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무신론을 거쳐 다시 신을 묻는다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0-01-31 19:50
조회
659
『기독교사상』 2020년 2월호 서평

 

이정순, 『신을 묻는다 - 현대 무신론자들의 종교이해 비판』대한기독교서회, 2019. 서평



무신론을 거쳐 다시 신을 묻는다면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1.
“나는 하나님 보좌(寶座)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막말 극우 정치선동가 전광훈이 길거리의 정치적 집회에서 내뱉은 말이다. 그가 목사로 불리는 데다가 말끝마다 하나님을 운운하고 있으니 그리스도인으로서 몹시 거북스럽다. 그런데 이제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그가 말끝마다 갖다 붙이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일까?
암만 생각해봐도 일개 정치선동가의 뜻에 매여 그 생사 운명이 결정되는 신이라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저 자기욕망의 투사이거나, 환상, 아니면 망상 아닐까? 그 가운데 어느 하나쯤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목사라는 직함도 어울리지 않을 터이다.
그 얼토당토 않는 사태를 보고 있자면, 신에 대한 믿음을 혐오하고 나아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금방 공감하게 된다. 엉터리 정치선동을 일삼는 사람의 막말에 생사가 결정되는 신이 존재한다면 정말 문제 아닌가. 당연히 존재할 리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에서 무신론은 나름의 기반과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신론이 그렇게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이 곧 신에 대한 믿음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신실하게 추구하는 신에 관한 물음을 더욱 촉발시킨다. 같은 신의 이름을 부르지만, 전혀 달리 생각하고 전혀 달리 사는 사람들의 존재는 신에 관한 근본적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2.
이정순 교수의 『신을 묻는다 - 현대 무신론자들의 종교이해 비판』은, 무신론이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상황과 신에 관한 근본적 물음이 필요한 상황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해주듯 현대 무신론자들의 종교이해를 비판함으로써 신에 관한 근본적 물음에 접근해 나가도록 인도해 주고 있다.
저자는 각각의 무신론자들이 제기한 주장의 요체와 그 맥락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가운데 하나이다. 현대 무신론이 제기된 역사적 맥락을 분명히 이해함으로써 그 주장의 실질적 요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비판 또한 단지 표면의 논리에 대한 반박을 넘어 무신론이 겨냥했던 실질적인 현실 그 자체의 극복 방안을 더불어 암시해 주고 있다. 단순한 논박이 아니라, 종교의 세계, 신앙의 세계를 되돌아보고 재구성하는 대안을 상상하도록 안내하는 셈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뒤르켐, 도킨스, 사르트르, 포이어바흐, 블로흐 등 여덟 명의 현대 사상가의 무신론의 요체를 정리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최근에 등장한 도킨스를 제외하면 모두 현대 무신론의 고전적 사상가들에 해당한다. 사실 이 책은 진화심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도킨스 등의 새로운 무신론 운동이 제기하는 도전에 대해 마땅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지만, 내친 김에 현대의 대표적 무신론 사상을 하나하나 따져보며 그 의의를 살피고 있다.
그 첫머리를 장식하는 마르크스에게서는, 그의 관심이 신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의한 사회구조에 있었다는 것을 주목하며, 저자는 그의 종교비판이 그리스도교 본래의 해방적 실천을 재발견하도록 도왔다고 평가한다.
난해한 사상가로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니체의 경우, 그가 신과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누르는 모든 사상과 체제에 반기를 들고 그에 대해 죽음을 선언한 것은 인간 본연의 능동적 삶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는 것을 주목한다. 그렇다면 그 뜻이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과 배치될 까닭이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마르크스, 니체와 더불어 오늘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프로이트는 종교를 일종의 강박적 신경질환으로 보아 인간의 자기 욕망이 투사된 환상으로서 신을 문제시하였다. 그것은 신의 존재 여부를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병리적인 정신세계를 진단하려는 시도로서, 강박에 기초한 종교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여전히 혜안이 되고 있다.
프로이트가 심리학적으로 종교에 접근했다면 뒤르켐은 종교를 사회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종교를 사회적 실재로 환원 가능한 것처럼 접근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의 역할과 기능을 조명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오늘날 종교의 역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도킨스는 진화심리학에 기초해 종교적 믿음을 부적절한 심리적 성향의 불운의 산물로서 일종의 망상으로 간주한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이 말은 그의 견해를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그의 종교비판은 특별히 근본주의적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서 유효성이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것만을 진실로 간주하는 그의 ‘과학주의’ 또한 하나의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사르트르는 사물과 달리 의식을 가진 인간의 ‘실존’(existence)을 강조하며, 그것이 곧 부단히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자유를 뜻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인간을 감시하는 존재로서 신은 필요치 않다. 이 점에서 사르트르의 무신론은 철저한 휴머니즘의 구현을 뜻한다. 저자는 그리스도교에서 신을 믿는 까닭이 노예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 인간,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반박한다.
