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의 맥 08]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해질까? - 욥의 항변과 상식을 뒤엎는 지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6-05 22:02
조회
1054
2019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2019년 4월 3일~7월 10일 매주 수요일 오후 7:00~8:30
최형묵 목사

<8> (6/5)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해질까? - 욥의 항변과 상식을 뒤엎는 지혜

1. 삶의 지혜 - 두 가지 삶의 지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7).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그 희망이 배반당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배워 왔다. 하지만 착하기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영악한 사람들이 출세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이 부조리한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아무런 잘못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좌절의 고통을 안아야만 하는 사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성서의 지혜문학은 이와 같은 물음에 관해 깊은 통찰을 하고 있다. 상식적 지혜와 전복적 지혜 / 경건한 지혜와 불경한 지혜.

2. 지혜문학

구약의 다른 모든 책들이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씌어진 책이라면, 지혜서는 그 출발점이 ‘신앙’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다. 구약의 지혜문학은 이스라엘 자생적인 것이라기보다 고대근동 세계(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에서 일찍부터 발전된 것으로 고대의 ‘철학’이었고 고대의 지성적 활동의 집합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 종착점에서는 신앙적 입장과 만난다(지혜문학의 이스라엘 토착화).
1) 잠언
잠언은 내용상 대개 ‘실용적 지혜’와 ‘신학적 지혜’로 구별된다. 실용적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바르고 의롭게 사는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 그 저변에는 인과의 법칙이 깔려 있고 그 결과 또한 대단히 현세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러나 실용적 지혜에서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선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는 신학적 측면이 강조되어 강한 사회윤리성을 포함한다(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 등). 신학적 지혜란 지혜 자체를 독립적인 실재로 보아 ‘인격화’의 단계를 거쳐 ‘신격화’로 발전한 것을 말한다.
2) 전도서
히브리어 Koheleth은 ‘전도자’ ‘설교가’를 뜻하는데, 희랍어 칠십인역에서 Ekklesiastes로 번역되었고 영어 책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전도서의 주제는 ‘허무’이다. 그러나 허무주의를 전파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유리된 ‘인간중심적’인 가치와 그것을 얻기 위한 노력이 헛되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다. 전도서는 오히려 삶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으로 과욕을 피하고 절제하면서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전한다.

3. 부조리한 현실과 고통의 기원에 관한 물음의 보편성 - 욥기

『전도서』와 더불어 『욥기』는, 인간 삶에서 제기되는 보편적인 물음을 집약해 놓은 고대 지혜문학의 최고봉으로 찬사를 받아 왔다. “성서 안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책”(루터). “인간이 쓴 시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테니슨). “성서 안팎에서 욥기에 비견할 만한 책은 없다”(칼라일).
『욥기』의 기록 연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략 바빌론 포로기(기원전 586~538년) 이후로 추정되지만, 그 기원이라는 점에서는 훨씬 더 고대로 소급된다. 『욥기』는 사실 고대 근동 지혜문학이 집약된 하나의 작품이다. 흔히 생각하는 상식적인 지혜가 아니라 그 상식에 어긋나는 현실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 색다른 지혜를 추구한 노력의 결실이다.
『욥기』가 완성된 포로기 이후의 역사적 상황은 옛 궁정 지혜의 전통을 따르는 상식적인 지혜론이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니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 이상 어떤 낙관적 기대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예언의 전통이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색채를 띠어가고 있을 때, 낙관적 지혜의 전통에 대한 비판적 반성으로서 과거의 또 다른 지혜의 전통을 계승하는 『욥기』가 형성된 것이다. 유다 국가의 멸망과 유배, 그리고 그 유배로부터 풀려나고서도 도무지 미래를 낙관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분위기 자체가 인간의 고통에 관한 물음을 새삼 환기시키기에 적절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서 예로부터 제기되어 온 인간 고통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새삼 조명되었다.

4. 두 세계의 대결, 그리고 열린 삶

1) 두 세계의 대결
고통을 겪는 욥에게 친구들이 달려온다. 그들은 물론 욥과 논쟁을 벌이기 위해 달려 온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친구를 위로하고 나아가 친구가 그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방법을 충고하기 위해 달려온다. 그들은 선의로써 욥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친구들의 말은 위로를 주지도 못하고 나아가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다. 친구들의 주장은 욥을 더욱더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선의를 통해 다가오는 악이라고 할까? 우리들 모두가 쉽게 경험하는 상황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악의는 손쉽게 배척할 수 있다. 그러나 선의 가운데서 다가오는 악은 분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항변하는 욥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세계관 속에 감추어진 악의와 기만을 폭로한다.

2) 고통 가운데서도 파멸하지 않는 삶
기독교의 역사에서 욥은 마치 인내와 순종의 표상처럼 이해되어 왔다. 고통 가운데서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와 같이 이해되어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욥은 그와는 정반대로 끊임없이 항변과 도발을 일삼는 사람이다. 고통 가운데서 인내와 순종을 강조한 것은 친구들의 입장이었을 뿐이다. 친구들은 그렇게 고통을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세계 자체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포기한다. 하지만 욥은 친구들이 믿고 있는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도무지 해명되지 않는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제기를 함으로써 세계 자체를 새롭게 묻는다.
『욥기』의 결론은 사람들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진정한 유신론자처럼 보였던 친구들을 무신론자로 평결 내리는 반면 불경한 무신론자처럼 보였던 욥을 진정한 유신론자로 평결 내린다. 이 사실은 인간들이 고통당하는 현실 가운데서도 오직 침묵할 것을 강요하는 요지부동한 세계 자체가 오히려 무신성(無神性)을 드러내는 반면, 거꾸로 침묵을 강요하는 그 세계에 이의제기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틈새를 여는 주체의 저항이 진정한 유신성(有神性)을 입증해 준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욥기』가 주장하는, 상식에 반하는 신학이다. 『욥기』는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폐허의 잿더미로 전락하지 않는 인간 삶에 대한 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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