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의 맥 12] 권리없는 자들의 권리 - 로마제국과 바울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7-10 21:01
조회
923
2019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2019년 4월 3일~7월 10일 매주 수요일 오후 7:00~8:30
최형묵 목사

<12> (7/10) 권리없는 자들의 권리 - 로마제국과 바울

1. 바울은 누구인가?

1) 자료: 사도행전, <친서> 데살로니가 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후기바울서신>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2) 출신지와 신분: 다소 출신? / 로마 시민? /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노동자’
3) 유대인: 히브리 사람 / 이스라엘 사람 / 유대인 / 사마리아인 / 베냐민 지파 사람 / 바리새파 사람 / ‘디아스포라 유대인’ / ‘자유민으로서 노동자’
4) 바울의 전향 (1) 다마스쿠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스테판의 처형 / 박해자에서 박해당하는 자로 /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서 권리를 부정당한 사람의 편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자로. (2) 전향시기: 36년경? / 다마스쿠스→아라비아→다마스쿠스→3년 후 예루살렘. (3) 전향 이후: “14년 후”(갈라 2:1)? / 시리아ㆍ길리기아→예루살렘→이방인선교사(회당: 유대인, 개종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로 본격활동→예루살렘→로마 / 62년경 순교.

2. 바울은 과연 예수운동을 계승하고 있는가?

바울의 신학은 그 전반에 걸쳐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천년을 이어 온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사실상 바울의 신학에 기초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그 논란의 초점은, 예수운동의 계승 여부에 있다. 과연 바울의 신학은 권력에 대한 비타협으로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예수운동을 계승한 것일까? 아니면 예수운동의 혁명성을 무장해제시켜 권력과의 타협의 길을 열어놓은 것일까? 바울의 신학이 예수운동을 계승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제국의 질서와는 상반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예수운동을 왜곡시켰다면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적 기독교 곧 제국과 동일시되는 기독교의 길을 열어놓은 셈이 된다. 과연 어느 편일까?
바울이 과연 예수운동을 계승하고 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는 것은 바울 서신 곳곳에 예수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언급들이 등장하고 있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1) 바울의 신학, 특히 현세적 권력과의 관계에 관한 바울 신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로마서 13장의 내용이다. 여기서 바울은 현실의 권력에 복종할 것을 역설한다. 역사적으로 그 본문은 국가권력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시금석처럼 간주되어 왔다. (2) 바울의 사상 가운데서 교회생활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가장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여성의 지위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서신서에는 여성에 대한 태도가 때로는 적극적이고(갈라 3:28) 때로는 부정적이어서(고전 14:34) 혼란스럽다(고전 11:2-16). (3)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바울의 태도는 현존하는 제도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의심스럽게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4) 무엇보다 바울은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할까? (1) 로마서 13장의 본문은 국가권력 일반론을 전개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권고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2) 여성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그 자체의 문맥에서도 잘 어울리지 않고, 더욱이 복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무의미하다는 바울의 신학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3) 노예제도에 대한 태도는 당대의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어떤 것이 최선의 방법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한다. (4) 로마제국의 질서 안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면, 예수의 죽음과 십자가를 강조한 바울의 의도가 매우 급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권리 없는 자들을 위한 신학: 율법과 복음의 문제

바울의 인의론(認義論)은,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체적 관계에서 제기된 것이다. 유대인, 게다가 유대 전통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마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특권을 정당화하는 율법은 준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이를 이방인에게도 적용하였다(참조: 갈라 2:12이하 - 안디옥 회식 사건). 그러나 유대인의 종교적ㆍ사회적 특권을 정당화해주는 율법은, 그 체제로부터 아무런 시혜를 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바울은 ‘믿음’으로써만이 구원받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유대의 특권적 체제로부터 배제된 이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고 ‘믿음’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 그 비판의 초점은 자기 의(自己 義)였다. 율법이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오용되고 만 현실이다. 바울은 율법을 문제시하면서 유대인의 선민의식만이 아니라 모든 배타적 선민의식을 문제시한다. 바울은 율법의 준수를 선민의 표징이자 동시에 구원의 방도로 아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까지도 함께 비판한다(고전 1:18이하; 로마 1:16-17; 3:9이하 등 참조).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에게 공통되는 것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했다는 배타적 의식이다. 그와 같은 자기 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배타적 의식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에게만 한정된 것만도 아니었다. 그 배타적 의식을 문제시한 바울은 세계 자체를 죄의 노예가 된 것으로 인식한다(로마 6장, 그리고 루이제 쇼트로프, “죄와 해방: 로마서를 중심으로”, 김재성 엮음, 『바울 새로 보기』, 한국신학연구소 참조). 바울이 인식한 세계, 그것은 곧 로마제국이었다. 바울이 노린 것은 로마제국 자체가 자기 의에 가득 찬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선민’, 지혜를 추구하는 ‘문명인’, 제국의 질서를 떠받치는 ‘시민’은 바울에게서 한 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알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경험 세계를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오만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은 모두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완결된 세계로 봄으로써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닫힌 세계이다. 그 닫힌 세계를 바울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 닫힌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시한다.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 곧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성의 표상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설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팔레스티나를 넘어 세계로 확장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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