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김찬국 평전 『민중인권실천신학자 김찬국』 서평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12-03 22:59
조회
12
김찬국 평전 『민중인권실천신학자 김찬국』출판기념회
2019년 9월 18일(수) 오전 10:30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채플실



천사무엘, 『민중인권실천신학자 김찬국』(서울: 동연, 2019) 서평

최형묵(한국민중신학회 회장)

서평에 앞서 김찬국 선생님에 대한 소회 한 자락을 들춰내고 싶다.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 가운데 가장 마음 깊이 남아 있는 한 분이기 때문이다. 1981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입학 전부터 서남동 교수님과 함께 해직된 김찬국 교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 두 분은 나를 연세대학교 신학과로 이끄는 한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당시는 해직 상태였지만, 학교를 다니는 동안 언젠가는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김찬국 선생님의 『성서와 역사의식』을 탐독하기도 했다.
마침내 1984년 4학년 2학기에 복직하셨다. 우리는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선생님의 복직을 환영하는 모임을 열었다. 안타깝게 그해 7월에 서남동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바람에 김찬국 선생님 혼자서 복직하게 되어 우리는 그 모임을 <서남동 교수님 추모예배 및 김찬국 교수님 복직 환영회>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 선생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기묘한 표정으로 함께 했던 그 일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첫 수업 <오경해석>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셨던 일, 롱펠로우의 <인생찬가>를 강의록 노트 첫머리에 옮겨 적으라 하셨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 때 나눠주셨던 오경저자 분석표는 지금도 내 <공동번역 성서> 첫머리에 그대로 붙어 있다. 사은회가 끝나고 선생님 댁을 침입하여 하룻밤 지내고 김과 찬과 국으로 아침식사를 나눈 일, 방명록을 작성했던 일도 기억에 생생하다.
졸업 후 나는 대학원을 한신대학교로 진학하였기에 수업을 통해 다시 만나 뵐 수는 없었지만, 김찬국 교수님은 진정한 스승의 사표로서 기억되고 있다. 학부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학생운동에 열심인 ‘문제학생’으로 찍힌(?) 탓에 교수님들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 늘 불려 다니며 혼나기만 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한신대에 가서 나를 인정해주는 교수님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새삼 김찬국 교수님에게 고마움을 더 느끼게 되었다. ‘김찬국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황량할 뻔 했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1990년대 초반 4.19 기념일을 맞아 후배들이 나를 초청하였을 때, 선생님께서는 “최형묵이 온다고 해서 왔다.”며 몸소 신학회실까지 내려오셨고 점심까지 사 주셨다. 그게 가까이서 선생님을 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 기억을 안고 있는 나에게 평전 『민중인권실천신학자 김찬국』의 출간은 더 없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찬국의 민중신학에 대한 서설적 접근”(『신학연구』74집, 2019)을 쓰는 동안 김찬국 선생님의 민중신학적 성취를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는 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선생님의 삶의 면면을 깊이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의 모범답안’과도 같은 천사무엘 교수의 김찬국 평전은 그 삶의 전모를 연대기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인간 김찬국, 민중의 편에 선 사회적 실천가이자 목회자 및 교육자로서의 김찬국, 그리고 구약성서 신학자로서의 김찬국의 전모를 성실하게 재현해 보여주고 있다.
첫째 순진무구한 낙천주의자이자 온화한 성품을 지닌 ‘미소의 예언자’ 김찬국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평전은 그 삶의 환경과 가족관계 등을 통해 꼼꼼하게 밝혀 기록함으로써 그 면모를 지니게 된 배경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그 성품이 천성이기도 했겠지만, 그 천성이 훼손되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서 훌륭한 덕성으로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삶의 환경 가운데서도 사랑과 기대를 안고 살았던 삶의 여정 덕분 아니었을까? 평전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가난한 민중들의 편에 서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사회적 실천가로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김찬국의 면모를 평전은 온전히 재구성해 보여 주고 있다. 아마도 세간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기억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평전의 제목 자체가 함축하고 있듯이 평전의 저자는 그 면모를 재구성하는 데 꽤나 신경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 시도는 성공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전은 권위적 리더십과는 상관없는 민주적 리더십의 한 사표로서 선생님의 면모를 제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셋째 구약성서 신학자로서 평전의 저자는 한국 구약성서 신학의 선구자로서 선생님의 신학적 탐구의 여정을 꼼꼼히 추적하는 가운데 그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직 자생적인 성서신학의 바탕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조건에서 그 기초를 닦고자 마음먹고 필생 그 과업을 이루기 위해 분투했던 선생님의 탐구 여정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재구성해 낸 것은 구약성서 신학자로서 저자의 독보적인 기여라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독자는 일관된 학문적 관심사를 필생의 과제로 삼은 학자의 사표로서 김찬국 선생님의 면모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비평이 듣기 좋은 소리로만 일관할 수 없고 뭔가 쓴 소리 한마디쯤은 보태야 할 것 같아, 딱 한마디만 덧붙이고자 한다. 물론 전적으로 평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쉬운 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민중신학자로서 김찬국의 면모를 더 부각할 수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평전의 제목 자체가 “민중인권실천신학자 김찬국”인 만큼, 그의 실천적 삶에서의 성취를 충분히 민중신학적 성취로 평가할 만한 여지를 두고 있다. 또한 그뿐 아니라 구약성서 신학자로서 김찬국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과정을 통해서 민중신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가 배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경험과 민중인식, 그리고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의 실천이 일종의 신학적 승화를 거쳐 비로소 민중신학에 이른다는 점, 그리고 구약성서 신학의 성취를 통해 상당 부분 그 민중신학적 성취를 해명할 수 있기는 하지만 민중신학이 그것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어떤 독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점이 충분히 부각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찬국의 민중신학에 대한 서설적 접근”을 시도한 평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찬국의 신학은 당대의 민중신학적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유하고 있고, 민중신학을 형성하는 데 그 고유한 몫을 지니고 있다. 그 점이 구약성서 신학자로서의 성취에만 파묻혀버린 느낌이어 아쉽다.

마지막으로 사족이 될 수 있지만, 몇 가지 오기 등을 지적하고 싶다. 서평을 준비하면서 받은 판본이 최종본이 아닌 만큼, 아마도 단순 오타 및 오기는 최종교정에서 바로 잡혔을 것이라 생각하고 생략한다. 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한 대목과 확실한 오기로 보이는 한 대목, 그리고 사실 확인 및 해석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두 대목을 지적하고자 한다.
148쪽 “신과대생”으로 열거한 이름 목록에는 그에 부합하지 않는 이름(예> 김학민)이 병행되고 있어서 구분이 필요할 듯하고, 149쪽에 “전남대생 남상기”는 “나상기”로 정정되어야 할 것 같다.
180쪽에 목요기도회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기도회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지대한 협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구속자 가족들이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238쪽 제주 4.3항쟁을 기록한 대목에서 그 당시 학살이 정부와 미군정의 “묵인”하에 이뤄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상 “지휘” 아래 이뤄진 비극이라는 게 오늘날의 평가인 만큼 그 표현은 재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상의 지적 사항은 평전의 성과를 훼손하는 오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완성도를 위하여 재판시 수정 내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점들 몇 가지에 해당한다.

평전의 저자 천사무엘 교수께, 그리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 좋은 책을 내느라 언제나 애쓰는 동연출판사 김영호 사장께 깊이 감사드리며, 그 기쁨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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