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코로나19 시대 교회를 바로 세우는 실천적 상상력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2-19 18:51
조회
458
『신학과 교회』 제14호(2021년 2월 출판) 서평 원고

코로나19 시대 교회를 바로 세우는 실천적 상상력
이도영, 『코로나19 이후 시대 한국교회의 과제』(새물결플러스, 2020) 서평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한국민중신학회 회장 / 기독교윤리학)


코로나19 팬데믹 현상과 더불어 인류는 낯선 세계에 들어섰다. 이미 한 해 동안 지속되고 있는 위기 상황 가운데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고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많은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류문명의 위기에 대한 성찰과 함께 새로운 대안의 모색을 함축하고 있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문명의 위기 양상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위기가 코로나19로 가속화되고 전면화된 것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코로나19 시대 교회는 어떨까? 교회의 위기 역시 다르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여왔던 터이다. 여기에 코로나19 위기가 닥치면서 한국교회는 더욱 적나라한 민낯을 드러내었다.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며 자기이해에 민감한 태도로 목소리를 높인 반면 전사회적으로 겪고 있는 위기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시대 교회가 적극적으로 역할한 것이 무엇인가? 잘한다는 교회가 그저 정부의 방역지침을 잘 준수한 것 정도 아닌가?” 전사회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위기 상황 가운데서 교회의 존재감 자체가 희미해진 현실에 대한 평가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막 시작될 즈음 그 위기의 충격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낀 저자 이도영 목사는 발 빠르게 『코로나19 이후 시대 한국교회의 과제』를 내놓고 교회의 실상을 진단하며 그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공교회성’, ‘공동체성’, ‘공공성’의 부재로 진단하며, 그 대안을 제시한다. 신학적 실천 내지는 실천적 신학을 지향해 온 목회자로서 왕성한 목회현장 활동과 저술활동을 펼쳐온 저자로서 기왕의 책들 가운데 제기해놓은 과제에 더하여 긴박한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이번 책은 교회의 ‘공공성’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먼저 저자는 개인 영혼구원에 몰입하여 교회의 성장을 추구하는 가운데 기득권자들의 가치와 극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기독교가 재난이 있을 때마다 ‘신정론적 강박’에 매여 현재 코로나19 위기 상황을 해석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일축하고 있다. 신정론적 해명이 필요한 맥락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복음과 교회의 본질을 묻는 가운데 현재의 사태를 직시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맥락에서 공교회성, 공동체성, 공공성을 결여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직시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개교회주의와 경쟁적 성장주의로 대표되는 공교회성의 결여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책에서 충분히 다룬 까닭에 이 책에서는 교회의 본질적 요건 가운데 하나로서 먼저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재난의 상황에서 교회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교회의 존재가 절실하다는 요청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공공성이다. 저자는 매우 흥미로운 구도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각각 빨강, 초록, 파랑색으로 표상되는 정의, 생태, 평화의 가치로 공공성의 요체를 제시하고, 이를 성서에서 비롯되는 예언자적 상상력과 관련하여 그 신학적 의미를 해명한다.
정의의 요구는 공생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저자는 코로나19 위기로 드러난 불평등 사회의 실상을 주목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다. 여기서 저자는 코로나19 위기를 ‘강제 멈춤’의 기회로서 안식일 정신과 상통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정신에 따른 정의의 회복을 강조한다. 지금 드러난 불평등 현상을 극복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방안으로서 기본소득ㆍ기본자산ㆍ최고임금 등을 제시한다.
생태적 가치는 생태 친화적인 문명으로 전환함으로써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사랑과 신비를 요체로 하는 ‘성자적 영성’과 정의와 불가능성에의 열정을 요체로 하는 ‘혁명가적 영성’으로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마주하며 미래 전망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것은 곧 생명의 질서에 대한 경외감을 배제한 문명의 근본적 전환에 대한 요청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서 저자는 만물에 적용되는 정의의 한 예로서 동물권을 옹호하고, 사회적 정의와 생태적 정의를 결합한 ‘그린 뉴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평화는 ‘리오리엔트’로 집약된다. 여기서 ‘리오리엔트’는 문자적 의미의 ‘방향재설정’이라는 의미보다는 ‘동방으로의 귀환’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할까? 그것은 곧 현대문명을 이끌어 온 서구문명을 대신하여 동방문명이 지니는 잠재력을 현실화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물론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서구의 국가들이 실패한 반면 한국을 포함한 동방의 국가들이 성공하고 있는 현실에 근거하여 기왕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새로운 국제질서의 재편을 기대하는 전망이다. 여기서 저자는 일방적인 동방으로의 전환을 말하지는 않고, 양자의 긍정적 통합을 지향한다.
