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내 삶을 바꾸는 일상의 평화 – 차별과 배제를 넘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2-12 22:38
조회
943
2019년 총회 사회선교 정책협의회 / 주제: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마태5:9)
2019년 2월 11일(월) 13:00 – 12일(화) 13:00 / 한신대 오산캠퍼스 늦봄관

내 삶을 바꾸는 일상의 평화 – 차별과 배제를 넘어

최형묵(총회 교회와사회위원장 / NCCK 정의평화위원장 /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시작하는 말

“한국은 민주주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전 세계에 보여줬다.” “서구가 자유민주주의의 위기와 해로운 민족주의의 부흥으로 절망에 휩싸여 있을 때, 한국은 민중의 힘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방금 전했다.”(2017년 5월 10일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사).
촛불항쟁으로 새로운 정부가 등장하였을 때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성취를 기뻐하며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기대한 만큼 여러 가지 변화 또한 경험하였다. 가장 두드러지게 체감하는 변화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체제 확립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북미관계 등을 포함하여 주변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난관이 있기는 하지만, 남북간 관계 개선은 급진전되고 있고, 그 관계의 개선이 향후 동북아시아에서의 평화체제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촛불항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변화라고 할 것이다. 촛불항쟁의 열망은 마지막 남은 냉전체제에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에 편승하여 강화되어온 기득권체제를 무너뜨리고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는 삶의 평화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는 동인이 되었다. 촛불항쟁으로 새 정부가 등장하였을 때 그 기대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새 정부가 표방한 ‘인권존중의 사회’, ‘노동존중의 사회’,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 ‘차별없는 사회’ 등 정책적 선언은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상적 삶의 평화 차원에서 가시적 성과는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단지 과거의 적폐로 인한 현상으로만 치부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이 노정되고 있고, 그에 대한 정부의 정책도 과연 해결하고자 하는 진정성이 있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 발제는 평화의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해당하는 일상적 삶의 평화 차원에서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두드러진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보고, 그에 대한 교회의 과제를 모색하고자 한다.


2. 오늘 우리가 직면한 불평등과 차별의 현상들

불평등과 차별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물질적 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포함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뜻한다(분배와 인정의 문제). 그 어떤 존재이든 각자는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갖기 마련이고 각기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차이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차이가 위계적으로 등급 매겨지거나 우열 또는 선악의 관계로 인식될 때 차별이 되며, 그 차별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불평등이 된다.
오늘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매우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저마다 자유로운 개인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에 과거의 신분에 따른 차별이 상당 부분 해소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존재한 모든 차별이 그 나름의 고유한 역사적 조건을 갖는 만큼, 오늘 삶의 현실에서 또한 차별은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과거부터 지속되어 온 차별이 교묘한 형태로 재연되는가 하면 더욱 심화되기도 한다. 노동사회의 불평등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 안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차별 현상이라면, 그 차별에는 가장 오래된 양성간의 차별이 결합되어 있고 인종ㆍ민족ㆍ국적ㆍ출신 등 다양한 조건에 따른 차별이 가중되어 있다. 각각의 차별은 그 자체로 고유한 원인과 속성을 갖고 있지만, 많은 경우 그 차별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다. 그러기에 어떤 하나의 명백한 차별을 경험하는 사람은 또 다른 이유로 동시에 차별을 경험함으로써 심각한 고통의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차별의 현상들이 존재하지만, 오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차별 현상들 가운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우선 전 세계적 신자유주의 물결 가운데서 가장 뚜렷하게 경험하는 현상으로서 노동의 주변화와 격차의 심화 현상, 단적으로 말해 노동의 위기 현상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그 가운데 증대되고 있는 여러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 현상을 들 수 있다. 여러 소수자에 대한 혐오 현상 가운데서 최근에 부상하고 있는 난민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2-1. 노동계급의 주변화와 노동의 위기

