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적대의 정치와 자본의 권력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4-26 22:02
조회
11
아시아종교평화학회·연세대교양연구소 공동학술회의
적(敵)의 계보학: 우리에게 적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2024년 4월 26일(금) 2~6시 / 원불교 원남교당

적대의 정치와 자본의 권력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소장 / 민중신학 · 기독교사회윤리학)

1.
오늘 우리 시대는 증오와 적대가 일상화되어 있다.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정치세계에서, 나아가 국제관계에 이르기까지 적과 동지를 이분화하는 현상이 일상화되어 있다. 개별적 인간관계에서부터 전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증오와 적대가 만연한 시대가 있었을까?
편견과 증오, 그리고 적대의 현상은 통상 낯섦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세계에 만연한 증오와 적대의 현상이 과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낯섦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오히려 지구촌이라 할 만큼 모든 인류가 촘촘히 짜인 연결망 가운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처럼 증오와 적대가 일상화되어 있다면 그 까닭은 그렇게 연결된 삶의 방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더 익숙해지는 만큼 오히려 증오와 적대가 고조되고 있다면, 사람들을 하나의 연결망으로 엮어놓는 방식 그 자체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유례없이 단일한 생활권을 형성했다고 할 만큼 지구화된 현실과 더불어 유례없이 증오와 적대가 일상화되었다면, 바로 그 현실에 대한 진단에서 시작하여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구적 자본주의 현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오늘 경험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전적으로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안일한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세계적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수탈의 체제를 외면한 채 문제의 현상을 진단하는 것 또한 안일한 태도일 것이다. 오늘 세계에 만연한 증오와 적대의 문제는 역사적 현상 형태로서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2.
이 짤막한 글을 통해 모든 문제의 현상을 충분히 다루기는 어렵다. 따라서 오늘 경험하고 있는 증오와 적대의 현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경험하고 있는 적대의 정치를 주목하는 것으로 그 내용을 한정하고자 한다. 먼저 가장 익숙하게 겪고 있는 한국 사회 현상부터 환기해 보고 싶다.
지난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경험한 선거와는 무척 다른 양상을 띠었다. 역대 최고 ‘비호감 선거’라고 일컬었을 만큼, 정책대결의 성격은 사라지고 진영대결의 양상만 두드러졌다. 이른바 갈라치기로 표를 결집하는 정치적 술수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승패를 가르는 선거에서 진영논리는 항상 동원되는 법이지만 이전까지 경험해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것은 적과 동지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칼 슈미트적 정치구도를 예고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슬아슬한 표차로 집권한 윤석열 정부의 등장과 함께 타협과 통합을 지향하는 정치가 사라졌다. ‘정치’ 대신 ‘법치’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민주공화국에서 ‘법치’라면 그것은 삼권분립이 나타내듯 권력 견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오늘 한국 사회에서 검찰권력을 기반으로 하는 법치는 권력을 견제하는 의미보다는 집권세력에 대한 반대세력을 순치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범죄자’와 ‘비범죄자’의 이분법은 적과 동지를 가르는 이분법의 구도 안에서 그 실질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미래 사회에 대한 청사진 없이 피차간의 심판에 몰입한 22대 총선의 구도는 그 결과였다.
그렇게 정치가 실종된 가운데 사회적 양극화와 차별 현상 또한 심화하고 있다. 집권세력은 시장의 법칙을 전면에 내세워 능력주의와 경쟁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날 것의 신자유주의 기조 위에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긴축재정과 조세감면,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철폐 정책은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가족부 폐지 방침은 차별 해소에 관심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빈발하는 사회적 참사에 대한 무책임성은 국가의 공공성을 무색하게 한다. 환경과 에너지 대안은 뒷걸음이고, 남북 및 국제관계에서도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그 사이 한국은 ‘독재화하는 국가’ 군으로 전락했다.
4월 10일 22대 총선으로 집권세력에 대한 심판이 이뤄졌지만, 전망이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집권세력의 폭주를 제어하고 권력구조를 개편하는 의미 있는 성과가 기대되지만, 민중의 주권을 확고히 하고 삶의 권리를 확장하는 사회구조의 개편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심판을 받은 집권세력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제1야당 세력이 집권세력과 그 이해관계를 얼마나 달리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주변세력으로 전락한 노동자와 소수자를 대변할 진보정당이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향후 전망을 낙관할 수 없는 이유이다. 적과 동지를 이분화하는 세계적 세력구도와 그에 편승하는 정치세력이 득세하는 세계적 형국 가운데서 어떤 세력도 문제해결의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더욱 암담하다.
7년 전 촛불민의를 따라 새 정부가 구성되었을 때만 해도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는 낙관적이었다. 세계적으로 우익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도 예외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에 안도하였다. 그러나 촛불정부로 일컬어진 지난 정부하에서 그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재벌·금융·행정·사법·언론 등이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이 강고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고, 그 세력이 마침내 다시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를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3.
