧 두 전통을 ‘전거’(典據)라는 말로 성격화하며, 그 의미를 ‘참고서’라고 규정한다. 지금 한국 그리스도인에게서 합류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민중전통과 한국의 민중전통은 동등한 전거, 곧 동등한 참고서가 된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신학의 ‘규범’을 말하고 그 규범의 근거로 성서를 말해왔다. 그러나 죽재의 주장은, 성서가 증언하는 민중사건과 그리스도교 역사에 나타난 민중사건, 그리고 한국의 역사에 나타난 민중사건이 모두 동등한 참고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성서가 그리스도교 전통 또는 신학에서 차지하는 실제적 비중이나 중요성 자체를 무시하는 발상은 아니다. 이 주장의 진의는, 문자로 기록된 성서가 신학의 근거로서 배타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고정된 하나의 텍스트가 문자 그대로 진리일 수는 없다. 어떤 의미의 생성은 텍스트와 독자 그리고 그 사이에 게재되는 다양한 요소 사이의 상호 작용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것이 현대 비평학의 상식이다.16) 그것은 성서의 형성 과정 자체가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될 만한 순수한 ‘성서적’ 전승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다른 전통들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성서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성서 자체 안에 이미 다양한 전통들이 교차하고 있고 그 교차의 과정에서 어떤 전통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계승되어, 다른 것들과 구분할 수 있는 전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고착되어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해석자 또는 계승자를 매개로 하여 다양한 전통과 교차하고 다시 그 내용과 형식을 새롭게 한다. 성서 자체가 그렇게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전통 자체가 그렇게 이어졌다. 문자로서 성서가 배타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서 형성 그 자체,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 자체가 입증한다. 죽재의 민중신학은 그 사실을 비로소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죽재는 그와 같은 해석을 스스로 일러 기독론적·통시적 해석과 구별되는 성령론적·공시적 해석이라 한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기독론적 해석에서는 이미 주어진 종교적인 범주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는 것이라 주장하고, 성령론적인 해석에서는 지금 현실의 경험과 맥락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밝힌다. 기독론적 해석은, 성서가 수미일관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고 보는 해석 방식이다. 그러므로 기독론적 해석은 단일한 전제로 성서의 다양한 전승을 짜맞추는 폐쇄적 해석 방식을 말한다. 반면 성령론적 해석이란 어떤 경계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의 활동을 강조한 개념으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방식을 의미한다. “기독론적 해석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속죄한 것이지만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내가 예수를 재연하는 것이고 지금 예수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17) 통시적이라는 말은 과거 전통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며, 공시적이라는 말은 오늘 여기의 지평을 강조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해석의 적합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지금 현실의 경험과 맥락”이다. 이와 같은 기준은, 문자적 전통이든 역사적 전통이든 그 자체로는 항구불변한 진리로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바꿔 말하면 “실천으로서 전통을 잇고, 발전시킨다.”18) ‘오늘 여기에서의 실천적 문제의식’이 전통의 수용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의미이다.

2) ‘계시의 하부구조’

