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성령의 임재, 사랑의 유대 - 요한복음 14:15~27[음성]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6-09 14:35
조회
18725
2019년 6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성령의 임재, 사랑의 유대
본문: 요한복음 14:15~27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아, 주어진 대로 요한복음의 14장의 말씀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고별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흔히 고별사라 하면 슬픈 느낌이 들지만, 예수님의 이 고별사는 깊은 위로의 뜻과 함께 용기를 북돋아주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 고별사의 요체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이별할 때가 오겠지만, 장차 다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언뜻 봐서 다른 복음서들의 재림 약속과 유사해보이지만, 요한복음 14장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들과 병행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고유한 내용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그리고 그 인격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보혜사(保惠師), 그 본래 뜻은 ‘법적인 보조자, 지지자(변호인)’를 의미하며, 통상적으로 ‘위로자’ 또는 ‘돌보는 자’로 이해됩니다. 살과 피를 지닌 예수와 함께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영으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영은 우리를 위로하고 돌보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선사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본문말씀을 따라가며 그 뜻을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율법조문을 지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곧 사랑의 실천이 그 말씀의 실천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의 대전제는 그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 가운데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합니다. 보혜사 성령, 앞서 그 뜻을 말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시리라는 이야기는, 흔히 이해되듯이 성령에 대해 단순히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본문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곧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해 주시는 영입니다. 그 옳고 그름을 어떻게 알까요? 사랑의 실천이 그 기준입니다. 여기서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은 그분을 안다는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능력과 업적을 강조하는 세상의 질서에 매인 사람은 죽어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것을 절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신다는 말씀의 참 뜻입니다.
18절 이하의 말씀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표현으로 그 현실을 말해 줍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고아처럼’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유대가 완전히 끊어져버린 상태입니다. 난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렇게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보증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유대 가운데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주시는 방식으로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앞 구절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당신이 곧 보혜사이지만, 당신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다른 형태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선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선포한 말씀이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살과 피를 지닌 몸으로 먹고 마실 것을 함께 나눴던 그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라 하며, 그 까닭으로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포착할 수 있는 시선에서는 사라졌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선포의 대목에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에 관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선포에서 부활과 재림은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 특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따라 생각할 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셨다가 영광 가운데 재림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의 이 선포는, 부활이 곧 재림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 부활과 재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상 동일한 실재를 뜻합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직접적으로 밥상을 함께 나누고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과 같은 형태로는 아니지만, 언제나 그들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그 말씀을 따르는 것, 곧 사랑을 실천하는 그 삶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절대적 존재가 상대적 존재에 말을 거신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아들로 껴안으신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친절하게 말씀해주셨는데, 또 한 제자가 묻습니다. ‘가룟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라는 제자가 물었습니다. 아주 진지한 물음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우리는 부활을 믿고, 재림을 믿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바꿔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사랑의 유대가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의 열쇠입니다.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마침내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배타적 독점 욕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기억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라는 말은, 어느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독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진실을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씀의 뜻대로 그렇게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행하는 사람과 함께 하신다고 본문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응답을 하시고 난 다음에도 또 한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래도 의아해 하는 제자들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아예 알지 못하고 따라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하지만 그 어떤 염려도 없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알고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과연 그 진실을 따라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생기는 불안은 헛된 염려가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부터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동요일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성령께서 과거의 그 말씀, 또한 말씀의 의미가 응축된 과거의 그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억하게 도와주시고, 그 진실을 따라 살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따라 실천하는 삶의 가능성입니다. 기억하고자 한다면 기억할 수 있고, 따라서 그 기억이 간직한 의미를 따라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망각은 노예의 길이지만, 기억은 구원의 신비이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 바셈’에 새겨진 경구로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신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끄신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살과 피를 지닌 내 몸뚱어리를 보지 못한다고 불안해하거나 염려할 것 없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함께 하시며 일깨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시공간을 넘어서고 특정한 대상을 넘어 언제나 우리에게 진실을 향하게 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고, 마침내는 궁극적 구원을 누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명백히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한정된 사람들에게 경험된 사건조차도 시공간을 넘어 모두의 경험으로 돌릴 수 있는 능력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직접 겪지 않았어도,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에 공감하는 능력 덕분입니다. 성서는 그것이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표징이라고 일깨워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도달할 현실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평화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세상의 평화, 곧 ‘팍스 로마나’ 또는 ‘팍스 아메리카나’와는 다른 ‘그리스도의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어떻게 다를까요? 힘의 우위에 의한 평화가 아닙니다. 사랑으로 이루는 평화요, 정의로 이루는 평화입니다.
흔히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때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 역시 평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소극적 평화일 뿐입니다. 보다 적극적 의미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삶 전반에 폭력이 사라진 상태를 뜻합니다. 이 때 평화의 반대말은 폭력입니다. 그 평화는 차별과 혐오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 평화는 진정한 평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란 일상의 삶의 영역에서 체감하는 평화입니다. 근심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떨까요? 일상의 삶이 전쟁터와 같지 않나요? 총포가 날지는 않지만, 총포처럼 몸이 뛰어다니며 총포와 같은 막말을 들으며 일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자칭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자가 막말로 우리의 삶의 평화를 깨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삶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삶,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과 사랑의 유대 가운데 있는 삶, 그러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을 나누는 삶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삶은 누군가를 배척함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조건에 있든 고귀한 생명을 누리는 모든 존재가 서로를 껴안는 삶입니다. 거기서 사람은, 모든 생명은 진정한 안식을 누립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우리는 우리 교회 공동체의 일꾼을 뽑는 과정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그 일과 관련하여 저 지난 주일 우리는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지표로서 ‘친밀한 공동체’, ‘민주적 공동체’의 의의를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지표 가운데 첫머리에 내세워진 ‘영적 공동체’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 선포하고 있는 말씀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지표입니다. 고립되어 있는 ‘나’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믿고 사랑의 유대 가운데 있는 ‘우리들’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주는 오늘 말씀의 의미, 그것입니다.
지난 일주일 우리가 염려 가운데 보내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왜 왔다 갔다 했을까요? 그것은 누가 선택되어도 좋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능력이나 업적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나설 수 있다면 누구든 맡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더 긴 해석을 자제하겠습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굳게 지키며, 저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허해지고,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궈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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