현대 무신론의 선구격이라고 할까? 포이어바하는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며, 신의 인식은 인간의 자기인식이라 보았다. 결국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이어바흐의 인간의 자기투사로서 신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육체성이 부정되던 시대에 인간 삶의 숭고함을 발견한 데 큰 의의가 있기는 하지만,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서 인간의 삶을 간과한 것은 물론 인간의 물질적 삶을 초월하는 차원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매우 독특한 마르크스주의자 블로흐의 무신론적 유토피아주의는 그리스도 신앙의 본래적인 저항성과 혁명성을 복원함으로써 오히려 신학적 영감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에게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진정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을 뜻하는데, 그 까닭은 여전히 그에게 신은 억압적인 존재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3.
각각의 사상가들이 무신론을 펼친 맥락이 다르고 강조점이 다르지만 예외없이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데 신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미묘한 입장의 차이들이 있다. 신의 존재 여부 자체에 무관심한 입장이 있는가 하면, 아예 신의 존재를 강력히 부정하는 입장이 있다.
저자는 그 주장들의 본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하여 그 논지를 성실히 재구성하여 그 의의를 평가하고 나아가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종교비판의 의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그 비판의 대상이 되는 종교 및 신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저자는 일관되게 역설한다.
이 책은 수 년에 걸친 학교 강의록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그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이 매우 친절하고 성실하다. 아마도 학생들과 대화 내용을 충분히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더욱이 해당 주제를 다루는 저자의 내공이 상당하다. 난해할 수도 있는 사상가들의 주장의 요체를 그 시대 맥락 안에서 적절히 간추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들은 단 한 권의 책으로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의 요체와 쟁점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에 책 한 권을 완독하고 났을 때의 뿌듯함 또한 클 것이다.
그러나 한편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한 가지 물음이 맴돈다. 바로 신에 관한 물음이다. 책 제목 자체이기도 하다. 그 물음을 더욱 철저히 던지도록 안내해 줄 수는 없었을까?
이 책은 ‘존재’하는 신의 역할을 두고 공방을 벌이는 방식을 갖추고 있다. 무신론 자체가 신을 검증 가능한 실체적인 대상으로 전제하고 그런 신은 없다고 강변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논법에 매인 탓이기는 할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또박또박 반론을 펼치다 보니 신에 관한 논증이 반론의 대상이 되는 무신론과 같은 수준을 맴도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 같다. ‘아니, 그런 신이 아니라 이런 신도 있는데!’라고 역설하는 방식이다.
책 제목 자체가 의도한 것처럼 신에 대한 믿음은 곧 신에 관한 물음이라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보여줬어야 하지 않을까? 신 존재 증명이 문제가 아니라, 신에 관한 믿음, 곧 신에 관한 물음이 이 세계를 인식하고 인간을 인식하고, 진실에 이르는 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더 깊이 묻고 씨름할 수 있도록 해줬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러 형태의 무신론의 공격을 받으며 답을 찾고자 하는 신앙인들과 신학도들에게 이 책은 더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시대정신을 충분히 헤아리면서도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궁극적인 근원에 관한 물음을 지향하는 신학은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석되어야 할 대상이다.”(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이 말뜻이 함축하듯, 신학의 과제는 끊임없이 현상을 넘어서는 어떤 의미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신학은 분명히 인간의 삶을 문제시하지만 궁극적인 신에 관한 물음 가운데서 그 의미를 묻는다. 검증 가능한 것만이 진실로 여겨지는 오늘의 시대 가운데서도 그 물음의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이 책이 바로 그 물음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새길 수 있도록 해줬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맨 마지막 장에서 고난과 악의 문제를 과정신학으로 해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 시도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물음의 의욕을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누그러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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