오늘 한국의 정치 상황은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국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양상을 많은 부분 공유하고 있다. 소통 불능의 통치자 개인의 정치적 스타일도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런 정치 지도자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하는 사회적 기반 자체가 문제이다. 그 사회적 기반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새로운 합리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자본의 축적 위기에 대응하여 한편으로는 사회국가에 맞서고 한편으로는 기존의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에 맞서는 것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상업과 금융에 지배적 지위를 부여하는 경제정책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제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수용하는 규범을 부여하는 의도적 기획에 해당한다. 그 규범은 각기 모든 사람을 전면화된 경쟁의 세계에 살아가도록 하며, 사회관계는 시장의 모델을 따르도록 명령한 끝에 각 개인을 변형시켜 자기 자신을 기업으로 여기며 살아가도록 강요한다(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 합리성』, 21). “신자유주의는 경쟁이라는 보편원리에 따라 인간들을 통치하는 새로운 방식을 야기하는 담론·실천·장치의 총체로 규정될 수 있다”(앞의 책, 23).
통상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퇴조를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에 따라, 국가 개입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던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그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효력을 다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와 다름없는 가설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국가의 퇴조를 동반하지 않았다. 자연적 질서로 여겨진(사실은 그렇게 강변해 온)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 개입이 시도되어 왔다. 신자유주의가 함축하는 새로운 세계의 합리성은 강력한 국가의 개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구현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듯 국가는 자본 축적의 절차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파괴하는 지렛대 역할을 끊임없이 계속해 왔다( 『새로운 세계 합리성』, 23, 30; 피에르 다르도 외, 『내전, 대중혐오, 법치』, 40, 341, 343).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강력한 국가는 그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사실상 내전 상태를 야기한다. 신자유주의 내전은 과두 지배세력이 벌이는 ‘총력전’으로서, 사회적 권리의 축소를 노린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며, 모든 저항과 비판을 억압하고 범죄화하기 위해 법적인 수단을 정치적이고 법적이다. 더불어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강성 보수주의가 도덕 질서 수호를 내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공격할 때 이 전쟁은 문화적이고 도덕적이다(『내전, 대중혐오, 법치』, 17). 여기서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것은 이른바 법치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출발부터 시장경제의 적절한 작동을 위한 법적 질서의 필연성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 법적 질서의 요체는 배타적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의 경쟁을 보장하는 사법(私法) 체제이다(앞의 책, 191, 244, 264, 268). ‘경제헌법’이라 일컬어지듯 그것이 사실상 여타의 사회적 협약에 우선하는 권능을 발휘할 때 그에 반하는 저항을 제압하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나아가 정치 자체를 무력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정치의 사법화(司法化) 현상이다.
신자유주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형식 안에서 그 의지를 관철하기도 하지만 근래에는 권위주의 또는 극우 포퓰리즘과의 관련성이 더 빈번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때 쟁점 가운데 하나가 파시즘과의 관련성이다. 극우 포퓰리즘과 긴밀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 권위주의는 확실히 파시즘과의 유사성 또는 그 전조를 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개인들을 통합하고 경제와 사회 모든 분야를 총괄하는 총체적 국가로서 파시즘 체제와 시장 및 기업 모델을 사회 전반에 구현하는 강력한 국가 체제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파시즘과의 관련성을 논하는 것은 위기의 심각성과 더불어 정치적 저항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효과적이기는 하지만, 사태의 본질을 비켜감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무장해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를 자유화하고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여 경쟁적 기업에 내맡기고, 나아가 모든 개인을 경쟁적 관계로 내몰기 위하여 국가 폭력이 동원되는 점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앞의 책, 286, 291).

4.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적대의 현상은 매우 익숙한 삶의 방식 그 자체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그것은 전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시장으로 묶어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 자본이 축적 위기에 대응하여 자신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고 국가 권력을 동원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는 현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에 맞서는 것은 모든 사람의 평등을 추구하며 민중의 주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 지향점 가운데 구체적인 여러 과제들이 제기될 것이다. 그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분투할 때 자본의 권력이 강요하는 삶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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