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강좌

이슬람의 세계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9-11 22:19
조회
238
2024 하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퐁당퐁당 이웃 보듬는 영화와 철학–이란·인도 페미니즘” 서설 2
2024년 9월 11일(수) 오후 7:00 / 최형묵 목사

* “퐁당퐁당 이웃 보듬는 영화와 철학–이란·인도 페미니즘”(송길룡 교우) 강좌를 앞두고, 해당 사회의 세계관을 형성한 배경으로 ‘힌두교’와 ‘이슬람’을 간략히 살펴본다.

이슬람의 세계

1. 다양한 이슬람, 다양한 무슬림

1-1. ‘이슬람’은 ‘순종’을 뜻하며, ‘무슬림’은 ‘순종하는 사람’을 뜻한다.
1-2. 흔히 이슬람은 중동 또는 아랍의 종교로 알려져 있지만, 전체 무슬림 가운데서 아랍인 비율은 18%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 13억이 넘는 무슬림의 절대다수가 중동의 사막 지역보다는 쌀농사를 짓는 지역,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 거주한다.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이르는 지역, 중국의 남서부와 러시아의 남부, 유럽의 중심부와 아메리카 지역에 이르기까지 세계 어떤 지역이든 무슬림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 거의 없다.
1-3. 1400년이 넘는 이슬람의 역사,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무슬림의 분포는 얼마나 다양한 이슬람과 무슬림이 존재할 것인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 다양성을 간과하고,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으로 무장한 무슬림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2. 이슬람의 기원과 역사

2-1. 7세기 이전의 아라비아반도에는 유목민(베두인)과 오아시스 정착민으로 구성된 이중적 사회구조가 있었다.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하는 정착민 사회는 교역의 발달로 사회 경제적 변혁을 겪기 시작했고, 그 사회가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의 유목민 사회와 긴밀히 결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역주도권을 둘러싸고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하였다. 그 상황에서 기존의 씨족사회 중심의 사회조직은 부적합하게 되었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요구되고 있었다.
2-2. 무함마드가 등장한 것은 그와 같은 시대 분위기에서였다. 메카의 유력한 가문인 꾸라이쉬 부족 출신인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마저 일찍 여의고 친척들에게 양육되었다. 성장하여 대상에 참여하여 시리아 지방을 왕래하면서부터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가운데 꿈을 키워갔으며, 25세 때 15세 연상인 과부 카디자와 결혼했다. 생활의 안정을 찾자 메카 부근의 히라 동굴에서 명상과 사색에 잠긴 끝에 15년의 세월이 흘러 40세에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받았다. 그때의 계시가 이슬람의 기원이다. 무함마드는 이후 23년간의 생애 동안 계속 계시를 받는 가운데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2-4. 메카에서의 초기 활동은 부족들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620년 신자 70여명과 함께 메디나로 활동무대를 옮긴다(聖遷, 히즈라). 부족들간 갈등을 겪고 있던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중재자로 떠받들어져 일종의 신정국가 체제인 ‘움마’를 만들어 자신의 이상을 펼치게 된다. 그것은 혈연이나 지연이 아닌 신앙 곧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였다. 메카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 630년 무혈입성하였다. 다음 해 메카의 여러 부족들은 이슬람을 수용할 것을 서약했고, 그다음 해인 632년 62세의 무함마드는 아라파트 산에서 고별연설을 하면서 이슬람의 승리를 공식 선포하고, 바로 그해에 영면하였다.
2-5. 이슬람은 무함마드 시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래 불과 100여 년 사이에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서북부와 유럽의 이베리아반도, 그리고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유역,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판도를 확장하였다. 이슬람은 8~9세기 이후 이슬람 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복합적인 이슬람문명을 일구어 정착기에 들어선다. 십자군 전쟁과 몽골군의 침입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아랍 중심의 이슬람제국은 붕괴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이슬람국가들의 출현과 함께 그 판도 또한 더욱 확장된다. 18세기 서구 제국주의 침략 이전까지 이슬람문명은 천년 이상 사실상 세계의 중심을 이루었다.
2-6. 이슬람문명의 확산과 정착은 세계사에서 다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슬람 전파 초기에 비잔틴제국과 산사조 페르시아의 오랜 대결은 이슬람의 확산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오랜 대결로 제국들은 쇠퇴했고 그 제국들의 치하에 있던 신민들은 염증을 느꼈다. 그런 조건이 초기 이슬람의 확산에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유목민과 대상의 기동성 또한 그 전파에 적극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슬람 그 자체가 애초부터 민족이나 국가, 지연이나 혈연을 초월한 종교로서 세계성과 보편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형제애’를 강조하는 이슬람은 다른 문명들에 대해서도 관용적이었다. 이슬람문명은 마치 하나의 용광로처럼, 고대 오리엔트문명, 그리스-로마문명, 페르시아문명과 인도문명을 용해하였다.

