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3ㆍ1운동 100주년과 기장정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8-14 08:12
조회
696
* 한국기독교장로회 남신도회 전국연합회 2019 회보 원고

3ㆍ1운동 100주년과 기장정신

최형묵(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 위원장 /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민족운동이자 동시에 민권운동으로서의 3ㆍ1운동

1919년 3월 1일 이 땅의 민중들은 분연히 일어나 세계만방에 독립국의 자주민임을 외쳤다. 3월 1일 그날의 함성과 행진은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것이자 동시에 이 땅을 지켜온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천명한 쾌거였다. 독립국의 자주민임을 당당하게 외치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그날 이후 오늘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는 그 의의를 재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 3ㆍ1운동은 일제에 저항한 민족운동으로서 그 성격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3ㆍ1운동이 정치적 우파의 전유물처럼 되어온 것도 그런 사정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재삼 돌이켜보건대 3ㆍ1운동의 의의는 특수한 민족주의적 지평에 한정되지 않는다. 3ㆍ1운동은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을 이루고자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인 것은 틀림없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의 쟁취’로 그 의의가 한정되지 않는다. 그 사건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한 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주인이 곧 민중 자신이라는 것을 표방한 역사적 쾌거였다. 3ㆍ1운동은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적 논리로 자유와 평등을 매개로 민족자결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하였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를 새롭게 구상하는 원천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단적으로 말해 3ㆍ1운동은 민족운동이자 동시에 민권운동이었다. 나아가 그 사건은 모든 나라와 민중들이 이루어야 할 보편적인 정의와 평화의 숭고한 이념을 만천하에 표방한 역사적 쾌거였다. 낡은 시대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건이었다. 저마다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낡은 세계로부터 벗어나 저마다의 자유를 구가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었다.
그 의의는 100년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3ㆍ1운동에 참여하였던 당사자들의 인식이기도 하였다. 3ㆍ1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하였을 때부터 그 인식은 분명하였다. 그것은 처음부터 “자력으로써 이족(異族)의 전제(專制)를 전복하며, 5천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며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보의 착수”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大韓民國建國綱領ㆍ總綱」). 바로 이 점에서 3ㆍ1운동의 의의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서 뿐만 아니라,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체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역사적ㆍ정신적 자원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2. 3ㆍ1운동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

3ㆍ1운동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에도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 앞장서 독립국의 자주민으로서 목소리를 높였고 그 당당한 대열에 헌신하였다. 세상 만민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자매형제라는 복음의 정신을 따른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억압과 불평등도 용인할 수 없었기에 민족사의 암울한 상황 가운데서 믿음을 행동으로 감당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겨레의 자주 독립을 위해 민중과 함께한 한국 그리스도교의 빛나는 역사였다.
당시 이 숭고한 행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손길로 받아들이고 헌신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서, 사실상 천도교와 기독교를 포함하여 종교지도자들의 연대를 성사시킨 남강 이승훈 장로는 머뭇거리는 교회지도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어?” 그분은 또한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내실 때 각각 자유를 주었는데 우리는 이 존귀한 자유를 남에게 빼앗겼다. ...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적의 칼에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이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이번 일은 제 자유를 지키면서 남의 자유를 존중하라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에 한국 그리스도인은 3ㆍ1운동에서 헌신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2천만 명이 채 되지 않은 인구 가운데 200여만 명이 참여한 사건에서 그리스도인의 두드러진 참여율은 몇 가지 수치만 보더라도 확인된다. 당시 기독교인은 1.5%에 지나지 않았지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 전체 피검자의 17.6%, 여성의 경우 압도적인 65.5%, 교회지도자의 경우 244명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두 배에 달하는 비율을 차지했다.
이것은 교회가 가진 가시적 조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믿음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비록 소수였지만, 당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 정신을 잃어가고 있어 안타깝지만, 오늘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숱한 열매들이 사실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은총의 열매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3. 민족ㆍ민중운동사에서 기장정신의 의의

