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노동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8-02 21:30
조회
449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들의 포럼
“세상을 바꾸는 여름: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 세상, 하느님 나라”
6차 노동과 가난: 소외와 불평등을 넘어서 / 2021.8.2(월) 오후 7:30-9:30 / 온라인

노동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기독교윤리학)

1. 시작하는 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을 때 일상생활의 수준에서 그 효과를 가장 뚜렷하게 체감할 수 있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노동현장일 것이다.
현재 발의된 법안(2020.6.29. 정의당안 참조)은 차별금지의 대상과 영역을 규정하고 있다.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신분 등”을 이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역으로 고용, 재화·용역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행정·사법절차 및 서비스의 제공·이용 네 가지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차별금지의 대상과 영역 그 자체로만으로도 사실상 노동현장과 관련된 비중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차별금지법이 절대 다수 평범한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뜻한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차별금지법이 노동현장에 끼칠 영향에 관한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 왔다. 다 아는 대로 보수 개신교계에서 성소수자 쟁점으로 반대의견을 과도하게 내세움으로써 일체의 합리적인 토론 자체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반대 때문에 다수, 사실은 그 반대하는 소수까지 포함한 이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오는 사안이 뒷전으로 떠밀리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다행히 근래에 노동계에서도 차별금지법이 지니는 효과를 검토하며, 노동권을 완전히 보장하고 노동현장에서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떤 내용이 보완되어야 하는지 논의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도 노동현장과 관련하여 차별금지법이 지니는 의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보수 개신교가 덧씌운 프레임을 벗어나 모든 사람의 평등권을 보장하는 하나의 규범으로서 차별금지법의 의의를 확인하고 알리는 것을 뜻한다. 성소수자 관련 쟁점은 그 자체로 오히려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확인해주고 있는 만큼 그에 관한 적극적 대응이 필수적이지만, 그야말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대의를 확인하고 알리는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2. 평등권 보장의 신학적 정당성

차별과 불평등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물질적 요소와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포함하여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곧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정의(正義) 실현의 요체인 분배와 인정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는 것을 뜻한다. 그 어떤 존재이든 각자는 저마다 고유한 특성을 갖기 마련이고 각기 고유한 특성으로서 차이를 지니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실존 조건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위계적으로 등급 매겨지거나 우열 또는 선악의 관계로 인식될 때 차별이 되며, 그 차별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불평등을 야기한다. 그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인간이 누구나 존엄한 존재로서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은 성서로부터 비롯된 신앙의 요청이자 동시에 오늘날 보편적 인권의 요청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고귀한 당신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하였다. 그 아름다운 삶이 파괴되어 당신의 백성이 억압받고 차별받을 때 하느님은 친히 구원의 손길을 펼쳐 해방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 구원의 손길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예언자들은 과부와 고아 이방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이룰 것을 선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권리를 박탈당한 죄인들을 위하여 세상에 왔고, 그들을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더불어 하나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적 약자의 삶을 보장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은 성서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출애굽 여정에서의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이어지는 계약법전(출애 20:22-23:33), 신명기법전(신명 12-26장), 성결법전(레위 17-26장)은 그 정신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일용할 양식의 필요성을 일깨운 주기도문(마태 6:11; 누가 11:3)을 비롯하여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 등은 그 일관된 정신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차별도 용인될 수 없다는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은 바로 그 성서의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근거한다. 성서의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삶의 보장을 위한 정의로운 분배의 이상을 함축하고 있지만 단지 물질의 분배 차원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실한 하느님의 행위에 상응하여 인간들 사이에서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곧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고귀한 존재로서 인정하는 가운데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람이 각기 존엄한 존재로서 그 어떤 조건에 의해서든 차별받지 않고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세계의 모든 사람이 따르는 보편적 인권의 요구이기도 하다. 인권이 참혹하게 유린당한 대전쟁의 참화를 겪은 인류는 국제연합(UN)의 ‘세계인권선언’을 통해 보편적 인권을 세계인이 따라야 할 가치로 확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및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통해 각 나라가 보편적 인권을 실정법 수준에서 확실히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아가 어린이․여성․난민․소수자 등과 관련한 각종 규약을 통해 인권보장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국제연합(UN) 및 관련 기구들이 한국사회의 인권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속적으로 권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국제노동기구(ILO)가 기본적인 사회권 보장을 위하여 노동권에 관한 핵심협약을 채택하고, 최근(2021.4.) 우리나라가 기왕에 비준한 4개의 협약에 이어 3개의 협약을 비준한 것도 같은 취지를 지닌다(* 표 참조).