정의, 생태, 평화 이렇게 세 가지 차원에서 공공성의 회복을 역설한 저자는 그 구현의 과제를 안고 있는 교회의 문제로 되돌아와 책의 결론에 접근한다. 시대를 읽는 안목을 상실하여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결국 소멸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뼈아프게 지적하며, 잦은 재난과 불확실성이 증대된 오늘 세계 현실 가운데서 진정한 부활의 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일깨운다. 이 때 교회는 재난을 무릅쓰고 헌신하는 ‘파라볼노이’로서 헌신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것은 이타적 존재로서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를 향한 깊은 애정과 함께 시대의 징후를 읽어내고, 다시 성서적 상상력에 근거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야말로 큰 즐거움이다. 마치 얼굴을 마주하고 강의를 듣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실천적 신학, 신학적 실천을 지향하며 목회현장 활동에 매진하며 동시에 신학적 성찰을 부단히 지속해 온 저자의 내공 덕분일 것이다. 이도영 목사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그 실천적 감각과 성찰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제안서를 낼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이가 한국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그의 제안의 기본적 취지에 전폭적으로 공감하며 찬사를 보낸다. 특별히 복음의 총체성을 이렇게 설득력 있게 제안하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이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의 과제를 맡게 된 입장에서는 한두 마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핵심요체는 공공성의 과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정의, 생태, 평화를 역설한 대목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문제제기 또한 이를 중심으로 한다.
이 본론에 이르면 마침 각각의 과제를 상징적 색깔까지 더해 이야기하고 있는 까닭에 마치 PPT 화면을 보듯이 그 내용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그 화면이 모두 지나간 다음 문뜩 의문이 떠오른다. 공공성의 요체로 제시되고 있는 정의, 생태, 평화의 상호관계는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사회경제적 차원과 생태문명적 차원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구원”(111쪽)의 전망에서 ‘사회적 뉴딜’과 ‘그린 뉴딜’의 통합을 제시하는 입장을 통해서 정의와 생태의 상호관계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그런 만큼 그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저자가 주장하는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모든 존재가 그 정당한 몫을 인정받는 정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 항목에서 바로 그 ‘사회정의’를 밝히고 있다면, ‘생태’에서는 그 정의가 만물로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평화’와의 상관관계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 리오리엔트를 말하고 있는 것은, 그 함축하는 요체를 줄여 말하면 암만 봐도 새로운 국제질서의 재편에서 그 중심축이 동방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이를 주장하는 데는 단지 국제관계의 세력재편에서 그 중심축이 이동한다는 것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근현대 서구문명을 이끌어온 가치를 보완하는 동방문명의 가치로서 ‘예(禮)’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가치의 전환을 말하고 있기는 하다. 그 주장은 의미 있고 충분히 새겨들을 만하지만, 앞서 정의와 생태를 말했을 때의 구체성과는 다른 추상성으로 비약해버린 느낌을 지을 수 없다. 그간 서구문명에 주눅 들어 있었던 입장에서는 이번 코로나19 위기가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진단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동서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미래 전망이 모색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공성의 요체로서 세 가지 가치는 그저 병렬되는 과제가 아니라 각기 차원을 달리하면서도 연관되어 있는 과제들이 아닐까? 애초 정의에 대한 인식을 더욱 분명히 하고 그 인식을 각각의 과제에 철저하게 적용하는 접근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그 가치들의 상호관계가 더욱 분명해지지 않았을까? 예컨대 ‘정의로운 평화’와 같은 인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욱이 저자가 일관되게 의존하고 있는 성서적 상상력에 더욱 철저하게 기대어,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라는 전망에서 그 가치들을 조명할 수 없었을까? 이미 저자가 말했듯, “연약함이 화평을 낳았다”(133쪽)는 그 관점을 더욱 수미일관하게 적용하였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이 문제제기가 이 책의 진가를 훼손할 만큼 중대한 결함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진가는 어떤 특정한 이론의 완결성을 구축하는 데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실천적 현장에서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교회가 진정으로 그 본질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여러 실질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 그 진가가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쉴 새 없이 실천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은 이 시대를 읽어내고자 하는 많은 지성들의 생각을 접하고, 동시에 여러 다양한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접하게 된다. 저자가 목회하고 있는 ‘더불어숲교회’만의 생각과 실천이 아니다. 그 여러 생각과 실천을 접하는 가운데, 독자 나름의 어떤 대안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이 책은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흠이 되는 이야기는 기억하지 말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있었다면 그것 몇 가지만을 취해주시기 바란다.”(236쪽) 저자의 이 마지막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저자가 이 책을 내놓는 문제의식을 진솔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말이다. 이 책으로 부족한 게 있다면, 그것은 독자의 실천적 상상력으로 채워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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