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너 자신을 위해서 - 창세기 12:1~4[이근복 목사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8-09-16 14:37
조회
8740
2018년 9월 1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너 자신을 위해서
본문: 창세기 12:1~4
이근복 목사(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1. 반갑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에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전에 우리 교회의 최윤주/홍승환 부부가 출석하여 와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속한 예장통합이 총회에서 임보라 목사님을 이단시한 것 참 죄송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크리스챤아카데미는 고 강원용 목사님께서 1965년에 건립하여, 대화운동과 중간집단교육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성숙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다. 저는 3년 전에 원장으로 임명받아, 새롭게 교육으로 한국교회와 사회를 혁신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살림교회가 천안에 이렇게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미있는 예수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만만치 않지요?
저는 1983년에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8년간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들과 같이 지내고, 1991년에 교회를 개척하여 이듬해 새민족교회와 통합하여 17년간, 작은 공동체를 섬겼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우들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생활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상생활도 만만치 않은데, 교회에서 여러 직분을 맡아 봉사해야하고 때때로 시위현장에 나가고, 삶의 현장에서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 힘 써야 하는, 3중고/ 4중고를 감당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저는 목회자와 신도가 같이 목회하는 ‘공동목회교회’를 지향하였기에, 구역장은 구역원들을 심방하는 사역을 하고 때로 설교도 해야기에 힘들다고 토로하는 교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2. 여러분! 긴 인생을 초지일관하여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사서 고생하나?” “이런다고 바뀌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와 정치, 경제를 보면서 좀 답답하지요?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바꾸었는데, 나라다운 나라로 나아가는 것이 참 지지부진합니다.

제 주변에, 그동안 같은 길에 동행하였는데, 나이들어 딴 길로 빠진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제가 총회에 참석하여, 명성교회 세습에 대한 재판을 뒤집는 일을 하였는데, 이전에 에큐메니칼운동을 열심히 하던 분들이, 명성교회를 위해 현장에서 로비하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저렇게까지 하며 살아야 하나? 참 추하다.
그런데 나도 잘못하면 저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백세 시대가 된다는 데, 신앙적 가치를 둔 삶의 여정을 어떻게 하면 끝까지 마칠 수 있을까? 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오늘은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선 아브라함의 삶을 나누려고 합니다. 큰 결단으로 삶의 터전을 떠남으로 귀한 것1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긴 삶의 여정을 바르게 사신 분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여,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을까요? 그 출발은 어떻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중, 창 12:1은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혹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를 아시나요? 제가 몇 번 만난 분입니다.
이 분은 성서와 종교, 언어와 인간을 인문학적으로 연구하여 여러 책을 냈습니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여정, 심연, 수련> 등 좋은 책들이 있는데, ‘신의 위대한 질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배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고대 중동의 문헌과 언어를 연구한 까닭에, 구약성서의 원어인 히브리어의 의역을 통해 성서를 더 깊이 있게 해석합니다.
이분이 창 12:1을 원어의 뜻에 따라 의역한 것은, 참 새롭고 의미심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네가 마련한 삶의 터전인 이 땅, 너의 이익집단이 있는 고향, 그리고 네가 출세하는데 기반이 되는 아버지의 집을 버려라. 그리고 내가 네게 보여줄 새로운 땅으로 가라.”
그런데 여기서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라는 말씀이 맨 앞에 나오는데 참 뜻밖이지요?
어느 성서에도 나오지 않지만 원어의 의미를 따라 해석한 것인데,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평생 일구어놓은 삶의 안전장치와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라고 명령함으로, 그가 자기와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잘 살고 있는 땅과 태어난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새로운 땅으로 가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바로 여기 ‘너는 네 자신을 위하여“라는 배 교수의 의역에, 떠남의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결단은 나 하나님이나 네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 아브라함, 네 자신의 인생을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게 떠남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니, 떠날지 말지 네가 스스로 결정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너 자신을 위하여?” 참 이상하지요? 그는 지금 아주 잘 살고 있어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 조상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부유한 도시국가였는데 아버지 데라가 거길 떠납니다. 새로 정착한 하란도 유프라테스강 근처 무역이 성했던 곳으로, 거기에 터잡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안정된 삶을 다 포기하고 홀연히 떠나는 것이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지금이면 주식, 펀드 사고 통장을 만들겠지만, 그 때는 보석이나 챙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시 유목사회에서 땅, 고향, 아버지 집을 포기하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당시 범죄자를 처벌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이었지요. 사형!!
그러니 지금 사는 곳에서 떠나는 것은 손해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길인데, 하나님께서 왜 이 결단이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러분! 왜 이것이 아브라함을 위한 것인지, 그 인생의 과정과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지요.
75세 나이에도 안정성을 박차고 막대한 손해와 목숨을 담보한 미련한 모험을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이스라엘의 새 역사를 연 존귀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감히 결단한 결과, 지금도 ‘믿음의 조상’이란 최고의 칭송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아들 이삭을 바치는 장면도 참 감동적입니다. 아버지의 신앙을 배운 아들 이삭의 결단이 더 아름답습니다. 김삼환 목사처럼 재산을 세습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물려준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을 거부하고 하란에 그냥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재산많은 부자, 좋은 할아버지, 인자한 노인 정도로 생을 마감했겠지요.
그러나 떠나고 버림으로 하나님과 견고한 관계를 맺으며 존귀한 삶을 영위하였고, 마침내 믿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떠남으로 삶과 믿음의 정체성이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떠남의 결정은, 결국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4. 교우 여러분! 출애굽 해방의 지도자 모세의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 동족을 사랑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이집트 왕궁의 안락한 인생을 포기하였습니다.
졸지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목동으로 잘 정착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아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 때 모세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저는 당신의 이름도 모릅니다. 저들이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저는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해방의 지도자가 되길 거절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차압했습니다.
결국 모세가 결단하여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해방의 여정을 감당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신명기 34:10-12에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보실까요? .................
그러니 모세의 결단도 하나님이나 이스라엘 동족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5. 여러분! 우리가 누굴 위해 살고 사회와 민족,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족과 자녀, 교회와 선교,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 는 헌신은 참 소중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귀한 일들을 힘들게 감당하시는데, 오늘 말씀에 비추어보면 어떤가요?
이것 모두 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은혜’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결코 다른 사람이나 사회, 국가, 교회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희생했다고 여기면 보상을 기대하게 되고, 보상심리가 작동하면 문제가 야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희생했으니 보상받아야겠다는 의식이 싹트면, 결국 그 인생을 삐뚤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명성교회 세습사건의 신앙적인 뿌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장총회에서 명성교회 세습을 합리화하고자, 헌법위원회가 세습방지규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총대들이 나서서 표결하여 6:4로 거부하자, 그 다음날 명성교회 새벽기도회에서 김삼 환 목사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교회 대물림은 기업을 물려주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물려주는 것이다. 개척을 안 한 목사 는 개척교회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난과 환난을 모른다. 한 생명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잠을 못자고 잘 못 먹는 게 개척교회 목사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내가 고생을 하였으니, 이 명성교회는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지요.

