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아궁이 들풀의 아름다움 - 마태복음 6:26~33[송길룡 교우 / 음성]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19-10-14 11:05
조회
63393
2019년 10월 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아궁이 들풀의 아름다움
본문: 마태복음 6:26~33
송길룡 교우



1931년에 발간되어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나중에 노벨문학상도 받게 된 <대지>라는 소설을 잘 아실 겁니다. 미국 작가 펄 벅의 작품입니다. 어려서 선교사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가서 그곳을 고향으로 알고 살 만큼 중국을 사랑한 작가입니다. <대지>는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중국의 농민가족이 주인공인 소설입니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 중국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펄 벅 작가는 중국을 더 이상은 다시 찾아갈 수 없게 됩니다. 대신에 펄 벅 작가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 혼혈아 복지사업을 전개하면서 작가는 한국의 여러 군데를 둘러보다가 현지의 어느 농부로부터 큰 감명을 받는 에피소드를 남기게 됩니다. 짐수레를 끄는 소와 나란히 걷는 한 농부의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농부도 한짐 가득 지게를 지고 걸어가고 있었거든요. 농부 왈, “하루종일 소가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짐을 나눠지고 가야지요.”

이와는 다른 이야기도 하나 더 말씀드려봅니다. 테러리즘은 목적 불문하고 폭력성 때문에 부정적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른바 ‘에코테러리즘’은 기후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편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2013년에 소개된 미국의 독립영화 <이스트>는 1980년대 실제로 활동했던 급진환경단체를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테러진압 정부기관 요원 한 사람이 노숙인으로 위장하고 그 단체에 잠입해 들어가 수사를 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 속의 장면 중에 아주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새로이 합류하게 된 이 신참내기에게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식사 퍼포먼스가 펼쳐집니다. 기다란 식탁에 나란히 앉은 모든 멤버들은 팔과 손을 못 쓰도록 묶은 구속복을 입은 채로 음식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대장은 신참에게 손을 이용하지 말고 음식을 먹어보라고 말합니다. 신참은 잠시 생각하다가 행동에 옮깁니다. 커다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음식을 떠다가 자기 접시에 부어놓고 고개를 수그려 혀로 핥아먹습니다. 그걸 보고서 다른 멤버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둘씩 짝지어 한쪽이 숟가락을 물고 다른쪽을 먹여주며 이 동작을 교대하고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두 장면은 이기주의라는 것이 결코 자신의 욕심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데에서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공존의 의식이 먼저 나타나지 않는 한 아무리 욕심 없이 산다 해도, 상식에 맞게 생활한다 해도 그것은 어쨌거나 이기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먼저’ 짐을 나눈다는 것, 서로를 ‘먼저’ 먹여준다는 것을 맨처음부터 떠올리지 못한다면 여전히 관계를 잃은 고립된 자아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이 장면들에 비추어 다시 해석해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성서 속에서 기본소득의 전거를 찾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하며 궁리하다가 발견하게 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신앙에서 기본소득 하면 가장 기본적인 게 이거다! 하는 취지로 인용하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라는 한 마디가 일으키는 울림은 아주 큽니다. 자기자신의 일에 매몰되어 살고 있는 인간의 귀를 때리는 일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살펴보라, 자연을 살펴보라는 말씀으로 이기적 정신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수확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먹거리를 제공받고 있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농사를 지어 먹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깨는 이야기입니다. 새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대로 받는 먹거리가 있는데 어찌 새보다도 더 귀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옷 짓는 일을 하지 않는 백합화도 솔로몬의 영화로운 모습보다 훨씬 더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것은 이미 하나님이 그렇게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내일 아웅이에 불태울 오늘의 들풀도 아름답게 꾸미시는 하나님의 돌봄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으로서 먹고 입고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대가 없이 제공받은 천부의 권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생명에게 기본소득을 주시고 계십니다. 다만 인간들만큼은 각자 주어진 생명의 양식을 이런저런 제도와 규칙으로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각자 돌아갈 삶의 몫을 막고 있을 뿐 아니라 빼앗기조차 하고 있습니다. 기본소득 정책을 미래에 실현한다면 새로운 정책을 도입한다는 측면보다는 사실 애초에 누렸던 정책을 이제야 다시금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기본소득을 주셨지만 우리는 아직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기본소득은 그중의 작은 일부분에 해당합니다. 기본소득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눠주시는 삶의 몫에 대해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나가기 위한 첫 시도로서의 성격이 있습니다.

아궁이 앞에 놓은 들풀이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들풀의 삶의 끝자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아름답게 가꾸셨기 때문입니다. 들풀을 이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이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눈부신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은 먼저 사람의 삶을 챙겨내신 하나님의 뜻을 되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자신만의 일에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삶과 다른 생명들의 삶을 둘러보고 모두의 삶을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짐을 나누고 서로 먼저 돌보는 세상을 꿈꿔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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