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 부조리한 상황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 욥기 19:13~2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3-21 14:36
조회
10640
2021년 3월 21(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이 부조리한 상황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본문: 욥기 19:13~27



욥기는 어떤 대목을 마주하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종의 희곡대본과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에 특정 본문이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의 이야기인지 우선 분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대목이든 심각하고 난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특정 본문을 따로 떼어놓고 마주하게 되면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데 묘미가 있기도 합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서는 이미 십 수 년 전 1년여에 걸쳐 욥기를 공부한 적이 있고, 또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낸 적이 있기에(최형묵, <반전의 희망, 욥 - 고통 가운데 파멸하지 않는 삶>, 2009) 본문을 마주하며 느낄 수밖에 없는 일차적 긴장감은 상당히 해소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제 본문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헤아리는 과제에 더 충실할 수 있는 셈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19장의 말씀은 누구의 이야기이고 그 내용의 요체는 뭘까요?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는 것처럼, 19장의 내용은 주인공 욥의 탄식의 한 대목입니다. 친구들과의 공방전을 벌이는 중 세 번째 공방전을 벌이는 대목입니다.
다시 한 번 욥의 이야기를 환기하면, 의인 욥이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고난을 겪게 된 데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욥은 소유한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병든 상태에 이릅니다. 이를 두고 친구들이 찾아와 처음에는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이야기는 점차 논쟁으로 번집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몹쓸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항변합니다. 처음 위로의 말을 건넸던 친구들은 욥이 고통을 겪는 데는 분명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경구 역시 그 맥락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한동안 창대했지만 지금 쇠락한 것을 보니 욥이 삶을 잘못 살았다고 정죄하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그것이 친구들의 주장입니다. 욥은 시종일관 그에 대해 항변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삶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하나님께 따져야겠다’는 것이 욥의 주장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렇게 항변하는 가운데 지금 자신이 처한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친구들의 주장에 대한 욥의 항변은 계속됩니다(13~22절). 욥은 얻어맞는 고통보다 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더더욱 괴롭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몸마저 병든 신세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 모든 것보다 더 극심한 고통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격리, 소외의 고통입니다. 뿌리뽑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 지금 욥이 처한 상황입니다. 가족을 잃었을 뿐 아니라 아는 이들마다 낯선 이가 되었고, 친척들도 자신을 버리고 친구들도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식객과 종들도 주인인 자신을 낯선 사람으로 대하고, 아내조차 혐오하고 친형제들도 역겨워하고 아이들까지 무시하는 지경입니다. 평소에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상황입니다. 모든 관계가 파탄난 상황입니다.
고통을 겪는 욥에게 위로랍시고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를 한 것이 이차 가해에 해당한다면 지금 상황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자신이 마지막 보루로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마저 부정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완전한 나락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관계의 파탄은 인간존재 자체의 부정입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 있을 때,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정당하게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욥은 지금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부정당하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고통보다도 더 가혹한 고통입니다. 욥은 지금 곁에 있는 친구들을 향해 그들만이라도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호소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사람들보다도 더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존재 자체마저 부정 당하는 상황 속에서 욥은 지금 보이는 현실에서는 더 이상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마저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언젠가는 덧없이 사라지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욥은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의 기록이 단단히 새겨져 만천하가 알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 기록이 비망록에, 아니 바위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왜일까요? 지금 자기가 고통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다 하더라도 또 어떤 사람이 자신과 같이 불행한 일을 겪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몸은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억울함은 풀어져야 한다는 바람을 포함하는 기대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욥의 신원은 억울함을 겪는 모든 사람의 신원입니다(23~24절).
그러기에 욥의 탄식은 탄식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강렬한 구원의 호소로 바뀝니다. 마치 허공을 향해 외치는 듯한 신원의 호소가 강렬한 구원의 호소로 바뀝니다. 자신의 육체가 썩은 다음에라도 하나님을 만나 뵐 것을 갈망합니다(25~27).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 뵙고 억울함을 토로하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항간의 이야기는 다 거두고, 진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캐묻고야 말겠다는 결의입니다. 요즘 말로 멘탈이 강하다고 할까요? 욥은 정말 집요한 사람입니다. 친구들이 그럴 듯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 하나도 믿을 게 없으니, 끝내 하나님의 진실을 스스로 확인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이 마지막 호소는 욥의 매우 분명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친구들의 거룩한 신학적 언어에 갇힌 하나님과는 다른 진실한 하나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나타나 친구들의 허위를 폭로하고 친구들을 심판할 것이라 확신합니다(28~29절).