젊은 날에 가난한 이들, 민족통일, 민주주의를 위해 열심히 활동한 이들 중에 나이 들어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이 있는데, 자기 활동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대가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불평하고 욕심 부리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인생을 망치지요.

6. 몇 년 전, 교회협 교육훈련원장 시절, 총회 국장에게, 당연한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화가 남.
저도 모르게 “내가 에큐메니칼운동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 있다고 이러느냐?”고 말했는데, 그 국장의 반응이 썰렁했습니다. 제 말에 공감하지 않고 반발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에큐메니칼운동에서 많이 누렸는데, 왜 그러냐?는 반응이었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반응할까? 내가 뭐 좋은 것을 얻었다고 ... 여지껏 너무 힘들기만 했는데...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제 대학시절의 노동자야학, 기독학생운동, 민주화운동, 신학교졸업후 산업선교, 새민족교회 17년 사역, 전국정의평화목회자협의회 총무, 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운영, NCCK 교육훈련원장, 다 저에게 은혜였습니다.
좀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사역들이 다 제 인생을 빛나게 한 것이지요.
만약 다른 길을 갔었더라면, 제 인생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앙과 목사의 정체성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성공만 추구하는 목사가 되었겠지요. 의미있는 사역하지 못하고 나이만 먹었을 것! 지금도 그런 말을 한 제가 부끄러워집니다.

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살림교회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출애굽한 것입니다.
출애굽 ‘EXDOS’란 단어는 호도스(길)과 엑스(로부터)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기존의 삶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드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이집트에서 우상을 섬기며, 노예신세였지만 대충 먹고 살던 삶의 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로운 삶의 길’로 접어든 것이 출애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노예근성과 해방도정의 불편함과 고통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이집트 옛 삶으 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인데, 혹시 우리도 그런 것은 아닌가요?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출애굽했으니, 힘들어도 이 길로 전진함이 생명길입니다.
여기 좋은 공동체와 동행하는 교우들이 있으니, 끝까지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박노해 시인을 아시지요? 가난한 노동자로 사회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7년 여 만에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고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복권하였습니다. 지금은 ‘나눔문화’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 세계를 다니며 생명, 평화, 나눔운동을 전 개하고,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있습니다. 박 시인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의 맨 마지막에, 시집이름과 같은 시가 참 감동적입니다.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들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길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린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여러분!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조난당한 박노해 시인의 일행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추운 밤에 긴 시간, 어둠 속에 나와 들고 선 청년의 호롱불 하나였습니다.
작은 호롱불 하나, 그것이 없었으면 길을 잃고 다 죽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이 시대의 호롱불입니다. 생명과 평화, 진리의 호롱불입니다.
비록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작고 희미하고 때로 꺼질 것 같아도, 살리는 불빛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은, 여러분에게 결단을 촉구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여러분의 인생을 가치있고 빛나게 하시려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때때로 불편하고, 지치고, 힘들고, 혼란스러워도 이런 삶의 길을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더욱 기쁘고 당당히, 자신있게 앞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늘 동행하시며 힘을 주시길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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