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성서의 맥 13] 종말과 시작, 또는 파국과 건설 - 묵시록의 세계와 혁명의 기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9-07-17 22:14
조회
100
2019년 상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2019년 4월 3일~7월 10일 매주 수요일 오후 7:00~8:30
최형묵 목사

<13> (7/17) 종말과 시작, 또는 파국과 건설 - 묵시록의 세계와 혁명의 기대

요한계시록 만큼 다루기 어렵고 다양한 해석을 갖고 있는 책이 없다. 그것은 이 책이 갖고 있는 독특한 언어와 상징성 때문이다. 이 독특한 언어와 상징을 저마다 임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생기고 있지만, 우리는 성서 전체의 맥락, 그리고 이 책이 처해 있던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건강한 신앙의 형성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1.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상황

1세기말 2세기중엽 로마당국은 지역의 종교들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이었다. 그것은 제국의 안정과 충성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의 민족들은 로마의 황제숭배를 용인하는 한 아무런 문제없이 자신들의 종교를 지킬 수 있었다. 더욱이 많은 민족의 종교들이 다신적 신앙이라는 점에서 황제숭배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일신을 섬긴 유대인들은 이례적으로 상당한 종교적 자유를 누렸다. 그것은 로마당국이 유대인들에게는 그 신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통치하는 데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의 보호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하게 황제는 물론, 로마의 신들을 거절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부터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된 이유다.
요한계시록은 그 가혹한 박해를 가한 로마의 실체를, 6:1~7에서 네 개의 봉인이 떼어지면서 네 기사가 출현하여 땅에 재앙을 가져 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기사는 승승장구하는 권력을, 둘째 기사는 막강한 군사력과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을, 셋째 기사는 상인들의 수탈과 탐욕을, 넷째 기사는 죽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강력한 권력의 정복과 지배하에서 민중들이 처한 상황을 말해 준다. 로마의 신들을 인정하고 그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지배현상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민중해방의 복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현실은 용납될 수 없었다. 이를 용인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로마당국에 ‘불온한 자들’로 낙인찍혔고 따라서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된다.
저자 ‘요한’은 밧모섬에서 서신을 쓴 것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밧모섬은 대리석 채석장이 있는 죄인들의 유배지였다. 죄인들은 그곳에서 강제노역을 하였는데 아마도 ‘요한’ 자신이 그러한 경험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순교자들이 이미 피를 흘렸고(2:13; 6:9), 환난의 때는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를 위협하고(3:10), 황제는 신으로서 숭배를 요구했으나(13:4; 12~17; 16:2; 19:20) 그리스도인들은 거절했다고 묘사한다. 요한이 ‘여섯째 황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17:10) 그 당시의 황제가 누구인지 논란이 많지만, 아마도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로마의 일곱 황제중 여섯째 도미티아누스(81~96)황제일 것으로 보인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누구보다 황제숭배를 강요하였으며, 폭정으로 유명하다.

2. 요한이 전하는 중심 메시지

그와 같은 박해의 상황에서, 박해를 피하고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과 타협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확인된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지녔던 사랑을 버렸고(2:5),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었고(2:14),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고(2:20),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질책을 받는다(3:15). 그러나 빌라델피아 교회만,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 메시지의 초점이 있다.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알아듣기 어려운 상징적인 이야기로 해야만 했던 까닭이 무엇일까? 그 문제는, 우리가 똑같은 박해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공개적이고 명시적인 언어로 이야기하기 어려울 때, ‘비밀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묵시적인 현상(묵시운동)과 묵시적인 언어 현상(비의 / ‘유언비어’)은, 현대 사회에서도 나타나지만, 고대 사회의 민중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나타난 그와 같은 현상의 한 표본이다.

3.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비의적인 언어들은 공동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경험 밖의 세계 사람들에게는 알기 어려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관한 다양한 해석이 분분한 사연이 여기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서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예전적인 것, 신화론적인 것, 그리고 권면의 자료들을 포함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 역시 이러한 복잡한 내용과 형식이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상징적 맥락을 짚어봄으로써 그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다.
우선 요한계시록에는 중요한 상징적 숫자들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먼저 ‘완전’, ‘충만’ 등을 뜻하는 ‘7’이 이 책의 전반적인 구조를 이끌어가는 중심 숫자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메노라’(가지가 일곱 개 달린 촛대)와 같은 구조로, ‘일곱’ 교회를 지목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책의 내용 구조 자체 또한 그 구조를 따르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또 주목해야 하는 숫자는 ‘6’이다. ‘7’과 상반되는 의미의 6은 ‘666’으로 네로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히브리어 철자로 숫자를 나타내는 ‘게마트리아’에 따르면, ‘666’은 ‘네로 황제’(그리스어 Neron Caesar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철자로 환원하여 합산)를 뜻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이전의 네로 황제(54~68)를 곧바로 지칭하기보다 ‘부활한 네로’, 곧 ‘폭군’을 상징한다. ‘4’와 ‘12’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주목해야 할 숫자이다. ‘사방’을 나타내는 ‘4’는 새로운 창조와 질서를 뜻한다. 7:1~8의 땅의 네 가지 바람,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는 천사에 관한 묘사에는, 재앙을 새로운 창조와 질서로 보는 의도가 깃들어 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이 새로운 창조를 통해 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12’ 지파에서 12,000 명씩 144,000 명이 구원의 보증을 받는다.
이러한 상징은 구약의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의 상징들과 유사하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구약성서로부터 이어지는 상징적 맥락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에서 요한계시록은 옛부터 이어져 온 상징과 마찬가지로 새 예루살렘을 그린다. 전 우주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상징인 ‘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이 개인적이며 사적인 것이라기보다 사회적이며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구원은 새로운 사회를 낳는다. 이 ‘도시’는 하늘에서 설계되었으나 땅 위에 세워졌다(21:10). 이제 하나님께서 사시는 집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21:3). 이 도시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리기 위한 성전이 불필요하다. 도시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갈라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가 새로운 구원의 공동체에서 무너진 것이다. 이로써 공동체 내의 거룩한 삶으로 완성되는, 성서의 구원의 파노라마가 막을 내린다.
요한계시록이 보여주고 있는 종말론적 세계관은 낙관적 변화의 기대가 무너진 곳에서 일어나는 근본적 변화에 대한 기대로서, 이후 역사에서 혁명적 역사인식의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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