지구화된 세계경제는 물자와 인간의 소통을 확대시키고 경제적 규모를 확대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매우 다층적인 차별적 위계질서를 동반하고 있다. 사람들의 경제적 형편과 삶의 질은 더욱 공평해진 것이 아니라 더욱더 심각한 격차를 안게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노동이 일상화되고 그에 따르는 노동계급의 주변화 현상이 현저해지고 있다.
비정규직노동의 증가는 노동계급의 양극화와 주변화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현상이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체제의 돌입과 함께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꾸준히 증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한 때 60%에 이를 정도로 급증하다가 최근 수 년 간 다소 감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자의 절반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불안정한 고용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소득격차의 측면에서도 심각성을 안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거의 절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고 있다. 오늘 비정규직 문제를 노동계급 자체의 양극화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노동계급의 양극화와 함께 등장한 주변화된 노동계급은 전통적 자본주의적 산업화 시대의 ‘노동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통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노동계급이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가 연상시키는 것은 대개 장기적이고 안정적이고, 일하는 시간이 고정된 일자리에 있으며, 조합에 가입하고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주변화된 노동계급은 이전의 노동계급이 지녔던 그와 같은 일체의 특징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아예 실업 상태에 있거나 불안정한 임시고용 상태에서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으로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주변화된 노동계급의 주요 특징이다.
이처럼 기존의 노동계급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이들 주변화된 노동계급은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의미로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precarious+proletariat)’라 불리고 있다. 일본에서 이들은 ‘프리타’(freeter: free+arbeiter) 또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and Training)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프레카리아트화 되어가는 대상은 모든 세대 노동계급에 걸쳐 매우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타격을 입는 가장 두드러진 대상들로는 여성과 청년층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도 고령층, 장애인과 범죄자들, 그리고 특정한 사회 안에서의 소수 종족들이 프레카리아트화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부류로는 시민권 없는 거류민들(denizen)이다. 이 거류민들에는 매우 다양한 부류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부류로 국경을 넘나드는 이주 노동자들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시민권은커녕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극심한 차별적 임금을 받으며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현상이 단지 지역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현상들은 지구화된 세계경제질서 안에서 서로 영향을 끼치며 전 세계적 차원에서 프레카리아트화 현상을 강화시키고 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주변화, 아니 노동의 위기 현상은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경제의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는 높지만 정작 경제의 실질적 주체인 노동자의 권리와 삶의 실상은 외면당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에 해당하는 장시간의 노동, 부끄럽게도 역시 세계 최고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산업재해, 과도하게 높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과 그에 따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극심한 차별, 따라서 그 차별 가운데서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최저생계비도 받지 못한 채 생활고를 겪고 있는 현실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실상이다.
게다가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은 정당한 기본권마저도 극도로 제약을 받고 있다. 헌법과 노동관계 법들은 모두 노동삼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권리는 보장되고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안팎에 지나지 않은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노동자의 단결권의 행사에도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정상적인 노사협상이 가능하다면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극한적인 쟁의행위에 나서야 할 까닭이 없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거의 예외 없이 사실상 불법화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상ㆍ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적 규범으로 확립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그 규범이 통용되고 있지 않다.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 안팎이 운위되고 있지만, 부끄럽게도 노동자들의 상황은 최악이다.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열심히 일함에도 불구하고 생활고를 겪어야 하며, 심지어는 자신의 일터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 우리 사회 노동의 현주소이다.
촛불의 민의로 등장한 현 정부가 노동존중의 사회를 표방해왔고, 그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열악한 노동의 현실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점점 난망해지고 있다. 경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노동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던 정부의 정책은 표류하고, 어느덧 경제성장 중심으로 그 정책이 선회하고 있다. 노동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늘 노동의 위기를 엄중히 직시하고 비상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2-2. 성불평등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2-2-1. 성불평등
한국사회는 성별 임금격차 면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여러 분야에 걸쳐 있는 극심한 성적 차별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하나의 예로서, 이를 통해 다른 여러 분야의 성적 차별 현상을 가늠하게 해 주는 척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근래 한국사회에서는 강고하게 자리 잡은 여성차별에 더하여 여성혐오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였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을 계기로 한국사회에 여성혐오 현상이 속속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강력범죄 피해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으며, 일상적 영역에서 공공연한 여성혐오 현상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근래에 부상하고 있는 ‘미투운동’이 보여주고 있듯이 성폭력 현상이 일상화되어 있다. 더욱이 매우 심각한 성폭력 범죄행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교회 안에서도 매우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에 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사회 각계에서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로 증가하는 여성혐오 현상과 성폭력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차별과 혐오 현상이 단지 의식상의 문제이거나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수한 조건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점증하는 여성혐오 현상은,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기존의 남성중심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고 남성의 권위가 약화되는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모든 혐오 현상이 그렇듯이 문제의 근본 원인에 대한 책임을 엉뚱한 대상에게 전가하는 전도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2-2-2.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한국에서는 군형법에서 성소수자가 처벌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금지 법안 역시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주장이 유독 퇴행적 기독교 보수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든 차별과 혐오의 논리가 갖고 있는 불온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불온한 욕망은 주류 한국교회의 고질병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통해 스스로의 치부를 가릴 수 있고, 어떤 정치적 효과까지 거두게 될 때 그 증상은 더욱 깊어진다. 한국교회에서 그 불온한 욕망은 오랫동안 반공주의를 통해 표출되어 왔다. 여전히 반공주의 폐해의 영향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 반공주의를 매개로 동맹관계에 있던 정치세력이 약화되고 더불어 교회 스스로의 사회적 신뢰가 현저히 낮아진 상황 가운데서 주류 한국교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 논리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단지 교회적 현상으로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 전반에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위험하다.

