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바라보는 국가보안법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12-28 10:02
조회
137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을 위한 기독교대책위원회 출범식 및 세미나
2022년 12월 27일(화) 저녁 7시 / 기독교회관 조에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바라보는 국가보안법

최형묵(천안살림교회 / 기독교윤리학)


1. 국가보안법 제정과 남용의 역사

1-1.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 대한민국 법률 제10호로 제정되었다.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황동하, 4). 일제의 잔재인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모방한 그 법은 ‘형법이 제정되기 전 건국 초기의 비상사태에서만 적용되는 임시조치법’으로서 한시적인 성격을 지녔다(민변, 14). 그 제정 배경에는 명백한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직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시행되자 위기에 처한 집권세력이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을 빌미로 서둘러 제정한 것이다. 반민족 행위자 처벌 정국을 반공 정국으로 바꾸려는 것이 그 정치적 동기였다(민변, 13).
1-2. 1953년 휴전협정 직전 형법이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은 전시의 치안 상태 및 국민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을 고려한다는 명분으로 존속되었다(민변, 14). 애초 6개조에 불과했던 그 법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되고 보강되었다(황동하, 5).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그 해 7월 3일 별도의 반공법을 제정하여 국가보안법을 보완하였다. 국가보안법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있는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이었지만, 반공법은 목적을 따지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언행 자체를 처벌대상으로 삼는 포괄적 성격을 지녔다. 그 포괄적 처벌조항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반공법을 국가보안법으로 흡수 통합할 때 그대로 반영되었다. 고무ㆍ찬양, 회합ㆍ통신, 편의제공, 불고지죄 등 악명을 떨치고 있는 그 조항들이다(황동하, 9).
1-3. 국가보안법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제약하는 가운데 정권유지를 위한 유력한 수단이 되어 왔다. 사실상 이적단체로부터 국가를 보호한다는 목적보다는 정권에 저항하는 행위와 노동운동을 포함한 민중운동을 탄압하고 나아가 국민의 사상까지 통제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어 왔다(서희경, 436). 그것은 이념이 다른 타자를 악마화함으로써 증오와 적대를 제도화하는 폐해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생각과 말 자체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은 점에서 내면적인 양심의 자유까지 침해하고 있다(민변2, 15-70). 대한민국은 ‘이면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말(백낙청)은 헌법을 뛰어넘는 국가보안법의 위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남북간 체제 대결의 부차적 결과에 그치지 않고 사회 내의 여러 ‘분단’ 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양산한다. 이른바 ‘남남갈등’을 조장할 뿐 아니라, 여러 차별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 예컨대 ‘빨갱이’ 또는 ‘종북주의자’라는 규정은 모든 합리적ㆍ윤리적 판단을 정지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그렇게 특정한 대상을 비인간화하는 논리는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1-4. 1948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이래 몇 차례 폐지 기회가 있었지만, 74년이 지난 오늘 2022년에 이르기까지 폐지되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다. 첫 번째 기회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때였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로 무산되었다. 두 번째 기회는 1988년 정부의 7.7선언을 통한 남북간 교류 확대와 동구권 국가들과의 수교 의지 천명, 그리고 1991년 남북간 유엔 동시 가입이 성사된 즈음이었지만, 역시 폐지되지 않았다. 1990년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 제7조의 제한적 적용을 전제로 한 한정합헌결정이 났지만, 계속 존속한 국가보안법은 국민 내부 통제수단으로 위력을 발휘하였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국가보안법 개폐를 천명한 것은 세 번째 기회였다. 당시 정부의 여러 개혁입법들(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법, 언론법, 사학법)이 동시에 반대에 부딪힌 가운데 국가보안법 폐지는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게 존속한 국가보안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하는 가운데 국민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민변, 12-24; 민변2, 15-70).
1-5. “국가보안법은 해방 이후 냉전과 대결의 76년 역사 속에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내면을 점령한 법이다. 국민 각자의 인권과 평등을 지켜주지 못하는 헌법을 밟고 올라 인간존엄을 파괴하고 사상ㆍ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고 평등권을 침해하면서도 그 침해의 부당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 말 그대로 헌법 위의 법이다.”(민변, 21)