당대의 민중사건을 해석하고 증언하며 나아가 그 사건에의 동참을 지향하는 실천의 신학으로서 합류의 해석학은 구체적인 매개 장치를 갖는다. 이른바 ‘계시의 하부구조’가 그것이다.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을 통해 합류한다는 합류의 해석학은 ‘계시의 하부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더욱 구체성을 띤다.
전통적인 신학 개념으로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계시의 하부구조’라는 말은 죽재 민중신학의 진면목을 밝혀주는 주요 개념이다. 죽재는 평소 스스로 ‘크리스챤 맑시스트’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다.19) 시대적 정황 때문에 때때로 마르크스주의와 민중신학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지만,20) 그의 신학적 인식은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에서 크게 영향받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오늘의 혁명·정치·해방의 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도전에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와 경쟁으로 그리스도교가 잃었던 활력을 되찾아 민중의 종교로 복귀하려고 한다고 말한다.21) 그가 신학에서는 생경한 ‘하부구조’ 개념을 서슴없이 자신의 신학적 체계 안에 중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설정한 것부터 그 영향의 흔적이다. 단순히 용어를 차용하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은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을 적극 수용한다.
죽재는 두 이야기의 합류 구조를 밝히는 방법론으로 “사회경제사적 내지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조심스럽게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횡간의 의도를 읽자면 그는 분명히 마르크스주의 역사 방법론을 유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사회경제사적 방법 내지는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제안하는 대목에서 “역사적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립을 넘어서는 교회사의 새 시대경륜”을 말함으로써 그 속내를 비치고 있다. 그는 “지배세력에 대한 민중의 제약조건들”을 분명히 밝히는 방법론으로 사회경제사적 방법을, 그리고 그렇게 해서 “민중의 역사”가 밝혀지면 “민중의 사회전기, 민중의 집단적 영혼, 민중의 의식과 그들의 갈망들”을 밝혀내는 방법으로 문학사회학을 적용할 것을 말한다. 신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시대마다 다양한 해석학의 틀을 사용해 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 “자기 역사와 운명의 주체가 될 민중의 정체”를 포착하는 데 그와 같은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 보고 있다.22)
죽재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을 의미하는 ‘사회사적 해석’ 내지는 ‘물질주의적 해석’23)을 기존 신학의 전제들을 비판하고 분석하는 도구로 사용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신학을 구성하는 하나의 인식론으로 삼는다. 그것은 “지배세력에 대한 민중의 제약조건”을 밝힘과 아울러 “역사와 운명의 주체가 될 민중의 정체”를 포착하겠다는 데서 드러난 의도이다. 그래서 죽재는 신의 ‘계시’ 자체가 물질적 하부구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계시의 하부구조’라는 개념을 창안한다.24)
이 개념은 죽재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과학적 방법을 얼마나 비중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 개념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계시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신의 계시는 ‘사회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계시는 ‘물질적 계시’라고 본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의 선택을 받은 ‘가난한 사람’ 곧 민중은 단순히 계시의 매체가 아니라 계시의 구성적 요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착상에서 시작하여 죽재는 “하부구조에서(몸)에서 유리된 상부구조(이념)만의 전통적 신학”은 “유령이요 아편”이라고 단정지었다.25) 여기에서 죽재는 확실히 마르크스의 종교비판 이후 신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민중신학으로의 급진화 이후 죽재는 주로 역사에서의 민중 이야기에 주목하고 그 신학적 의미를 통찰하였다. 그러던 죽재는 생의 말년에 이르러 당대 민중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과 그 현실을 직접 탐색하고자 시도하였다.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1983)26)은 그 두드러진 사례이다. 이는 스스로 사회과학적 탐구를 수행하며, 그 기초 위에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한 것이다. 아마도 죽재의 생이 더 지속되었더라면, 자신의 문제의식을 극단화하는 그의 일관된 입장에서 그 과제를 더 본격화하였을 것이다. 죽재 스스로에게 미완으로 남은 그 과제는 후학들에게 넘겨졌다.


5. 신학의 진정성,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

죽재는 『민중신학의 탐구』를 내어놓으면서 그 서문에서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어떤 신학자들의 메아리가 민중신학으로 형성되어 간다”고 술회하였다. 거기에 신학함의 진정성(眞正性)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학에 대해 반문하며 부끄럽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서도 “신학의 한 중요한 규준은 얻은 셈”이라고 자평하였다.27)
죽재는 1976년 『전환시대의 신학』을 내어놓으면서 다시 대학의 상아탑으로 복귀하면 다시 과학과 종교의 종합을 시도하는 신학으로의 복귀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있었다. 1983년 민중신학의 여정을 한 매듭짓는 『민중신학의 탐구』를 내어놓을 때도 그 기대를 안고 있었을까? 신학적 여정 가운데서 커다란 충격과 함께 주어진 문제의식이 쉽사리 사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로서 신학의 진정성을 깨닫고 그것을 신학의 중요한 하나의 규준으로 삼게 되었다는 자평은 이전의 관심사에 다시 복귀한다 하더라도 분명한 입지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마지막 논문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보다 조금 앞선 같은 해의 논문 “세계의 생명과 그리스도”28)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글은 사회적·생태적 위기가 가난한 민중에게 고통을 가하며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현상을 다각도로 조명하면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그 관점은 오늘의 사회적 위기와 직결된 생태적 위기를 다루는 관점과 관련해서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과학과 신학을 종합하고자 하는 시도는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만큼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또한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생태적 위기,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말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만큼 놀라운 생명공학과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한 문제들은 신학에서도 지나칠 수 없는 과제로 부상하고 있으며, 많은 신학자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죽재는 일찍이 그 문제들을 신학의 과제로 삼았을 뿐 아니라 민중신학에 이르러 그에 접근하는 신학적 입지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본래 그리스도교 복음의 정신을 따라 가난한 사람들, 가장 연약한 이들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 관점을 통해 죽재는 진화적 낙관주의 내지는 기술적 낙관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모색하였다.
결국 죽재의 신학 여정 종착지로서 민중신학은, 신학적 지평의 축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성찰의 방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주제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민중을 관점으로 하는 신학을 뜻한다. 죽재는 그 신학의 진정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그것은 오늘 우리가 계승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미주