2-3. 외국인과 난민에 대한 혐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은 특별히 지구화된 경제질서 가운데서 인종과 언어, 국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빈번한 이동과 접촉이 가능해진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이 주로 발전한 국가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 사실을 입증한다. 하지만 인종과 언어, 국적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빈번한 이동과 접촉 그 자체가 곧바로 외국인 혐오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갖게 되는 사회적 집단의 존재가 그 내재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외국인 혐오증은 사회적 환경 안에서 자기 박탈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 요인을 특정한 집단, 곧 외국인들에게 돌려 공공연하게 증오와 혐오를 드러냄으로써 나타난다. 줄여 말하면, 지구화된 경제질서 가운데서 사회적 박탈계층을 양산하는 양극화가 오늘의 외국인 혐오증을 낳는 기본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나라 및 사회의 사정에 따라 그것은 일정부분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문화적ㆍ역사적 요인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혐오 현상이 자기 박탈감의 요인을 막연한 일반화에 기대어 특정 집단에 투사하고 그에 대해 증오와 혐오를 표출한다는 데서 어떤 형태이든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다문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만큼 인종주의적 혐오가 점차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절대다수의 외국인들이 인종혐오주의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는 조사통계의 결과, 그리고 실제로 이미 반다문화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 더욱이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감안할 때 사회적 불만의 왜곡된 형태로서 인종주의적인 혐오는 이미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사례 가운데 하나가 난민에 대한 혐오 현상이다.
지난 해 2018년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제주에 예멘 난민이 다수 들어옴으로써 난민문제가 한국사회의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한국은 국제연합(UN)이 제정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1992년에 가입하였을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 가운데서는 드물게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하여 그 이듬해부터 시행중에 있다. 예멘 난민들이 한꺼번에 제주도에 들어오게 된 것도, 제주도가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던 조건도 있었지만 한국이 난민을 보호하는 법을 갖고 있고 국제 규범을 지키고 있다는 것 또한 한 요인이었다.
한편의 사람들은 난민들을 맞아들여 보호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들을 보호하는 데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난민의 유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시 이를 위한 정부의 대책을 요청하였고, 난민 혐오의 논리를 유포하였다.
한국사회에서는 난민문제가 갑작스럽게 부상한 까닭에 이에 대한 대비책은 사실상 충분하지 못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다각적인 대안 모색이 필요한 상황이다. 제주에 비교적 짧은 기간에 500여명의 난민이 들어온 까닭에 난민이 급증한 것으로 보이고 난민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급부상하였으나, 사실 서구사회와 비교할 때 한국을 찾은 난민은 그렇게 높은 비율이 아니다. 차제에 난민문제가 급부상한 만큼 이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일상적 삶의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역할

앞에서 짚어본 지금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차별과 혐오의 현상에 대해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그 대안을 찾아야 할까?