2. 국가보안법을 바라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

2-1. 국가보안법이 지니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거는 넘쳐나도록 풍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문제를 직접 다룬 본격적인 신학적 논고가 거의 없는 상황은 매우 안타깝다. 이 글은 서설적 시론에 지나지 않지만, 국가보안법이 지니는 문제를 진단하는 신학적 논거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주요 개념을 소개하고, 나아가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다루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문제의 틀이 무엇인지 확인함으로써 이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관점을 세우고자 한다.
2-2. 국가보안법이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것은 물론 보편적 인권에 반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국가안보’ 앞에서 그 누군가는 ‘비국민’으로서 처벌을 받고 심지어는 ‘비인간’으로서 취급당한다.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를 현저하게 위협하는 행동 이전에 생각과 말만으로도 처벌받는 것을 합법화한다. 그 점에서 국가보안법은 반인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2-3. 국가보안법이 지니는 그와 같은 반인륜적 성격을 주목할 때, 보편적 인권을 정당화하는 주요 신학적 개념들을 그 비판의 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으로는 이른바 천부인권의 근거가 되는 하느님의 형상 개념이다(창세 1:26-27). 이 개념은 한편으로 피조된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고귀함을 승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인권의 신학적 근거가 된다. 예수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한 영혼의 소중함을 일깨운 것(마태 10:28; 누가 12:4-5, 누가 15:1-7) 역시 그 어떤 외적 폭력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마가 2:27)는 말은 실정법적 제도의 폭력에 휘둘려서는 안 될 인간 삶을 환기한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갈라 3:28 등) 개념 또한 보편적 인권의 신학적 근거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2-4. 이상의 신학적 개념들은 보편적 인권을 옹호하는 신학적 근거로서 적실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특히 국가보안법과 관련하여 그 남용이 초래하는 반인권적 효과를 비판적으로 조명할 때 매우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신학적 입장에서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다루고자 할 때에는 인간의 삶에 앞서는 국가안보의 정당성에 관한 성찰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과연 국가권력의 절대화를 뒷받침하는 법률이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부터 문제시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오랫동안 통찰을 시도하고 지혜를 쌓아 왔다. 그리스도교의 역사 자체가 그에 관한 분투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국가권력에 대한 통찰은 신앙의 중심적 과제였다.
2-5. 오늘 국가보안법에 관한 신학적 논고가 매우 빈약한 것이 현황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헌정질서를 유린한 유신체제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국민을 억압하고 스스로의 체제를 절대시할 때 이에 맞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국가권력의 절대화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의 기본권은 국가가 있기 이전에 하나님께 받았다. 국가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인간의 기본권인 생명과 재산과 자유를 지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축복받은 상태를 즐길 수 있게 보장하는 정치적 한 단위다. 정부는 이와 같은 목적으로 나라 살림을 위임받은 공복이다. 따라서 국가와 정부는 차원이 다르며 정부에 대한 충성이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니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로마 13장)는 말은 권세에 대한 복종을 말하기에 앞서 집권자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집권자는 위와 같은 기능을 위임받은 자로서 그 한계 안에서만 그 권세를 행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기본권인 생존과 자유를 뺏는 권세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다. 절대권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절대권을 도용하여 상대적인 것이 절대화할 위험성을 막기 위해 땅 위에 어떠한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십계명). 그리스도교는 상대적인 것이 절대화된 것을 우상이라 하고 그것과의 투쟁을 지상명령으로 삼는 전통을 갖고 있다.”(<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 1974. 11.)