3. 신앙과 삶으로서 이슬람

3-1. 이슬람은 간결한 신앙의 요체와 함께 생활 속에서 신앙을 구체화하는 면모에서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철저하다.
3-2. 이슬람 신앙은 흔히 6신5행(六信五行)으로 간결하게 집약되는데, 6신은 기본 교리로서 여섯 가지 믿음을 말하고 5행은 무슬림의 신앙생활을 떠받치는 기둥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종교적 의무를 말한다.
3-2-1. 여섯 가지 믿음은 하나님[알라], 천사, 경전[꾸란], 예언자[무함마드], 최후심판, 정명(定命)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이 가운데 다섯 가지는 꾸란에 명문화되어 있으나(꾸란 4:136) 맨 마지막 정명에 관한 것은 명문화되어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경전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이유로 순니파는 정명을 여섯 가지 믿음에 포함하고 있다. 시아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정명을 여섯 가지 주요 믿음에 포함하고 있다.
(1) 하나님: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의 유일신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꾸란 29:46). 그러나 삼위일체론을 사실상 삼신론으로 간주하여 거부하고 하나님의 독존성을 강조한다.
(2) 천사: 하나님과 인간의 중개자로서 천사에 관한 믿음은 흥미로운데, 천사들은 각각 고유한 역할을 맡고 있다.
(3) 경전: 이슬람은 완결된 최후의 경전으로서 꾸란을 믿는다. <모세5경>,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무함마드의 <꾸란>을 중요한 경전의 4부작으로 꼽고, 그 가운데서도 <꾸란>을 천상의 원형 그대로 완결된 최후의 경전이라 믿는다. 꾸란 외에도 무함마드의 어록에 해당하는 <하디스>가 경전에 버금가는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4) 예언자: 여러 예언자 가운데서 여섯 명의 예언자 곧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를 가장 중요한 예언자로 떠받들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예언자의 봉인’으로서 무함마드를 가장 우대한다. 이슬람은 그 어떤 예언자에 대해서도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5) 최후심판: 그리스도교 신앙과 마찬가지로 부활과 최후심판에 관한 믿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론과 같은 교리는 없으며, 현세에서의 생의 아름다움을 구가하고 선행을 할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6) 정명: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믿음이다. “인샬라!”를 입에 붙이고 사는 무슬림의 태도는 마치 숙명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알지 못하는 신의 뜻을 인정하는 것일 뿐 꼭 비관적 체념의 의미는 아니다.
3-2-2. 모든 무슬림이 따르는 다섯 가지의 종교적 의무는 신앙고백, 예배기도, 라마단월의 금식, 자선, 메카로의 순례를 말한다.
(1) 신앙고백: “하나님[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자이다.”를 입으로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을 말한다.
(2) 예배기도: 하루 다섯 번 행하는 예배기도(새벽, 정오, 오후, 저녁, 밤)는 주로 자기정화에 목적을 두고 있다.
(3) 금식: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월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는 것을 일절 금지한다. 금식은 개인적 성찰의 기회인 동시에 사회적 연대의 축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4) 자선: 자선 또는 종교부금 등으로도 불리는 ‘자카트’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에서 비롯된다. 처음에는 자발적 성격을 띠었으나 나중에 의무화되었다. 납부율은 대체로 연간 수입의 2.5%, 곡물인 경우 5~10%, 매장자산의 경우 20%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자발적인 자카트는 계속되고 있고, 현대에 와서는 자발적 자카트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다.
(5) 성지순례: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우상들을 완전히 타파한 것(630년)을 기리고자 한 데서 유래한다. 의무라 하여 불가역적인 것은 아니다. ‘필요는 금지보다 우선한다’는 포용적 원칙에 따라 경제적 형편으로 성지순례를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해된다.
3-2-3. 이슬람은 이상과 같은 종교적 신앙생활과 함께 구체적 삶에서 그 윤리를 구현하고 있다.
(1) 정치: 한 종교의 교조가 자신의 이상을 당대에 전 사회적으로 구현한 경우는 드문데, 이슬람의 경우에는 무함마드 자신이 종교적 지도자이자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였고 국가를 경영하였다. 그런 만큼 그 모범은 이슬람의 정치 전통에 매우 깊게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 사회들은 그 이념을 이슬람법 곧 ‘샤리아’로 일컬어지는 체계에 수용하여 정치원리로 삼았다.
2) 경제: 이슬람의 경제관은 모든 물질은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믿음과 “가진 자의 재산 중에는 못 가진 자의 몫도 있다”(꾸란 51:19)는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공평한 상속제도, 이자금지 제도는 그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부의 편중이 극심하게 이뤄지는 오늘 사회 현실에서 전통적인 이슬람의 평등주의적 경제관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것은 다른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이슬람 사회가 당면한 과제이다.
3) 양성평등: 기본적으로 남성중심의 사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전근대 이슬람 사회에서의 여성의 권리는 서구 사회 여성의 권리보다 훨씬 폭넓게 보장되었다. 이슬람 초기부터 여성들의 역할은 결코 소홀히 되지 않았다. 또한 경전 자체에서 성차별적인 용어들이 문제시된 것은 아마도 꾸란의 경우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꾸란 33:35). 성차별을 극복하고 양성평등을 이루는 것은 모든 사회의 공통적 과제이지 이슬람 사회만의 과제는 아니다.
(4) 지하드: 흔히 ‘성전’(聖戰)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서구적 번역에 해당한다. ‘지하드’는 진리를 향한 투쟁 또는 노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4. 문명으로서의 이슬람: 학문과 예술