요컨대 보편적 인권의 보장, 일체의 차별금지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정신에 부합하며, 오늘날 성숙한 인류문명의 요구이다.

3. 한국사회에서 노동배제의 역사와 현실

한국사회는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 양 측면에서 단기간에 놀라운 발전을 이뤄냈다. 양 측면에서 여러 지표들을 통해 볼 때 한국이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명암이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사회라고 할까? 그 발전된 면모 이면에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의 체감은 극심하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하고 그에 편승한 차별과 혐오의 현상 또한 만연해 있다.
특별히 오늘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위기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끌어 온 실질적 주체인 노동자의 권리와 삶의 실상은 외면당하고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을 포함하여 이른바 ‘중층적 분절노동시장’(김유선)으로 일컬어지는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차별의 문제가 심각하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정당한 기본권마저도 제약받고 있다. 헌법과 노동관계 법들은 모두 노동삼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권리는 보장되고 있지 않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남짓 밖에 되지 않은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서 노동자의 단결권의 행사에도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다. 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극한적인 쟁의행위에 나서는 일이 빈발하는 것은 정상적인 노사협상이 불가한 현실을 반영한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은 거의 예외 없이 사실상 불법화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형사상ㆍ민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적 규범으로 확립된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는 그 규범이 통용되고 있지 않다.
놀라운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기본권이 온전히 보장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각종 차별이 만연해 있는 것은, 이른바 한국적 근대화가 철저하게 노동배제체제를 기축으로 한 데 있다. 노동자를 경제적 차원에서 동원하였지만 정치적 차원에서 배제해온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다.
노동에 대한 억압적인 배제체제는 분단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일관되게 지속되어 왔다. 분단직후 이념의 대립 가운데 형성된 노동배제체제는 5․16쿠데타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본격화되면서 실질적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에 대한 경제적 동원과 정치적 배제의 작동원리는 그 시대에 확립되었다. 이후 노동법 개정은 끊임없는 개악의 과정이었다 할 만큼 노동에 대한 억압적 배제체제는 강화되었고, 1980년 신군부 집권과 더불어 그 억압적 배제체제는 법적․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전환 기점이었고, 이를 계기로 한 노동법 개정은 1980년 이래 거의 억제되었던 노동삼권을 상당 부분 복원하였다. 하지만 기존 지배체제가 사실상 지속된 데다가 자본의 지구화 현실 가운데서 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동 유연성이 강화되는 등 기존의 노동배제체제는 지속되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한계였다. 민주정부에서도 노동정책은 사실상 그 한계 안에 있었고, 보수 정부하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노동억압 정책이 실시되었다.
2016-2017년 촛불항쟁은 새로운 노동체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간 강고하게 지속되어 왔던 노동배제체제로부터 노동포용체제로의 전환, 곧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기대되었다.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정부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우며 ‘노동 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그 의지를 밝혔다. 일자리 정책, 차별해소와 비정규직 노동 정책, 노동기본권 및 노사관계 정책 모두 이전 정부들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의 확대,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과 상시 지속업무의 직접고용 원칙, 공공부문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최저임금 인상 등 모두 반길 만하였고, ILO 핵심 협약 비준을 통한 노조조직률 제고, 산별교섭 등 기업단위를 넘어선 단체교섭촉진제도 도입, 근로감독 강화, 노동인권교육 의무화 역시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국형 사회적 대화 기구를 만들어 노동존중 사회의 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는 것도 기대되는 바였다. 그러나 2021년 현재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의미 있는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노동배제체제는 강고하다. 더욱이 코로나19 위기로 노동의 위기는 더욱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
한국사회는 애초 자본과 노동의 불균형은 말할 것 없고, 노동시장 자체마저 심각하게 분절되어 있어 다양한 층위에서 차별현상이 노정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영세업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분절뿐 아니라 비정규직 내에서의 여러 균열 현상이 심각하다. 여기에 성별, 직무별, 학력별, 국적별 차별 요인까지 겹쳐 있다. 뿐만 아니라 특수고용노동자의 지위도 불안정한 상태이고, 아예 고용되지 않은 인력 범위까지 포함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4. 차별금지법이 노동현장에 미치는 효과

