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한 목자, 아름다운 공동체의 꿈 - 에스겔 34:11~1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4-18 18:00
조회
12913
2021년 4월 1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선한 목자, 아름다운 공동체의 꿈
본문: 에스겔 34:11~16



‘선한 목자’,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표상입니다. 성서의 세계에서 그 표상은 매우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통치자나 지도자,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표상합니다. 예수님에게까지 연장됩니다. 오늘날 목회(牧會), 목사(牧師) 역시 그 표상이 뜻하는 바를 이어 받고 있습니다. 비단 성서의 세계에서뿐만 아닙니다. 고대 바빌론에서도, 고대 이집트에서도 흔히 등장합니다. 전통시대 우리 사회에서도 통용된 목민관(牧民官)이라는 표현이나 목사(牧使)라는 직책 또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에스겔서의 본문말씀은 그 목자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34장 전체가 예언자 에스겔이 그리는 목자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통치자들을 나타내기도 하고, 오늘 본문말씀에서처럼 진정으로 선한 목자로서 하나님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에 주목해볼까요?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언자 에스겔은 선한 목자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베푸실 일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정확하게 바로 앞에서 선포한 악한 목자들, 곧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을 향한 질책과 대비됩니다.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끈 목자들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친히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끄신다는 선포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은 흩어진 이스라엘의 양떼를 불러 모아 자기 땅에서 먹고 마시게 하겠다고 합니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떼를 구하여 내겠다.”(34:12) ‘캄캄한 날에 흩어졌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을 환기합니다. 주전 587년 유다 왕국의 멸망을 말합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뿐 아니라 이집트와 그 밖의 지역으로도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흩어진 백성을 다시 불러 모아 자기 땅에서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지금 바빌론에 포로로 붙잡혀 가 있는 상태에서 이 예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포로로 붙잡혀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백성에게 진정한 삶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희망의 선포는 이어지는 37장에서 마른 뼈들의 환생을 선포하고 있는 데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희망의 이정표라고 할까요? 장차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아 새롭게 거듭날 백성의 아름다운 삶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목장에서 뛰놀고 쉬며, 좋은 풀들을 뜯어 먹으며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그 아름다운 삶을 이루는 데는 섬세한 배려와 돌봄이 필요합니다. 서로 어울려 사는 그 아름다운 삶을 보장하는 정의의 요구에 부합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목장으로 양떼들을 데려와 살게 할 뿐 아니라 친히 손길을 펼치시어 그 어떤 양떼도 저마다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34:16)
이 말씀은 본문말씀에 앞서 선포된 악한 목자들에 대한 질책과 전적으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34:4) 오늘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16절)은 바로 이 구절과 그 순서상 정반대로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악한 목자들이 악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선한 목자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약자들을 돌보실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성서에서 일관된 매우 중요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존속 여부는 힘의 우열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정의의 실현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진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유다 왕국이 멸망한 것은 국력, 곧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모자란 탓이 아니요 정의가 부재한 탓이라 진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가운데 저마다 삶을 행복하게 누리고 마음을 모을 수 있다면 그 공동체는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강요된 힘에 따라 마지못해 복종하고 또한 힘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배제되는 사회는 자멸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진실을 새삼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 섬세하고 세심한 목자의 배려, 곧 정의를 선포하는 마지막 말씀 가운데 유의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6절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 여기서 ‘멸하겠다’는 것은 히브리어 원문 표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 심하게 느껴진 탓인지 최초의 그리스어 번역본 칠십인역 성서는 그 표현을 ‘지키겠다’로 번역했습니다. 지켜서 힘을 남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로 새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파악하고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악한 목자도 아니고 양들 가운데서 살진 놈들을 멸하겠다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하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표현 자체로는 상당히 누그러졌지만, 말씀의 본뜻에서 그렇게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정의의 실현은 통치의 방식만을 바로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내의 불평등 자체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본뜻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 어떤 사람이 누리는 것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상호관계 안에서 빚어지는 현실에 대한 통찰입니다. 부자의 몫 가운데는 항상 가난한 자의 몫이 포함되어 있다는 성서의 일관된 통찰입니다. 그렇기에 누리는 사람은 그 책임을 통감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정의의 실현, 공평의 실현은 그렇게 공동체 구성원 내의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공동체는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선한 목자가 되어 양 떼를 다스리는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어 다스리는 세계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는 본문말씀이 오늘 현대적인 사회공동체의 구성 원리와 곧바로 일치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통치자와 백성을 목자와 양떼로 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주권재민의 정신에 딱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민본(民本)사상이 있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민을 근본으로 해야 하는 정신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통치의 대상으로서 돌봄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간주될 뿐 정치의 주체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철학자 그람시는 현대의 군주는 정당이라 말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주권자인 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정당하게 행사하여야 한다는 현대의 정치적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선한 목자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고대적 관념이 바로 그 현대적 정치 개념과 그대로 부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말씀은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리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 모든 공동체적 삶의 대안을 자극하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놀랍게도 선한 목자상을 이어받고 몸소 그 삶을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현대의 정치사상이 도달한 그 이상이 선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 세계에서 죄인으로 불리고 배제된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께서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최후심판에 관한 그 말씀은 사실 오늘 에스겔서의 말씀 맥락에 그대로 상응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17절은 양과 양 사이에서, 염소와 염소 사이에서 분명히 심판하겠다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이 심판할 때 분명해질 것이라 선포하셨습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40) 동시에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오늘 본문말씀에서 ‘헤매고, 길 잃고, 상하고, 약한 양’에 상응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목마르고, 배고프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게 한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은 그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본사상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여전히 목자와 양 떼를 구분하고 있고 양 떼를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그 관념이 오늘날 사회적으로, 특히 교회적으로 심각하게 오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흔쾌히 ‘아멘!’ 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강조하지만, 잘못된 길로 이끈 악한 목자에게 책임을 물을 뿐 아니라, 양 떼들 곧 공동체 구성원에게도 그 책임을 분명히 묻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저 본문말씀에 한정하여 그 의미를 받아들이기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취한 그 입장에 따라 말씀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하고 타당합니다.

오늘은 마침 교단에서 제정한 4.19혁명기념주일이자 동시에 장애인주일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인 교회절기만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기억해야 할 어떤 관심사와 관련하여 특별한 절기를 지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구체화하여야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4.19혁명은 잘못된 통치자와 그 체제에 저항하여 분연히 일어서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분단 이후 숨죽였던 민중들이 3.1만세혁명 때 일어났던 것과 같이 다시 일어선 사건으로 이후 진정으로 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향한 열망의 지속적인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기리는 것과 장애인주일이 겹친 것 또한 절묘합니다. 우리 사회 그 어떤 사람도 불편함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우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 불편함이 없는 사회는 그와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편하게 해주는 사회라는 것을 새삼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당을 지어놓고 가장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장애인화장실을 만들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 점입니다. 그걸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저 선한 목자를 기대하기보다는 그 선한 목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저마다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여정에서 우리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우리의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몫을 다하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몫을 감당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다시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그 말씀의 뜻을 다시 새기는 가운데, 저마다 감당할 몫을 맡아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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