4-1. 세계 역사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기여도 측면에서 말하자면, 사실 종교적 신앙으로서 이슬람보다도 문명으로서 이슬람이 훨씬 우월할 것이다. 8세기 이후 정착기에 들어선 이슬람 문명은 중세 700~800년간 사실상 세계사 무대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은 이슬람 문명의 판도 안에 있던 모든 문명의 유산을 계승한 결과이며, 동시에 인접 문명과 폭넓은 교류 덕분이었다. 학문적 차원에서 말하면 신학, 철학, 의학,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지리학, 역사학 등 모든 분야에서 중세 이슬람 학문은 세계 문명의 보고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4-3. 학문과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이슬람 사회의 예술 또한 발전하였다. 형상을 금지하는 종교적 원칙이 인간의 표현 능력과 그 욕구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건축물과 서책, 양탄자 등에 그려진 아라베스크 문양은 형상금지 원칙을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놀라운 예술적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천일야화>는 중세 문학의 금자탑으로 이슬람 문명의 문학적 상상력의 저력을 말해주며, 건축과 음악 등에서 구축한 이슬람의 독특한 세계는 말할 것 없거니와, 오늘날에는 이슬람권의 영화 또한 큰 주목거리이다.

5. 한국과 이슬람과의 교류

5-1. 한국이 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은 1255년경 프랑스의 루이 9세의 사신 뤼브릭이 원나라에 왔다가 그의 여행기에서 ‘섬 나라 까우레’라고 소개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4~5백년 앞서 아랍 무슬림들은 신라를 왕래하였고 자신들의 세계에 소개하였다. 이미 9세기에 신라를 소개한 아랍 문서들이 있고, 신라의 유적에도 무슬림의 왕래를 추정케 하는 단서들이 있다.
5-2. 고려 시대에는 더욱 광범위하게 무슬림 상인들이 왕래하였고, 원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는 개경에 무슬림의 정착촌까지 생겼다. 무슬림 출신들 가운데서는 고려 조정에서 중요한 지위에 오른 이들이 있고,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고려 속요 <쌍화점>은 무슬림이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고려인들과 매우 친숙한 존재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오늘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소주 또한 아랍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5-3. 조선 초기에도 무슬림들과의 교류는 빈번하였고 조선의 왕궁에서는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축복을 기원하는 꾸란 독송회가 열리기까지 했다. 조선은 이슬람의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기도 했는데, 조선 역법의 기초가 된 <칠정산내외편>은 이슬람력의 원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적용한 결과로 문명교류의 중요한 하나의 예이다.
5-4.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이슬람 및 무슬림과의 교류는 한국 전쟁 당시 터키군의 참전으로 재개되었다. 그리고 중동과의 교류, 그리고 최근에는 이슬람권의 노동자들의 이주로 이슬람과 한국 사회는 더욱 긴밀하게 관계를 맺게 되었다.*

* 참고문헌
오강남, <세계의 종교, 둘러보기>개정판(현암사, 2022)
라이프사이언스 / 노경아 옮김, <세계5대종교 역사도감>(이다미디어, 2016)
이희수 외, <이슬람 - 이슬람문명 올라로 이해하기>(청아출판사, 2001)
정수일, <이슬람문명>(창작과비평사, 2003)
칼 언스트 지음 / 최형묵 옮김, <무함마드를 따라서 - 21세기에 이슬람 다시 보기>(심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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