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일상의 삶 한 가운데서 - 요한복음 21:1~1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4-11 15:32
조회
12203
2021년 4월 11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일상의 삶 한 가운데서
본문: 요한복음 21:1~14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성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이야기들을 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일상의 삶 한가운데서 어떻게 체험되었는지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과 제자들이 처음 경험한 부활사건의 극적인 성격을 말해 줍니다. 결코 죽임에 내맡길 수 없는 삶에 대한 각성, 죽음과 같은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의 전환이 갖는 극적인 성격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체험을 했다면, 당연히 그 다음 삶은 역시 놀라운 전환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역사가 그렇게 단숨에 혁명적인 전환을 이뤄내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혁명적 사건이 일어난 후 모든 것이 일순간에 변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혁명의 시기가 있으면 반동의 시기가 있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지그재그 걸음 끝에 혁명의 뜻을 공고화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질적으로 달라진 삶의 현실을 비로소 체감하는 것은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부터입니다. 예배당에서 감동을 받고, 문을 나서는 순간 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일상의 삶 가운데서 그 감동의 기억을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달라진 삶의 현실을 체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인간 삶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밝히고 있는 내용 이후에 마치 부록과 같이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20:31)이라고 그 목적을 밝힌 다음,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여인들에게 말고) 세 번째로 나타나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자체가 복음서 가운데 가장 늦지만, 그보다 더 훗날 요한의 제자에 의해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회의 시대가 본격화된 어느 시점일 것입니다.

디베랴 호숫가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디베랴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이름, 곧 로마식 이름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로마식으로 부르는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그것은 제자들이 처한 당대 상황에 대한 복선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어쨌든 제자들이 그 호숫가에 모여 있던 상황은, 본문의 맥락으로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이미 그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난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부인하거나, 부활하신 예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상황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를 다시 시인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그러자 나머지 제자들도 베드로를 따라 나섭니다. 베드로의 이 말과 행동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모든 것을 내팽개쳐 버리고 과거에 했던 대로 고기잡이에 다시 나서겠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적극적 행동을 의도한 것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말 그대로 고기잡이에 나서겠다는 말이긴 하되, 그 의미를 넘어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행동에 나선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과거의 일로 되돌아가 버린 것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은 이미 이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 예수님을 시인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행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과거의 일상생활과 같은 모습을 띠었으되 그 생활 가운데서 특별한 사명을 감당해보려는 의지의 표현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는 동안 더불어 생활했지만, 이제 예수님과 같이 있지 않는 상태로 각자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서의 결단과 의지의 표현인 셈입니다. 교회의 시대 모습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각자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증언하는 몫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제자들의 삶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밤중에 배를 끌고 나가 고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통상 밤중에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날 밤중에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묻습니다. “무얼 좀 잡았느냐?” 제자들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일언반구 없이 그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고기가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잡혔고 그 수를 세어 보았더니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오른쪽은 통상 ‘행운’을 의미합니다. 우리말에서는 ‘바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와 같은 이가 밤새 그물을 던져도 고기 한 마리 낚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따라, 자신들 나름의 이치를 따라 고기잡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이전의 그들의 경험과 그들이 숙지하고 있는 이치가 더 이상 새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 상황을 말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따라 비로소 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것은, 제자들의 경험과 통념을 넘어서는 지혜, 다시 말해 그저 밥벌이에 지나지 않는 노고와는 다른,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지혜가 예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더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말씀에 두 말 하지 않고 따른 제자들의 자세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인습적인 경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데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잡힌 물고기가 153마리라고 했는데, 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의 완전성을 상징합니다. 성서에서 등장하는 상징적 숫자 가운데 7이나 10 또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12나 그 배수는 완전한 숫자를 의미합니다. 153은 1에서 17까지를 더한 수를 말하는데, 여기서 17은 완전한 숫자인 10과 7이 합쳐진 것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낚도록 해 주신 고기, 곧 교회공동체의 완전성을 나타냅니다. 흥미로운 것은 고기가 그렇게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룬 교회 공동체의 완전성을 다시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대목 중간에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알아차린 제자와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바다로 뛰어든 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요한과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 부록이 필요했던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할 만큼 중요한 장면입니다. 일상의 삶 한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차린 제자와 알아차리자마자 곧바로 반기는 제자의 모습, 그것은 깊은 통찰력과 단호한 행동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경합관계라기보다는 상호보완의 관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 교회에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아침 식탁에 초대합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온기가 가득 배인 그 말씀과 함께 빵과 생선으로 장만된 아침 밥상이 제자들 앞에 펼쳐집니다. 이 장면은 다시 나타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이야기의 절정입니다. 다시 밥상을 나누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것은 예수님 생전에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일이며, 이후의 제자들이 이뤄야 할 삶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성찬을 나누고, 공동식사를 나누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몸과 분리된 영혼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하나님 나라, 곧 밥상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표상되는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를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이루고 증거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과 다시 밥상을 나누는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했을까요? 지난 해부터 코로나19로 그 밥상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아쉽습니까? 거꾸로 그 소중한 의미를 지금 우리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중요한 진실을 다시 환기합니다. 부활을 경험했음에도, 일순간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곤고한 삶을 겪어야 했던 제자들의 처지에서 다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 상황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놀라운 진실을 일깨워줍니다.