차별금지법이 그 장구하고 강고한 노동배제체제를 변경시킬 수 있을까?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자본과 노동의 불균형이 시정되지 않는 한 그 체제 자체의 변동이 곧바로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차별금지법 논의가 시작된 이래 한동안 노동계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최근 노동계는 차별금지법이 노동현장에 미칠 효과를 검토하며 그 제정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노동현장에 만연해 있는 차별현상을 시정함으로써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고 아울러 전사회적으로 차별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규범으로서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효과는 장차 노동배제체제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다. 그 의의를 몇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본다.
우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개별법으로 다룰 수 없는 중첩적인 차별현상을 체계적이고 일괄적으로 규율하기 위한 법률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고용과 관련한 차별금지를 규정한 개별법으로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 및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과 파견 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등이 있지만, 이들 개별법들은 서로 차이 나는 경우도 있을 뿐 아니라 중첩 차별현상을 규율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그 한계를 넘어 차별의 모든 사유와 영역을 포괄하여 규율함으로써 평등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나이든 여성이 겪는 차별의 경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중첩된 요인에 따른 고유한 차별현상을 제대로 규율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발의되어 있는 차별금지법안은 직접차별과 함께 간접차별을 구분하여 규정함으로써 차별의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간접차별은 법안이 예시하고 있는 이유 외에도 실질적으로 차별효과를 발생시키는 관행과 괴롭힘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노동현장에서 구조화된 차별요인을 엄밀히 판단하고 시정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업무와 직접 상관없는 토익 성적에서 청각장애인이 불이익을 받는 경우, 흔히 일어나는 성희롱과 괴롭힘 등을 규율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차별금지법은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을 규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 규정을 넘어 그 범위를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갖추고 있다. 근로자의 개념을 보면,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아니한 자라도 특정 사용자의 사업에 편입되거나 상시적 업무를 위하여 노무를 제공하고 그 사용자 또는 노무 수령자로부터 대가를 얻어 생활하는 자”를 포함하고 있고, 또한 “동일 사업장에서 특정 사업자가 다른 사업자들을 사실상 지휘·감독하는 경우, 일방 사업자가 특정 사업자의 사업과 관련이 없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임을 입증하지 아니하는 한 그 사업자의 근로자는 특정 사업자의 근로자로 본다.”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더불어 사용자에 관해서는 “근로계약의 체결 여부와 상관없이 당해 근로자의 근로조건 등의 결정에 대하여 사실상 지휘·감독권이 있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의 지위와 관련하여 중요한 규정에 해당한다. 고용형태에 따른 차별금지와 관련하여 중요한 하나의 판단기준으로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기준 설정 문제, 특수고용노동자의 지위 문제 등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어 과연 차별금지법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인지 의문이기는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적어도 그에 대한 판단기준은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고용 분야와 관련하여 예상되는 차별금지법의 효과는 그 의의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노동현장에서 차별을 차별로서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숙제는 남아 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노동배제체제를 넘어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가 당연하게 보장되는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합의와 이를 이끌어가는 정치적 대안이 강구되어야 실효를 거두게 될 것이다.

5. 덧붙이는 말

2007년 처음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을 때 그 반대세력은 보수 개신교에 한정되지 않았다. 당시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 역시 주요 반대세력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논의 국면에서 전경련의 입장은 거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입장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대신해서 싸워주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보수 개신교가 성소수자 조항을 빌미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상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새겨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자본은 평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본은 차별이 정당화되는 조건 가운데서 유리한 기회를 누린다. 한국사회의 극심한 분절적 노동시장은 자본의 편에서 볼 때 너무나 좋은 조건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그 중층적인 분절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시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반길 리 없다. 어떤 구체적 사유이든 예외적 차별이 용인된다면 그것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차별을 용인하는 사유를 유발한다. 그 연쇄과정은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신분차별이 인종차별로, 그것이 다시 성차별로, 다시 비정규직 차별로 이어져 왔다. 자본은 그 차별을 용인하고 이용하며 때로는 강화한다. 결국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논리는 자본의 이익에 봉사한다. 그 현실을 뒤집어보면 분배와 인정의 문제가 그렇게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보수 개신교가 성소수자 조항을 빌미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서 결국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질서에 편승하고 노동자의 삶을 옥죄는 결과를 빚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이래 계급관계에 기초한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화와 함께 성소수자를 억압한 역사를 환기한다. 성소수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지 그 특정 대상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차별은 용인해도 된다는 생각은 차별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복음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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