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의 맥 10] 말씀이 육신이 되다 - 예수의 길, 참 인간의 길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6-26 21:24
조회
926
2019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2019년 4월 3일~7월 10일 매주 수요일 오후 7:00~8:30
최형묵 목사

<10> (6/26) 말씀이 육신이 되다 - 예수의 길, 참 인간의 길

1. 신약성서의 형성

구약성서가 대략 1,0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씌어져 집대성된 것에 반해, 신약성서는 100년이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엮어졌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 구약성서는 매우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는 반면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모든 내용이 한 가지 관점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걸쳐, 뚜렷한 주제(예수 그리스도)를 초점으로 하고 있기는 하나, 그 관점은 다양하다.

2. 복음서의 형성과 성격

복음서들은 바울 서신들보다 늦게 기록된다. 복음서 전승의 주체들은 십자가의 의미에 집중된 바울 서신들과 다른 예수의 생애에 관심을 보다 집중한다. <마가복음>과 함께 공관(共觀)복음서로 불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70년)은 복음서 <마가복음>(60년)과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어록>을 기본 자료로 한다. 그리고 제4복음서로서 요한복음은 80년경에 또 다른 맥락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뒤늦게 발견된 <도마복음서>가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현존하는 최초의 자료로서 마가복음은 예수의 수난 과정(예루살렘에서의 여정)을 중심으로 민중과 함께 한 예수의 생애를 상대적으로 진솔하고 소박하게 전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유대의 전통을 염두에 두고 그 안에서 예수의 생애를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하고, 누가복음은 보편주의/세계주의적 관점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인 예수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복음은 많은 논란의 대상(특히 영지주의와의 관련성 등)이 되고 있으나, 어쨌든 진술 성격상 깊이 있는 체계를 띠고 있으며 사변적 성격(그러나 실천 내지는 현장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이 강하다.

3. 역사적 예수 연구의 문제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1세기 갈릴리에서 삶을 살았던 예수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에서 새삼스러운 문제꺼리가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 지배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여전히 교리상의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 예수 사이의 불일치를 인정하지 않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그에 대한 의문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그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18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예수전을 쏟아 냈다. 그러나 그렇게 재건된 예수상은 실제 역사의 예수라기보다는 저자들의 당대적 이상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주장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는 사실상 파산선고를 당한다.
그러나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에 의해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형성된다. 불트만은 실존적 깊이의 차원에서 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으며, 초기 기독교의 문헌상에 나타난 신화적 외피를 걷어냄으로써 오늘 우리와 예수는 실존적 차원에서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불트만의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를 복원하는 데 그치고 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과는 달리 예수를 ‘오늘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오늘의 실천에 개입하는 신학적 인식의 지평을 열었다.
1950년대 들어 전후 세계 재건과정의 활기와 더불어 역사적 물음이 부활하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도 다시 시작되었고,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예수 르네상스’로 불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의 본격화이다. 이전에는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 데 가장 신빙성 있는 근거로 예수의 ‘말’을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이제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하게 되었다.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한다는 것은, 예수를 단순한 개체적 인격으로서보다는 주변의 맥락과 결합되어 있는 사회역사적 존재로 보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운동’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식과 관련된다. 그것은 예수 개인의 행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관계 안에서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일으킨 일련의 운동을 말한다. 역사의 예수에 관한 탐구의 이와 같은 성취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제3세계의 민중운동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전개된 새로운 신학운동 및 서구의 급진적 신학운동의 영향이다. 이러한 운동은 ‘오늘 여기’의 ‘갈등’의 문제를 ‘신학하기’의 전면에 내세우며 그것을 역사의 예수에 적용하도록 고무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늘 여기’와 ‘그때 거기’를 통합하는 문제설정이 가능해졌다. 불트만이 실존적 차원에서 강조했던 이 양자의 만남이 오늘 새로운 신학적 인식에서는 역사의 차원에서 재현된 것이다.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평가에서 슈바이처가 선언한 바와 같이, 오늘의 활발한 역사적 예수 연구 역시 당대적 이상을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슈바이처의 평가 이후에 오히려 더욱 활발해진 역사적 예수 탐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카아(E. Carr)의 말대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현대 역사학의 인식에도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결코 중단될 수 없는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의 근원성과 통한다. 사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는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뜻한다. 여기서 그 방법론이 어떤 것이냐, 또는 어떤 계보와 연결되는 것이냐 하는 점은 부차적이다. 인간성에 대한 물음의 진정성이 중요할 뿐이다. 그 물음의 진정성으로 과거 한 인물에 대한 기억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발견해내고 동시에 오늘 재현되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성찰하는 것은 주저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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