1) 서남동, 『전환시대의 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6), 7. 이하 죽재의 신학적 충격과 그 여정에 관한 내용은 이 책 서문을 참조하였다.
2) “통일교 원리강론의 비판적 연구”라는 제목의 이 글은 앞의 책 말미에 수록되어 있다. 처음 발표는 『현대와신학』(1970.3)을 통해서였다. 논문으로 게재된 것이니 그 이전에 다른 공론장에서 발표되었을 수도 있다.
3) 1973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죽재 서남동이 주도한 것으로 종종 회자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73년 선언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인 김관석 목사와 교감하는 가운데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던 지명관 김용복 오재식 등이 주도하였다. 오재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온 현장 - 오재식회고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170-173; 김흥수, 『자유를 위한 투쟁 – 김관석 목사 평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154-160 참조. 죽재가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관여한 것은 1974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4) 당시 안병무는 한국신학연구소 소장으로 해당 저작의 발행인이었다.
5) 서남동, 『전환시대의 신학』, 8.
6) 이미 정년을 넘긴 나이였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명예교수로서 명예 회복을 요구하였지만, 그 결론이 나기도 전 7월에 서거하였다.
7)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3; 『민중신학의 탐구』개정증보판(서울: 동연, 2018), 7. 이후 이 책의 인용은 개정증보판으로 한다.
8) NCC신학위원회 편, 『민중과 한국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9) Commission on Theological Concerns ed., Minjung Theology: People as the Subjects of History(Singapore: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1981).
10) Gustavo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Maryknoll(N.Y.: Orbis Books, 1973). 성염 역, 『해방신학』(왜관: 분도출판사, 1977).
11) 이후 죽재서남동목사유고집편집위원회 엮음, 『서남동 신학의 이삭줍기』(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가 출간되었고, 최근 일본어판에서 번역 출간된 『갈릴리교회 설교집 -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26)에 두 편의 설교가 빛을 보았지만, 생애 동안 출간된 책은 두 권이었다.
12)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8.
13)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7.
14) 이하 ‘두 이야기의 합류’와 ‘계시의 하부구조’에 관한 내용은 최형묵, 『민중신학 개념 지도』개정증보판(서울: 동연, 2026), 63-70을 간추린 것이다.
15)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101.
16) 이에 관해서는 김진호, “탈정전적 성서읽기의 모색”, 『반신학의 미소』(서울: 삼인, 2001); 양권석, “한국적 성서읽기의 한 방법으로서 상호텍스트적 성서해석의 가능성”,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편, 「시대와 민중신학」5(1998) 참조.
17)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102.
18)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52.
19) 장일조, “죽재를 위한 하나의 대화”, 『전환기의 민중신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장일조는, 서남동이 스스로 ‘크리스챤 맑시스트’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이 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데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반면에 강원돈은 서남동의 신학이 마르크스의 역사방법론을 중요한 장치로 하고 있는 점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강원돈, “죽재 신학의 주제와 방법”, 『物의 神學 - 실천과 유물론에 굳게 선 신학의 모색』(서울: 한울, 1992) 참조.
20)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254-255.
21)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25.
22)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60-61.
23)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486.
24)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486-487.
25)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487.
26)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492-522.
27)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7.
28) 이 글은 원래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 밴쿠버 총회의 주제(“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생명”)를 특집으로 한 「기독교사상」 300(1983.6)에 “인류를 위협하는 죽음의 세력들”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던 것으로, 저작 편집 과정에서 제목을 고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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