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칼럼] 삼위일체와 삼권분립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08-08 11:09
조회
26
대전일보 칼럼 02 / 2018년 8월 8일자

삼위일체와 삼권분립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을 이해하는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이는 인간으로서 땅 위에서 삶을 살았던 예수를 통해 신을 인식한 신앙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저 위에 계신 하느님이 사람들 가운데 한 인간으로 현존하였다면, 그렇게 현존하였던 예수가 떠난 다음 하느님은 또 어떻게 현존하는가 하는 물음에서 영으로 현존하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존하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이미 시사하듯, 삼위일체론은 신의 본질을 규명하는 교리라기보다는 신의 경륜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세계 안에서 신의 활동방식이라 할까? 또는 더 쉽게 말해 사람들이 신의 활동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 할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지평 안에서 신의 경륜을 설명할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삼위일체론이 실제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비밀이 있다. 그것은 곧 세계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믿는 신이 어떤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은 곧 스스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어떤 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신을 그대로 닮고자 하는 것 아닌가? 4세기 처음 삼위일체론이 정립되었을 때 그 초점은 삼위의 ‘일체’에 있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화하는 바로 그 즈음이었으니 삼위일체론은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었다. 신학의 문외한인 황제가 논쟁에 끼어들었던 것만 보더라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삼위일체론이 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교리로서 운명을 다한 것은 아니다. 그 하느님에 대한 이해방식을 둘러싸고 새로운 견해들이 제기되고 거기에는 일정한 시대의식 또한 개입되기 마련이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서 그 상호 ‘관계’의 문제 또한 중요한 초점 가운데 하나이다. 서로 다른 형태로 경륜을 펼치면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해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신의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점에서 오늘날 개념으로 ‘민주주의자 하느님’이라고 하면 지나친 억견일까?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삼권분립이다.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은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서구사회에서 삼권분립은 삼위일체의 세속화된 형태로 등장한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를 열었던 선구자들이 삼권분립을 착안해낸 것은 오랜 역사적 유산에 대한 재해석과 그로부터 비롯된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오늘날 신의 권위를 빌어 삼권분립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신의 경륜을 따른 인간적 삶의 당위에 대한 믿음은 현실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당위에 대한 믿음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서 그 믿음의 요체는, 권력이란 그렇게 분립될 때 인권을 보장할 뿐 아니라 따라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든 현실적 합리성에 근거하든 그 당위에 대한 믿음은, 과연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 무엇인가, 그 바람직한 삶을 지키기 위하여 어떤 사회질서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 맥락에서 삼권분립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 안에서 권력을 견제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유력한 제도적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놀랍게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정부 시절 그 원칙을 무시하는 사법농단 사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벌어졌는지 속속 밝혀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사법농단을 일으킨 당사자들의 의식과 소양이 의심스럽다. 사법농단의 주요 인물로 알려진 한 대법관은 지난 1일 퇴임하면서 ‘부덕의 소치’로 국민들께 심려를 끼치게 되었다고 사과하였다. 부덕의 소치가 아니라 ‘정의감의 결여’를 탓했어야 옳다. 덕은 개인적 차원이지만, 정의는 관계적 차원이기 때문이다. 후덕해서 나쁠 것 없지만, 법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근본적 소양은 정의감이어야 하고, 그런 소양을 갖추지 못한 채 중책을 맡아 일을 그르친 것을 사과했어야 했다.

정부가 바뀌었지만, 그와 다를 바 없는 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휘둘리는 이들이 아니라 정말로 바람직한 삶을 위해 우리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이들이 제 몫을 올곧게 감당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된다면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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