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고 - 마가복음 7:31~3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8-22 16:14
조회
6247
2021년 8월 2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고
본문: 마가복음 7:31~37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방 페니키아 여인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고 돌아오신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페니키아 지역에서 벗어나 데가볼리(데카폴리스) 지역을 지나 갈릴리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 당신의 손가락을 귀에 넣고 혀에 손을 대고 하늘을 우러르며 외쳤습니다. “열려라!”(에바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똑바로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호들갑스럽게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으나 말릴수록 사람들은 이 일을 더 널리 소문냈습니다. 예수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사람들에게는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합니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이 말은 직역하면 “그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입니다. 이 말은 세상을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연상시킵니다(창세 1:31). 지금 예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시고 말하게 하신 것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듣게 되고 말하게 되었다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감탄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놀랄 만한 사건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귀먹고 말 못하는 모든 사람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는 세상입니다.

이 명징한 이야기는 사실 매우 풍요로운 이야깃거리, 곧 생각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는 이방인 지역 또는 이방문화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께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사실 지리적 경로로 볼 때 부자연스럽기는 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서북쪽 지중해 연변이고, 데가볼리는 갈릴리 동남쪽 요단강 양안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데가볼리는 그리스 시대의 식민도시로서 팔레스티나에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복음서 기록자에게는 이 이야기의 무대가 이방문화 지역이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 주인공이 이방인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렇게 추정해봄직 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보편성을 드러내주는 의미를 지닙니다. 유대인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이방인의 세계로 펼쳐진 복음의 보편성입니다. 복음의 확장입니다. 바로 앞의 페니키아 여인 이야기에 이어지고 있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단지 복음의 확장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확대된 맥락(7~8장 전반)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여전히 귀가 열리지 못하고 입이 열리지 못한 사람들의 사태와 극적으로 대비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늘의 본론으로 뒤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한편 오늘 본문 이야기는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태도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유대적 전통에 부합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이방문화 곧 헬레니즘의 전통에도 부합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데서 철저하게 그 당사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아주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 능력의 과시 행위로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치유 받는 사람의 형편을 고려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 은밀하게 그를 치유합니다. 그리고 그가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린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랄 때 그 일을 아무에게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널리 퍼졌지만, 예수께서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 태도는 예수께서 당신의 기적행위를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행위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보다는 기적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의 절박한 필요에 응하고, 그가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를 지닙니다. 기적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을 존중하고 그 사람에게 여러 사람 앞에서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온전히 장애를 극복하고, 바로 그 장애 때문에 배제 당했던 공동체에 복귀하여 당당한 구성원이 되기를 바랐던 셈입니다.
기적을 행할 때 예수님의 그 태도는 일관됩니다. 이어지는 뒷이야기(8:11 이하)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기적을 요구할 때 그 요구를 거절한 데서 그 태도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미 앞에서 실마리를 던졌지만,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가 그 전후문맥에서 지니는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장애를 지닌 한 사람이 치유 받은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듣고, 제대로 보고, 제대로 말하도록 해주신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7:14~16) 사천 명을 먹이고 난 다음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그 이전의 오병이어 사건을 환기하며 다시 말합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 무디어 있느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7~18)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이 질책에서 흥미로운 진실은 그 장애 아닌 장애가 어떤 외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안으로부터 스스로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사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진실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로운 듯이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악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오만, 그러기에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의 오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시 반복합니다.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 무디어 있느냐?” 자기 안에 도사린 자기중심적 욕망을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뒤로 그 문제를 지적하는 문맥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오늘 이야기가 이방인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완고한 편견 없는 이방인이 오히려 먼저 열린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먼저 귀를 열고 그들이 먼저 진실을 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되묻게 해줍니다. 그 일련의 이야기 끝에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야기(8:27~30)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오늘 본문말씀의 진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진실을 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몫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말씀은 일깨워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 중요한 진실을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말씀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배도 말씀선포 위주로 되어 있고, 늘 말씀을 새기고 전하는 데 능합니다. 말도 많고 말도 잘합니다.^^ 사실 말씀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매우 성숙한 신앙의 한 표현입니다. 온갖 형상에 미혹되는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멀리하고 나의 내면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우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말씀 위주의 신앙이 그런 성숙한 신앙을 돕고 있을까요? 오히려 빈말과 요란한 소리만 가득한 것 아닐까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어주는 역할을 맡은 상징적 존재가 없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라서 문제일까요? 다 들어주는 성모 마리아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가 없어, 닮아야 할 모상이 없어서 문제일까요? 개신교의 신앙 원리는 그와 같은 대리적 존재 없이도 자신의 내면 가운데 울려 퍼지는 타인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경지를 추구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신앙의 진정한 요체입니다.

처음 우리 교회가 시작되던 해 2000년, 바로 그 첫해 여름 수련회 때 박성준 선생을 강사로 모셔 말씀을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교회 전도사님이어 영향을 받기도 했고, 이후 한국신학연구소와 민중신학 연구활동 등으로 인연이 깊을 뿐 아니라, 우리 교회를 시작하는 데 중요한 동기를 부여해주신 분이기도 해서 모셨습니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께서 깊은 감화를 받기도 하였던 미국 펜들힐의 퀘이커형제단을 역시 방문하고 감화를 받은 박성준 선생께서는 그 첫 수련회에서 ‘예언자적 경청’(prophetic listening)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흔히 ‘예언자적 선포’(prophetic speaking)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에 앞선 ‘예언자적 경청’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예언자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데서 예언활동을 펼쳤습니다.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말합니다.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말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말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한 진실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날 신문의 짧은 한 칼럼 첫 문장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네덜란드 사회에서 이토록 합의가 잘 되는 비결이 있습니까?’ 한국 방문단이 묻자 네덜란드 공무원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비결이 따로 있을까요?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결정을 하지 않는 거죠.’”(<한겨레> 2021.8.20. 김태권)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뤄 가장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사회를 이룬 네덜란드 정치의 비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치 ‘인디언의 기우제는 반드시 효험이 있다, 비가 내릴 때까지 하니까’ 하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숭고한 가치는 한 순간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부단히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인한 구원은 한 순간의 사건일 수 없습니다. 그 선택의 순간이 갖는 의미는 중요하지만, 그 진정한 실현은 부단한 자기 훈련의 과정을 동반합니다. 삶으로의 실천 과정입니다.
오늘 말씀의 진실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온전히 듣고 온전히 말하는 삶, 누구에게나 그것이 보장되어 있는 세계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먼저 하늘의 음성을 듣고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이 마침내 나의 내면 가운데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부단히 연단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뜻과 뜻이 통하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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