3-1. 노동의 위기에 대한 대처

노동 문제는 한정된 의미에서 사회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핵심적 사안이다. ‘천만 노동자’라는 말은 노동자 문제가 그와 동반한 온 가족의 문제라는 것을 함축하며, 이는 우리 사회 구성원 절대다수의 문제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노동존중의 사회를 이루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존중받는 삶을 이루는 길이자 동시에 우리 사회 공동체의 평화로운 존속을 보장받는 길이다.
노동존중의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은 노동삼권을 완전하고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마땅한 권리를 어떤 명분으로든 제약해서는 안 되며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와 국회, 사법부는 물론 범사회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제적 협약의 준수, 제도의 정비, 나아가 일체의 교육과정에서 노동권에 관한 교육의 실시 등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 기초 위에서 우선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일터에서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른바 ‘김용균법’이라 불린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은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별칭이 무색할 만큼 실질적 내용이 부실하다.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를 실질적으로 근절할 수 있도록 작업장의 안전보장에 관한 책임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약하고 생활고를 가중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의 외주화’까지 불러일으키는 주범으로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극심한 차별이 자리하고 있다. 상시적으로 필요한 일자리는 반드시 정규직화하여야 하고, 각종 편법으로 비정규직을 남발하는 사태에 대해서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 근절되도록 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비정규직이 허용된 경우라 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임금과 근무조건에서 차별요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광범위하게 용인되고 있는 비정규직을 줄여나가기 위한 사회적 해법이 꾸준히 강구되어야 하며, 이를 선도하는 차원에서 공공부문의 정규직화는 서둘러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 사회의 현안이 되고 있는 쟁점과 관련하여 대안을 찾는 데서도 현재 현저하게 기울어진 마당에서 노동자들이 처해진 불공정한 상황이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어야 한다. 최저임금제도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인간으로서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취지를 지닌 것이므로, 그 취지에 부합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최근 정부에서 제시한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안은 기술적 합리성을 따르기보다는 노동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실질적 합리성을 따라 판가름되어야 하며, 최저임금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부수되는 일체의 논란 역시 그 근본 취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탄력근로제 확대에 관한 문제 또한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차원에서 그 해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재벌의 개혁은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는 과제이다. 재벌총수체제의 개혁, 출자총액제한제도, 공정거래 등을 포함한 재벌 개혁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상생을 위한 건강한 기업생태계의 조성이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권리의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극한적인 노동환경은 대기업이 주도하는 경쟁체제 안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노동자들이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 할 뿐 아니라 일터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헌신하는 각계각층의 연대의 대열에 함께 하는 가운데, 정부와 국회, 사법부, 그리고 기업이 인간적인 노동환경을 조성하고 정당한 노동권의 보장을 위해 노력하도록 촉구하는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도 노동은 천대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일깨워야 한다.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결코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엄존하고 있는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임을 환기하며 사회적 평화를 이루는 데 교회는 기여해야 한다.

