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대전일보 칼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8-12-26 09:43
조회
175
대전일보 칼럼 07/ 2018년 12월 26일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우리 아들은 갔지만, 다른 이들은 저 같은 아픔을 겪지 않고 살기를 바랍니다.” 지난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노동자 김용균씨 어머니의 절규이다. 그 죽음으로 노동 현장의 열악한 환경이 재삼 문제시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처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2년 전 구의역 김 군의 죽음으로 산업재해에 관한 사회적 여론이 환기되었을 뿐 산업재해를 막기 위한 법과 제도는 미뤄져 왔다. 그러는 사이 김용균씨의 죽음이 이어졌다.

한국사회에서 산업재해의 심각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매년 세월호의 희생자의 여섯 배가 넘는 1,800~2,000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잃고 있다. 김용균씨의 경우처럼 알려진 경우 말고도 매일 5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일하는 일터에서 죽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중 1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급속한 경제력의 성장을 자랑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안전과 정당한 권리를 보장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일터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위험에 처해 있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서둘러 대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로 불리는 사태를 막기 위한 법과 제도의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 국회가 그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 국회에 제출되어 있는 정부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보호대상의 확대, 원청 사업주의 책임 강화, 급박한 위험시 노동자의 작업 중지권 등을 핵심 쟁점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요건들은 산업재해를 최소화하고 ‘위험의 외주화’를 막을 수 있는 기본적인 요건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까지 그 대비책을 방기할 것인가.

물론 작업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산업재해를 줄일 수 있는 법적 제도를 갖추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말 용납할 수 없고, 부끄러울 만큼 산업재해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빈발하는 데는 우리 사회가 심각한 문제의식 없이 용인하고 있는 여러 제도들과 통념들이 함께 얽혀 있다.

‘위험의 외주화’가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도 광범위한 비정규직을 용인하는 제도와 관행 때문이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가 출범초기부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중요한 과제로 내세워왔지만 그 성과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일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대비책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상시적으로 필요한 일자리는 마땅히 정규직으로 해야 하고, 편법을 남용하여 사실상 비정규직 노동으로 대체하는 경우는 엄격이 금지되어야 한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비정규직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차별 요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상관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접근해가자면, 우리 사회에서 노동권을 확실하게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의 헌법과 노동관계 법들은 모두 노동삼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삼권은 보장되고 있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단결권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안팎에 지나지 않은 사실은 그 권리의 행사에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정상적인 노사협상이 가능하다면 고공농성과 같은 극한적인 행위에 나서야 할 까닭이 없다. 지금도 서울 목동에서 파인텍 노동자들은 고공농성 최장 기록인 408일을 넘겨 거기에 사흘을 더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단체행동인 파업에 나서는 일은 거의 예외 없이 사실상 불법화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상ㆍ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적 규범으로 확립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그 규범이 통용되고 있지 않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권을 온전하게 보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저하게 기울어진 마당을 바로 잡고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일터에서 보람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사회,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새해에는 그 희망의 빛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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