흔히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정신은 1953년 출범당시 호헌총회 선언문의 취지에 잘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교회가 교권에 사로잡혀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진취적인 정신을 지녔던 김재준 목사를 비롯한 선각자들을 정죄하였을 때 표방한 그 입장은 기장정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당시 그 선언의 요체를 다시 환기하면 이렇게 집약된다. “① 우리는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② 우리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③ 우리는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 자조의 정신을 함양한다. ④ 그러나 우리는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세계 성도들과 협력 병진하려는 세계 교회의 정신에 철저하려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복음의 자유정신에 입각하여, 저마다의 자유와 자주를 실현하고, 나아가 연대와 협력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정신에 입각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한국교회 안에서 화살촉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고, 민족사의 현실 가운데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을 위하여,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하여 헌신하여 왔다.
그런데 그 정신은 비단 1953년 호헌총회 선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국교회 선교 초기 위계적 봉건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수용되었던 평등주의적 그리스도교 복음의 정신과 맞닿아 있으며, 더욱 직접적으로는 북간도 명동촌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신앙운동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 물론 그 정신은 1919년 3ㆍ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을 올곧게 잇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정신의 초석을 닦은 김재준 목사가 1945년 해방직후 “기독교의 건국이념 - 국가 구성의 최고 이성과 그 현실성”(장공김재준목사기념사업회 편, 『장공 김재준의 삶과 신학』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482-505 참조)에서 주장하고 있는 요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요체는 민족사의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의를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가운데 새롭게 건설되어야 할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것이 3ㆍ1운동 이래 민족ㆍ민중운동과 어떻게 맥이 닿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오늘날 보더라도 결코 진부한 것이라 할 수 없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김재준 목사는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하나님의 단일왕국’이라는 매우 이상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을 기본 기조로 하고 있다. 또한 좌우로 편향된 이념의 대립을 지양하고 자유와 평등의 조화 기조 가운데서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민정(民政)의 실제(實際)를 논하는 대목에서 교육정책, 사회정책, 국제정책, 문화정책 등 각 요목별로 견해를 제시할 때 그 자유와 평등의 조화 기조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국민교육’이 아니라 ‘인간교육’을 역설하고 있는 점이나, 경제력의 집중을 넘어 오늘날 경제 민주화에 해당하는 정책을 강조하고 있는 점 등은 매우 선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해방정국에서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친미 반공주의 우산 아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경도되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따지고 보면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범 당시 호헌총회의 선언 정신, 그리고 1961년 4ㆍ19혁명 이후 본격화된 교회의 사회적 참여의 전통이 결코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할 것이다. 3ㆍ1운동 당시 양적인 측면에서 비록 소수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두드러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이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한 운동에 참여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역시 양적 측면에서는 결코 다수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양적 규모 이상의 영향력을 지녔다. 그것이 가능하였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기장정신의 밑바탕을 되돌아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처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신실하게 구현하고자 하는 책임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태도를 일관되게 견지해온 교회의 전통을 부단히 계승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4.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서의 3ㆍ1운동과 그리스도인의 역할

3ㆍ1운동은 100년 전의 한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은 이전부터 도도하게 이어져온 민권쟁취의 여정 가운데 중대한 결절점인 동시에 오늘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나아가 남북간의 평화체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역사적ㆍ정신적 자원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사건은 한국 민족ㆍ민중운동사에서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해방사건이다. 따라서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오늘 역사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민중이 저마다 마땅한 권리를 누리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서로 갈라져 상대를 악마화하는 분단체제를 넘어 형제자매가 사랑을 나누는 평화체제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중요한 역사적 계기마다 당신의 구원역사에 동참하기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하고자 애써왔다. 촛불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기대가 높았지만 그 기대가 무색해지고 있는 오늘 우리는 다시금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에 응답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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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