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의 맥 03] 형제살해의 비극과 인간의 고통 - 인간문명에 대한 성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4-17 20:50
조회
1019
2019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2019년 4월 3일~7월 10일 매주 수요일 오후 7:00~8:30
최형묵 목사

<3> (4/17) 형제살해의 비극과 인간의 고통 - 인간문명에 대한 성찰

1. 형제살해의 비극 - 카인과 아벨 이야기(창세기 4장)

“가인은 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에덴의 동쪽’은 낙원을 잃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말한다. 그 땅의 이름이 ‘놋’은 ‘떠돌아다님’ 또는 ‘쉼 없음’을 뜻한다. 그러니까 ‘에덴의 동쪽’은 쉼 없이 고단한 노동을 하며 서로 불화와 갈등을 겪고 있는 인간 삶의 실상을 상징한다.
선악과 이야기가 고도의 상징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형제살해 이야기는 매우 구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들로 카인과 아벨이 있었고,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는 사람이어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각기 자기가 거둔 소출을 제물로 바쳤는데, 카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요체이다. 그래서 분노한 카인이 아벨을 불어내어 돌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까닭? 농경민과 유목민의 갈등?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믿음의 차이? 정성의 차이? 하나님의 불가해성? 인간들간의 대립 또는 인간 내면의 갈등?
이 이야기는 농경부족과 유목부족간의 갈등이라는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단지 부족간의 갈등 문제로서보다는 인류역사상 사회적 ‘분업’이 등장하면서 빚어진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적 분업의 등장은 농경 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등장한다.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고 소출이 늘어나면서 사회적 분업이 명확해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 활동은 점차 소규모 가족단위를 중심으로 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소유’ 관념의 등장이다. 사적 소유 관념이다. 공동체적 공유 관계에서 사적 소유 관계가 사회의 중심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사회의 갈등은 증폭하게 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바로 그 갈등의 기원과 양상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2. 홍수와 무지개 사이 - 노아 홍수 이야기(창세기 6~10장)

1) 노아 이야기 서두(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은 누구인가?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는? - 신성을 넘보는 인간
2) 홍수 이야기 - 세계 민족들의 신화 곳곳에 산재하는 홍수 이야기들
3) 하나님과 노아의 언약 - 홍수와 무지개 / 불가역적인 하나님의 은총 /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자연의 생명력
4) 노아의 아들들, 셈, 함, 야벳 -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이해
노아의 세 아들 이름은 오늘날의 어족(語族)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그 어족의 기원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으로 혼동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첫째 아들로 간주된 셈은 히브리인을 포함한 일군의 종족의 시조로, 야벳은 그리스인으로 대표되는 북쪽 종족의 시조로, 함은 오늘날 이집트와 리비아를 포함하는 북아프리카와 가나안 지역(고대 이집트의 판도)에 거주하는 종족의 시조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분류는 성서가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과 정치적 이해관계 및 지리적 친소관계로 분류된 것일 뿐 현재 세계의 모든 종족의 기원과는 상관없다.

* 선조들의 장수의 비결???
상징적 숫자를 푸는 몇 가지 열쇠: 4 사방 / 7 음력 한 달의 1/4 / 10 역사의 한 주기/
12 한 해, 열두 부족 //
예) 아브라함 175=7×5×5 / 이삭 180=5×6×6 / 야곱 147=3×7×7

3. 끝없는 욕망 - 바벨탑 이야기(창세기 11장)

홍수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서 악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존재는 그 한편에 의인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선악이 혼재된 인간사회의 실상을 성서 기자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바벨탑 이야기는 성서 기자 당대의 경험하고 있는 인간문명의 악한 속성에 대한 통찰이다.
본래 ‘신의 문’을 뜻함과 동시에 ‘바빌론’을 지칭하는 ‘바벨’은, ‘혼란’을 뜻하는 히브리어 ‘발랄’과 발음이 비슷하다. 성서 기자의 말장난은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비판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바벨 탑 이야기는 인간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그 문명의 밑바탕의 동기를 이루고 있는 부정적인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하나님은 시골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바벨탑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인위적인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도시문명의 특징이 무얼까? 한마디로 인위적인 규격화이다. 직선과 네모는, 인간의 편의에 따른 인위적인 획일화의 결과이다. 벽돌을 굽고 탑을 쌓았다는 것은 바로 그 인위적인 조작의 상태를 말한다. 획일적인 규격, 곧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이 도시공간이 상징하는 인위적인 시공간이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는 곧 권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신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 하나의 가치가 지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열과 갈등이다. 바벨탑 이야기는 그 진실을 전한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절 사건은 바벨탑 이야기가 함축하는 뜻과는 정반대되는 진실을 전해주고 있다.

4. 원역사의 결론

신화는 표현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 은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유와 사실의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다만 특정한 은유가 등장한 역사적ㆍ문화적 배경을 헤아려 신화에 접근할 때 우리는 그 의미 또는 메시지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원역사는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의 구도를 반복한다. 이 이야기들은 표면상 인간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기원을 해명하고 있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원인론적 설명). 그러나 원역사(신화)의 본 뜻은 현상에 대한 심층적 진단(통찰)을 통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데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도 무한한 상상력의 자료로서 역할하며, 아울러 오늘날 우리의 문제들의 해결방안까지도 암시해 주는 역할을 한다. 신화의 생명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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