3. 하느님의 주권과 지상의 국가권력

3-1. 하느님의 주권 아래서 지상의 권세, 곧 국가권력의 한계를 설정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오랜 기원을 갖고 있다. 그 입장은 성서적 신앙을 형성한 원초적인 사건, 곧 출애굽의 역사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이후 지속된 제국과 국가권력의 횡포에 맞서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3-2. 성서에서 하느님의 주권 개념은 인간사회 안에서 지배와 억압을 부정하고,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그 백성이 모두 동등한 주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근거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제국의 권력체제로부터 탈출하여 해방된 평등주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그 의의는 사사 기드온 이야기(사사 6-8장)에서, 그리고 현실적 요구로서 왕권체제의 수립 요구에 맞선 사무엘의 경고(삼상 8:4-17)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서는 고대 근동에서 신의 주권이 지상 국가의 이념을 정당화해준 것을 거부하고, 백성을 위하여 권력을 제한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성서는 하느님의 주권에 의한 제한된 왕권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서구의 정치적 혁명과정에서 등장하여 오늘날 국가권력의 일방적 집중을 견제하는 장치로서 일반화된 삼권분립의 정신은 이와 같은 성서의 제한된 권력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3-3. 하느님의 주권 개념은 국가권력이 형성된 것과 동시에 등장한 예언자들의 선포에서도 일관된 핵심이었다. 예언자들에게서 하느님의 주권은 백성들 사이에서 정의실현 요구로 구체화되었다. 하느님의 주권은 정의의 근거이자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한 방패막이였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짓밟고 불의를 일삼는 국가권력에 대한 예언자들의 질타는 얼마나 신랄한가! 스스로를 절대시하며 불의를 저지르는 국가권력은 설령 그것이 민족적 정치공동체의 한 형식이라 하더라도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예레 21장 등). 결국 현실의 권력체제가 정의를 이룰 가능성이 희박해졌을 때 하느님의 주권 개념은 ‘새 하늘 새 땅’으로 표상되는 하느님 나라와 메시아 통치에 대한 대망으로 급진화한다(이사 65:17 등).
3-4.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구약성서의 입장은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로 재확인되고 강화되었다. 예수의 말씀과 삶의 핵심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궁극적 목적으로서 종말론적 성격을 지녔고, 그 나라와 지상의 나라는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상의 통치자들에 대한 비판(마가 10:42), 빌라도와의 대화 가운데 당신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 것(요한 18:36)은 하늘의 나라와 땅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 준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논란(마가 12:13-17; 마태 22:15-22; 누가 20:20-26)은 흔히 땅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가 병존하는 현실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황제의 것에 골몰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것을 강조한 것으로 봐야 한다.
3-5. 사도 바울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이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한 세상의 통치를 주장하였지만(고전 15:24; 골로 2:10,15 등) 또 다른 한편 권위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였다(로마 13:1-7). 이로부터 로마의 ‘황제숭배’는 거부하지만 제국 내의 ‘공공질서’를 용인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결정되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을 말한 사도 바울의 주장은 끊임없는 주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 주장은 가이사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한 예수님의 말씀과 더불어 교회역사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관련하여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느님의 주권 또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더불어 국가권력이 병존할 수 있다는 입장이 형성되었다. 이는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공동선 또는 공공성의 실현 요구에 부합하는 한 국가권력의 존재가 용인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3-6.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하늘의 나라와 땅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에 대한 관계설정 문제는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어 왔고, 역사적 국면에 따라 각기 그 해법이 강구되어 왔다. 그 가운데서 주요 관심사는 세속국가와 동일시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구별하고 과연 하느님의 주권이 어떻게 땅의 현실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중세기에 하느님 나라를 대리하는 것으로 간주된 교회가 독단에 빠져 세속국가를 지배하는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그것은 사실상 하느님 나라가 완전하게 세속 국가권력의 속성에 통합되는 자가당착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 과오를 넘어서게 하는 근거가 되었고 국가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가다듬게 하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어떤 권위에 복종하고 저항할 것인가를 부단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3-7. 근대 헌정국가가 등장한 이래 오늘날 정교분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종교 또는 교회로부터 국가의 분리를 뜻하며(중세적 질서의 종식) 또한 역으로 국가에 의한 종교 또는 교회의 간섭(신앙의 자유 침해 등)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와 종교가 무관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양자는 분리되어 있으되, 인권의 보장 등 공동선의 실현을 위한 목적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한편 역으로 양자 가운데 어느 한편이 그 목적을 위배할 때 피차간 저항과 간섭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영역에 관철되는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 그것이 배타적 독단이 아니라 다른 신앙과 신념체계를 지닌 사람들과 공존하는 현실에서 보편적 공동선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도록 하는 과제를 오늘 그리스도인은 짊어지고 있다.
3-8. 요컨대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으로서 ‘국가보안’이라는 개념 자체가 용인되지 않는다. 그것이 용인될 수 있다면, 그것은 국가가 공동선에 부합하는 정의를 이룸으로써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수단으로서 복무하는 조건 안에서일 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은 그 남용으로 인한 인권침해와 인륜파탄의 효과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의 측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다. 사실상 특정 체제와 권력의 절대화에 지나지 않지만 국가가 스스로를 절대화할 때 그것은 명백히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4. 오늘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면?

4-1. 오늘날 통상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실제 그에 걸맞는지의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적어도 그와 같은 정치적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동안 별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최근 그 개념은 확실히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다양한 현실 가운데서 자유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근래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보다는 ‘자유 민주주의’가 강조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원리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들이댐으로써 다른 한정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그 상상력을 제한하고 자유시장경제 원리만이 최상의 가치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지극히 이데올로기적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4-2. 그러나 공통의 사회계약으로서 대한민국 헌법은 과연 자유시장경제의 원리를 유일하게 배타적으로 채택하고 있을까? 헌법이 사유재산권과 사적 경영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헌법은 평등의 이념을 매우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는 일제하 독립운동세력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의 분열을 극복함과 동시에 사회주의 계열의 평등주의 이념을 광범위하게 포섭하려는 고려에서 비롯되었다(서희경, 22). 제헌헌법 제정 당시 논란이 되었던 노동자 경영참여권은 빠졌지만 이익균점권이 포함되었던 것도 그와 같은 성격을 반영한다. 1987년 헌법에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제119조)이 포함된 것도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애초 헌법정신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정신은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셈이다.
4-3.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닌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그 포용적 가능성을 차단하고 특정 세력의 기득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 의도는 역사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등장하였을 때 그 일의적 요건으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내세웠던 것을 망각하고 시장의 자유만을 강조하는 데서 명백히 드러난다. 지금 한국사회의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자유만 알 뿐 인간의 자유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자유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그 무엇보다도 각 개인의 온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밑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단지 사람의 생각과 말만으로도 처벌 가능한 악법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을 두고 어찌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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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하 엮음,『무섭고도 황당한 국가보안법』(서울: 그림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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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교회와 국가의 관계 고찰”, NCCK신학위원회 엮음,『촛불 민주화 시대의 그리스도인』(서울: 동연,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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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原繁/윤인로 옮김,『국가와 종교』(서울: 소명출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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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V. Pixley/정호진 옮김,『하느님 나라』(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Lutz Pohle/손규태 옮김,『그리스도인과 국가』(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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