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강좌

북간도 명동촌 이야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6-05-06 16:49
조회
131
2026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인문강좌
종교영화 보며 우리 교회 깊이알기 – 반태경, <북간도의 십자가>(2019)
2026.4.22.(수) 오후 7:00시 / 최형묵 목사

북간도 명동촌 이야기

1. 한국 교회의 다양한 신앙형태

1. 한국 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앙 형태가 있고, 그것은 대체로 일제 강점기에 그 원형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교회 안의 신앙으로 그치지 않았다. 새로운 나라 만들기 또는 한국 근대화의 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 주로 부흥회를 통해 형성된 교회 대중의 신앙은 내세지향적 성격을 뚜렷이 지니게 되었다. 위기가 일상화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 신앙은 가장 일반적인 경향이 되었다.
1-2. ‘자아개조 민족주의’(Kenneth Wells)로 일컬어지는 민족의식에 투철한 서북지역 기독교 선각자들(이승훈, 안창호 등)은 반공주의와 미국적 자유주의로 한국사회를 구상하였다. 이 흐름은 훗날 『사상계』를 중심으로 결집하며, 한국 근대화 구상에 가장 뚜렷한 유산을 남겼다.
1-3. 간도지역의 민족운동과 주로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형성된 신앙의 전통(김약연, 김재준, 강원용, 윤동주,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은 한국적 근대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1-4. 오늘날 잊혀진 전통이 되었지만,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그 선구자가 된 기독교인(이동휘, 여운형 등)의 전통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1-5. 소수이지만 『성서조선』그룹(김교신, 함석헌 등)과 그 후예들(유달영, 이찬갑, 장기려 등)의 신앙은 여전히 한국사회에 의미있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반국가주의와 함께 자율적 신앙공동체를 추구한 이들의 실천은 오늘날 조합운동과 대안적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2. 북간도 지역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

2-1. 북간도 명동촌은 일제에 의한 조선 강점이 노골화되고 있던 1899년 무렵 함경도 회령과 종성에 살던 네 가족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약연, 남도천, 문병규, 김하규 네 집안의 이주였다. 이 가운데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할아버지, 김하규는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들 가문은 모두 실학의 후예들이었으며, 김하규는 동학에도 가담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이 가족들의 이주는 단순히 호구지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기르자는 뜻이 이주의 주요 동기였다. 처음에 이들 가족은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으나 신학문의 필요성을 느껴 근대식 학교로서 명동학교와 명동여학교 등을 세웠다. 이 근대식 학교를 세운 것이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교사 정재면이 부임 조건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지도자들은 고심 끝에 그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로써 명동촌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정신적 기둥으로서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게 되었다.
2-2-1. 명동촌의 첫 번째 기둥으로서 민족주의의 색채는 어떤 것이었을까?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인재를 양성하고자 북간도로 이주하여 명동촌을 설립한 동기가 말해주듯, 민족주의는 명동촌을 이끌어간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문익환의 어머니 김신묵 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작문시간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다는 말이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할 만큼 그 정신은 압도적이었다. 학교의 체육시간마저 독립을 위한 군사훈련의 기회가 될 정도였다. 실제로 명동촌은 숱한 독립지사들이 드낙거리는 중요한 민족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2-2-2. 명동촌을 세운 기둥으로서 민족주의는 실학과 동학에 그 젖줄을 대고 있었다. 이주한 가문을 대표하는 이들은 모두 유학에 정통하였지만 그들이 체화한 유학은 봉건체제를 뒷받침하는 고루한 성리학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넘어 민중의 실생활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둔 실학의 후예들이었다. 그 가문의 지도자들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시간 외에는 실제로 농민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 땔감을 등짐으로 나르고, 물지게를 짊어지고, 외양간의 쇠똥을 치우고, 집의 온돌을 고치고 벽을 바르는 일을 모두 손수 감당하였다.
2-2-3. 이러한 실생활 속에서 형성된 명동촌의 민족주의를 ‘민중적 민족주의’라 부르는 데 주저할 까닭은 없다. 이 개념은 같은 명동촌의 경험을 공유한 안병무 선생에 의해 훗날 정착된 것이지만, 명동촌의 기둥으로서 민족주의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2-3-1. 명동촌의 또 하나의 기둥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성격은 어땠을까? 처음 명동촌에 기독교 신앙을 전해 준 정재면 선생은 서울 상동청년학원에서 기독교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근대학문을 익히고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파송으로 명동촌에 오게 되었다. 명동촌의 지도자들은 신학문의 필요성에 절감하여 정재면 선생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의 능력과 인품에 대한 신뢰 또한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몫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명동촌에는 점차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고, 명동촌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주요 가치들을 받아들여 내면화하게 되었다. “성서 안에 담긴 사랑, 정의, 평등, 해방과 같은 사상이 애국심에 불타고 있는 청년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여기서 북간도 명동촌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은 매우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2-3-2. 여기에 더하여 명동촌의 기독교 신앙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또 하나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캐나다 선교부의 영향력이었다. 초기 한국 선교에서 선교사들간의 경쟁을 조정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었고, 그에 따라 캐나다 선교부가 함경도지역과 북간도지역을 선교지역으로 맡게 되었다.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이 대체로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였던 반면 캐나다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들의 개방적 신앙과 신학은 교육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하여 여러 동학들이 은진중학교에서 김재준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문익환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캐나다 유학으로 근본주의 신학에서 탈피하게 된 것도 그 영향하에서였다. 그 개방적 신앙과 신학의 영향하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가치들을 삶의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참여신학으로서 한국의 진보신학은 중요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명동촌의 선구자들에게서 기독교 신앙은 세계를 향한 문이자 동시에 수난당하는 민중을 향한 해방의 복음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3. 북간도 지역 신앙의 유산

3-1. 여기서 우리가 새삼 확인해야 할 것은 북간도 명동촌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문익환 목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어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 그들은 종교를 조국광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에 진지한 자세로 다가선다. 그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라도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구도 정신이 있었다. 신교육의 모체인 기독교를 소화하다 보니 기독교와 유교를 민족애라는 용광로 속에 완전히 녹여서 새로운 세계관, 인간상을 찍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3-2. 훗날 민중신학을 정초한 또 한 분인 서남동 목사는 ‘두 이야기의 합류’를 말했다.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민중전통과 한국 민족사의 민중전통이 당대 한국 그리스도인의 실천 가운데 합류한다는 의미였다. 민중신학은 1970년대 한국의 민중현실로부터 형성된 것이지만, 그와 같은 고유한 신학적 통찰을 가능하게 했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바로 이와 같은 명동촌의 선각자들에게 그 뿌리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익환을 비롯해 문동환, 안병무 등 민중신학을 정초한 이들의 공통 경험은 오랜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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