기쁜 일을 경험하고 잔치를 벌일 때 심정은 늘 우리의 삶이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그와 같이 살기를 결단합니다. 감동적인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감격을 새까맣게 잊고 맙니다. 어느 순간 또다시 그다지 변한 것 없이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인간 실존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들을, 오늘 본문말씀은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인습적으로 되풀이되는 저마다의 수고에 의존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환기하고 그에 의존하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을 경험했으되,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은 여전히 죽임의 세력에 매여 있기에 우리가 애써 발버둥을 쳐도 우리는 곤고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따를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일깨워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이를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이 말씀은 일상에 매몰된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는 ‘화두’와도 같습니다. 일상에 묻혀 관습과 상식을 따르는 우리를 다시 일깨워, 망각하지 말아야 할 중심을 다시 세워주는 말씀입니다. 말없이 따르는 제자들의 태도, 그것은 자기의 상식과 통념을 고집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열린 마음입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열린 마음, 진정으로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건져내는 진실을 수용할 줄 아는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리고 다시 부활의 체험을 하였을 때, 처음 그 마음을 환기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의 시장과 일부 지역 의원들에 대한 보궐선거였습니다. 불과 1년 전 총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결과였습니다. 보수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일까요? 그 보수로의 회귀를 20~30 남성청년층이 주도한 것일까요? 신중하게 판단하면 보수로의 회귀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현재의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질책과 경고의 의미가 더 큰 것으로 보입니다. 촛불의 염원으로 지지를 보냈고, 더욱이 지난해 총선에서는 무려 의석수 180석에 이를 만큼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촛불의 염원을 이루는 데 무력한 정부 여당에 대한 질책입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보수세력에게 승리를 안긴 것으로 나타난 것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왜곡된 대의구조 탓입니다. 집권여당에게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업자득입니다. 대의구조를 개편하는 것도 제대로 안했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도 그 지지층에 부응하는 정책을 실현하지 못했고, 이번 선거국면에 한정하자면 후보를 내지 않는 것이 나았을 텐데 그 희생의 결기도 없었습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국민들이 권력을 위임해준 뜻, 곧 촛불의 염원을 망각하고 실현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16일이면 세월호 사건 7주년을 맞이하지만, 아직도 그 사건의 진실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책임 소재도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7년째 평범한 일상을 빼앗겨버린 유족들과 시민사회에서 그 진실을 온전히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 진실을 밝혀낼 정보에 접근하는 길마저 막혀 있습니다. 진실을 밝힌다고 해서 아이들이 되살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은, 그 희생으로 다시는 그렇게 덧없이 목숨을 잃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촛불의 염원을 받들지 못한 과오의 단적인 예입니다. 일상의 삶 한가운데서 사람들이 바라는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촛불의 뜻을 여일하게 새기지 못한 탓입니다. 정권교체로 모든 것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그 뜻을 일상적인 정치과정에서 일관되게 실현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태입니다. 그 교훈을 새기지 못한다면 1년 후 더 큰 상처를 안게 될지 모릅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라. 그리고 밥상을 함께 나누자.” 이렇게 집약되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일상의 삶 한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구현하는 과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부활의 진실을 믿고,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믿고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죽임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고, 여전히 허위가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세상 한 가운데 있는 우리 모두에게 진실을 바라고 믿는 마음에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 진실을 저버리지 않는 믿음으로 끝내 우리의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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