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금식, 모든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위하여 - 이사야 58:6~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2-24 23:23
조회
8789
2021년 2월 24일(수) 오후 5:00 서울고용노동청 앞
아시아나KO 노동자와 함께하는 사순절 금식기도회중 기장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 주관 기도회
제목: 금식, 모든 사람의 정당한 권리를 위하여
본문: 이사야서 58:6~8



“사람이 먼저다.” “노동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 촛불의 염원으로 등장한 현 정부는 그 정신을 표방하며 국민적 지지를 안고 출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째 접어든 지금 그 말뜻이 담고 있는 알맹이는 어디로 갔을까요? 모두가 빈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면서 대통령은 “누구라도 덧없이 보낼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방역에 임하고 있다는 의지를 밝혔고, 더불어 그로 인해 가속화되는 사회적 위기에 대해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깨겠다.”고 그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방역 그 자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사회적 불평등과 위기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위기로 우리사회 여러 분야의 산업현장이 어렵고, 그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으며, 특히 항공업계 역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도 고용유지지원금까지 지급해가며 위기를 함께 해쳐나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나KO는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사 자부담금 25%가 아까워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지 않다가, 정부가 일부 자부담 비율조차 내려하지 않는 기업을 대상으로 노동자 1명당 3개월간 월 50만원의 휴업수당을 지원해주는 정책을 내놓자 뒤늦게야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을 신청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지난 해 5월 11일 희망퇴직도, 무기한 무급휴직도 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호소했고,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도 그 해고의 부당성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측은 복직이행과 함께 해고기간 동안 임금상당액을 지불하라는 중노위의 판결을 거부하고 수천만원에 달하는 이행강제금까지 내가며 지난 1월 15일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국민의 피땀 어린 세금으로 지원을 받은 기업이, 그것도 고용유지를 위한 지원금을 받은 기업이 그 취지에 따른 책무를 걷어치워 버리고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해버린 사태도 용인할 수 없거니와, 이에 대한 정부의 태도 또한 용인할 수 없습니다. 엄중하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사태가 아닙니다. 이런 사태가 계속 용인된다면 우리 사회는 심각한 신뢰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며, 결국은 불행한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억울하고 부당한 사태 앞에서 통회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뜻, 더불어 호소하는 뜻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따라 우리는 더불어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금식의 참뜻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성서의 핵심 메시지를 간결하게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진 말씀이며, 마땅히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말씀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스스로 거룩한 척 금식하며 겉치레뿐인 종교적 헌신에 빠지고, 빈말을 일삼는 이들에게 선포합니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 아니냐?”
모든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성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정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밑바탕에는 노예살이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앙을 형성한 가장 원초적인 경험입니다. 그 누구라도 타의에 의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존중받으며 저마다의 삶을 누려야 한다는 지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계속 선포합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은 인간사회에 이뤄져야 할 온전한 정의와 연대를 일깨워줍니다.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연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자유는 각기 개인의 의지만으로 충족되지 않습니다. 더불어 정의를 이루고 연대할 때 그 자유가 보장됩니다. 사회적 정의와 사람들 사이의 구체적 연대는 저마다의 존엄하고 자유로운 삶의 보장을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오늘 예언자 이사야의 선포는, 그렇게 성서의 핵심 메시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의 요체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지향해야 할 바를 일깨워 줍니다. 성서가 인간의 삶을 위한 보편적 가치를 일깨워주는 유산으로서 의의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진실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허망한 어떤 것을 믿지 않습니다. 바로 사람을 살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살리는 그 진실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따르고 이루고자 하는 믿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국가의 법적 절차마저도 보장하고 있는 그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넘어 그 자체로 범죄행위입니다. 이미 공적 책임을 부여받은 기업이 그렇게 억지를 부리면 안 되는 일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요구합니다. 그렇게 억지를 부리며 사실상 범죄행위를 벌이고 있는 기업에 대해 정부가 엄중하게 문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회복하고, 당당하게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사태, 아시아나KO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의 문제, 우리의 사회의 공통 과제입니다.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깨겠다.” “노동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 “사람이 먼저다.” 이 말들이 겉치레뿐인 빈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허망한 종교적 겉치레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실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그 아픔을 치유 받고 저마다 당당한 삶을 누리는 사회를 위하여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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