3-2. 성불평등과 성소수자 혐오에 대한 대처

성불평등은 정말 오랜 문제이지만, 아직까지 그 불평등을 해소할 수 방안은 쉽게 찾아지지 않고 있다. 앞에서 지적하였다시피 성불평등은 역사적 형태를 띠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불평등은 차별적 위계화를 내재적 성격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 그 안에서 구체적 해법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일상적인 규범과 인습 가운데 자리한 성불평등의 실상을 분명히 인식하고 성인식을 높임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형성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불평등은 일반 사회에서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과연 어떤 요인이 교회 안에서 그 불평등을 강화하는지 규명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강구하여야 한다.
지난해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에서 성윤리 강령을 채택하고 성폭력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 그리고 성인지 교육을 의무화한 것은 반길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폭력에 대한 처벌규정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하였다. 최근 기장 교단 안에서 일어난 성폭력 범죄행위에 대해 그 대처가 안일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보면 교회 안에서 성폭력을 엄히 다룰 수 있는 법제화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성소수자 혐오에 대처하는 방안은 크게 대사회적 차원과 교회내적 차원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대사회적 차원에서는 배제와 혐오의 논리를 퍼뜨리는 기독교계의 주장을 상대화시킬 수 있도록 다른 기독교의 존재와 목소리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실은 배제와 혐오의 논리를 퍼트리는 세력이 다수가 아니라 일부 정치화된 기독교계에 한정된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향후 헌법개정 과정에서 소수자의 인권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내적 차원에서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어떤 수준인지 신중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지만, 평신도 수준에서는 유보적 입장이 많은 만큼 실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은 가장 초보적인 물음, 곧 ① 모든 공동체와 교회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성적 지향의 소수자가 있음을 알고 있는지 ② 이러한 성적 지향이 교회 안의 회원권과 지도력을 갖는 데 방해가 되는지 하는 물음부터 제기하며, 교회에 관한 근본적 물음에 이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타자에 대한 ‘환대’가 공동체 본연의 정신이며, 그것이 하나님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공유할 수 있다면 성숙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 교회가 바로 설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배제와 혐오의 논리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물론 그 ‘환대’를 실천하는 길은, 그저 인식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생활과 문화 전반을 변혁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는 지난 2018년 총회에서 성소수자 목회 연구위원회 구성을 가결하였다.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소수자 문제를 공론화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아직 그 연구위원회의 운영이 본격화되지 않았지만, 그 운영의 방향은 교회 안에서 대립되는 의견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점을 신중히 고려하는 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입장이 공존하면서도 서로 정죄하지 않고 각기 입장을 존중하는 현명한 해법을 찾는 대화의 과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3-3. 외국인과 난민 혐오에 대한 대처

이웃의 타자를 부정하는 배외주의와 차별의 논리는 오늘 세계 곳곳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저마다의 사회에서 그 현상을 야기하는 메커니즘은 역사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배외주의와 차별의 논리가 ‘동질성-본연성-순수성’의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Carolin Emcke, Gengen den Hass, 2016; [한국어판] 『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2017, 참조). 그것은 일단 자기의 범주 안에서는 숭고한 이념으로 떠받들어지지만, 그 자기의 범주 밖에 있는 타자에게는 어마어마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숱하게 경험해 왔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외국인 및 난민을 포함하여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거류민에 대한 차별 현상은 국민국가/주권국가 질서의 한계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범위 안에서 주권은 지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시민권이 없는 거류민들에게 주권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 지구화된 경제질서 가운데서 사회적 박탈계층을 양산하는 양극화와 위계적으로 등급지어진 질서를 유지시키는 불평등은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을 낳는 기본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국민국가를 기본 단위로 하는 오늘의 세계질서 현실에서 잠정적으로 가능한 대안은 국제적 인권체제를 강화하는 길이다. 각 나라는 이를 위한 협력을 요청받고 있다. 한 국가의 문명의 수준은 자국민에 한정되는 인권존중이 아니라 자국민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인권존중의 척도를 얼마만큼 실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 전통과 그 유산은 국제적 인권체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비시민권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무조건 환대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인은 그 정신을 삶의 현장에서 구현하는 것이 마땅하다. 처음 제주 난민문제가 불거졌을 때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는 반이슬람을 이유로 혐오의 논리가 퍼졌으나, 점차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조건부 환대의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태도가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지 되물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의 정신을 삶의 윤리로 구체화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한국교회는 열정적 신앙으로 충만하지만 복음의 정신을 삶으로 구현하려는 윤리의식과 그에 따른 인권의식은 지극히 박약하다. 그 누구든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로 여기며 서로 존중하는 삶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는 우리 사회 안에 있는 이방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끊임없이 환기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실질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여러 기관 및 단체들과 협력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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