오늘 본문말씀의 앞 대목에서 욥은 친구들의 무정한 신학, 요지부동하는 신학을 질타하며 항변합니다(1~5절). 욥이 암만 호소해도 친구들은 욥의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의 말을 빌미 삼아 더더욱 심하게 욥을 괴롭히며 자신들의 입장만을 강변합니다.
그 요지부동한 신학이 뭘까요? 불의한 자만이 불행에 빠진다는 신학입니다. 만약 욥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인도 고난 받는다는 것이 명백한 현실이라면 그들의 신학은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 분투합니다. 욥의 고통은 자신들의 그 신학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본보기일 뿐입니다. 친구들에게는 지금 자기 눈앞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고통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교리적 주장의 타당성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무정한 신학의 실체입니다. 오늘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무정한 신학의 선포를 귀가 따갑게 듣고 있습니다. 특별히 재난이 일어날 때, 또는 사회적 소수자를 향하여 선포되는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의 선포가 그 무정한 신학의 본보기입니다.
친구들의 무정함, 그 친구들이 고수하는 신학의 비정함에 욥은 몸서리칩니다. 설령 자신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들을 괴롭히는 일도 아닌데, 어째 그렇게 무정할 수 있느냐고 욥은 부르짖습니다. 그 철옹성 같이 요지부동한 신학을 흔들기 위해 욥은 계속 외칩니다(6~12절).
친구들이 말하는 의미에서 죄를 저지른 바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욥은 그처럼 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신학을 의심해보라는 듯이 자신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자신은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괴롭힙니다. “폭력이다!” 외쳐도 소용없고 “살려달라!” 부르짖어도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태를 보고도 하나님은 방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가혹하게 괴롭히는 것만 같습니다. 폭력으로 두들겨 팰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욥의 이와 같은 부르짖음은 고통을 죄의 결과로, 세상에서의 유복함을 의로움에 대한 증거로 삼는 신학을 의심하라는 촉구입니다. 그 의심이 없이는 새로운 가능성은 없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이 항변을 전제하면, 오늘 본문말씀의 뜻은 이렇게 집약됩니다. ‘이 부조리하고 가혹한 고통의 상황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야기이냐, 그럴 리 없다. 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 따져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욥의 그 집요한 물음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욥의 항변, 그 집요한 물음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갖고 있는 온간 편견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라는 촉구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내 앞에, 우리 곁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고통을 응시하고 그렇게 고통을 겪는 사람과 함께 하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뛰어난 신학자들과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선포하는 그 목소리가 과연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지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 피조물의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는 신학과 설교가 과연 진실한 것이냐 문제 삼는 것입니다. 인간이 처해 있는 부조리한 상황과 그 상황 가운데서 겪는 고통의 현실을 외면한 신학과 설교가 과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일 수 있느냐는 일갈입니다.
그 신학은 부조리하다고 욥은 항변합니다. 그 부조리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신학과 설교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진정한 신앙인의 태도이겠느냐는 항변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의심하고 항변하는 것은, 인간 삶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는 길을 열어주며 나아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길을 열어 줍니다. 그것은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더불어 부조리한 세계의 실상을 인식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인간 삶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해 줍니다. 욥의 항변은 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한갓 자기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말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허위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 허망한 말들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절절하게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현실을 호소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고통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렇게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마땅한 도리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고통을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에 응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을 살 만합니다. 그렇다면 고통이 인간이 파멸의 길로 몰아넣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단련시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바로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진실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영화 <미나리>가 화제입니다. 수없이 많은 평들이 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겹쳤습니다. 31년간 같이 산 사람입니다.^^ 자기 꿈을 이루겠다고 흥분한 남편을 보고 어처구니없고 어이없어 하는 그 표정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영화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는 이유로 그렇게 흥분하지만, 돈도 안 되고 쌀도 안 나오는 일로 동분서주하며 자기 꿈을 향해 내달리는 사람을 보고 딱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영화에서 그 팽팽한 긴장은 재난을 겪은 후 사라집니다. 남편의 자만도 아내의 불평도 사라지고 낯선 땅에 자리잡고 생명력을 키워가는 미나리를 응시하게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아주 짧은 엔딩입니다.
단지 이민자의 신산한 삶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주 보편적인 인간 삶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공감하였습니다. 그 신산한 삶에 재난까지 당하였으니 가혹한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그 재난이 파멸로 치닫는 계기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로 그려지고 있어 안도했습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발견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요? 원치 않은 재난이요 고통이겠지만, 그것을 통해 서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갖게 되었다면 그 삶은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만일 그 재난을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천박한 신학의 소산일 뿐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누리기보다 오히려 고난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된다는 진실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는 본문말씀의 진실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진실을 신실하게 믿음으로써 세상에 진정한 위로와 희망을 주는 교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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