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01] 근대 여명기 기독교의 수용과 민권의식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5-03 21:05
조회
167
천안살림교회 2023년 상반기 수요 강좌 제1강 / 2023년 5월 3일(수) 오후 7시
주제: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 / 강사: 최형묵 목사

제1강(5/3) 근대 여명기 기독교의 수용과 민권의식

1-1. 세계사에서 근대의 시작은 논란이 많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일찍이 근대적 문명이 형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팍스몽골리카’ 이후 초기 근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보면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1-2. 그러나 오늘날 ‘근대’라는 개념은 서구사회에서 정치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가 등장한 시대로 대개 이해된다. 이는 거시적인 ‘근대’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후기 근대에 해당하며, 이것이 오늘날 대개 좁은 의미의 ‘근대’로 통용된다. 특별히 18세기 후반 ‘대분기’를 기점으로 동서양은 역전되며, 이 맥락에서 동아시아는 낙후된 사회로 평가된다.

2-1. 한국사에서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이전에 몇 차례 접촉 가능성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또는 발해 시대에 당나라 시대에 성행한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와 접촉, 고려시대 시대 원나라를 통한 접촉,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을 통한 접촉 계기, 그리고 청나라의 인질이 된 소현세자(1645년 귀국)를 통한 접촉 계기 등이 그 예이지만, 현재 기독교와 연속성이나 영향은 없다.
2-2. 개신교의 경우에도 몇 가지 접촉 계기가 있다. 1653년 하멜 표류, 1832년 귀츨라프의 태안 고대도 정박, 1866년 제네럴셔먼호를 탄 토마스 목사의 대동강 진입 등이 그 예이지만, 이 역시 현재 기독교와 연속성은 없다.

3-1. 세계 선교사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구교나 신교 모두 한국인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 본격적인 선교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3-2. 18세기 중엽 이익을 중심으로 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 이승훈이 1783년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에 가서 1784년 1월 세례를 받아 최초의 천주교인이 되었다. 1789년 즈음에는 조선에 1천 여명의 천주교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3. 애초 중국선교를 주도하였던 예수회는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취하였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1603년 출간)는 그 입장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천주교 공동체가 막 형성될 즈음 선교의 주도권은 도미니크수도회, 프란체스코수도회 등으로 넘어갔고, 로마 교황청은 조상제사를 금지하게 되었다. 1784년 최초의 선교사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였다. 이 때 4천 여명의 신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수 년 후 1만 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827년 이후에는 교황청이 직접 주도하는 가운데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가 위임되었다.
3-4.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는 조선사회에서 불온시되었고, 정치적 국면과 얽혀 극심한 탄압을 겪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천주교는 양반, 중인층을 넘어 여성, 평민, 천인층에게 전파되었다. 여기에는 정약종이 쓴 『주교요지』(主敎要旨) 등 한글판 교리서가 크게 기여하였다.

4-1. 개신교의 한국선교는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소속의 두 선교사, 곧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1874년 만주에 도착하면서 그 계기가 형성되었다. 만주지역은 주로 의주 지역 상인들이 교역을 위하여 넘나드는 공간이었고, 여기서 선교사와 접촉이 이뤄진다. 로스는 한 의주 상인에게 한문성서와 전도책자를 전달하였다. 이 책자를 돌려 읽은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이 1879년 맥킨타이어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고 이어 그 책을 돌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백홍준도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1880년경에는 의주에 한반도 최초의 개신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4-2.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직후 1876년 4월 의주 상인 이응찬과 로스, 맥킨타이어가 만나 한글 성서번역에 착수하였다. 1882년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가 출간된 이래 1887년 최초의 한글성서 『예수성교전서』가 출간되었다. 주로 서북지역 방언으로 번역된 이 성서는 한국사회 민중들에게 기독교가 뿌리 내리는 기초가 되었다.
4-3. 한편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들도 기독교를 접하고 수용하였다. 전라도 양반출신 이수정은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미국성서공회 일본 책임자 루미스와 함께 한글로 성서를 번역하였다. 이수정의 번역은 국한문 혼용체였다. 1885년 4월 최초의 한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항에 입국할 때(* 의료 선교사 알렌의 입국 1884년) 손에 들린 것은 이수정의 한글판 『신약마가복음서언해』였다. 선교지에 처음 도착한 선교사들의 손에 개종자가 현지어로 번역한 성서가 들려 있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5-1. 한국인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게 된 동인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조선의 봉건사회 해체기 대안적 세계에 대한 기대와 직결되었다.
5-2.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 천주교는 낡은 봉건 질서를 대신하는 일종의 ‘사회복음’으로서 역할을 하여, 한국의 근대 사상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기독교의 수용으로 봉건적 조선사회에 가해진 가장 큰 충격은 “모두가 신의 자녀라는 믿음”이었다. 그 믿음과 더불어 그간 조선사회를 떠받쳐왔던 세계관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1) 정교일치의 유교적 사회 구성 원리의 균열, 2) 조선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통치의 삼중구조(정치, 교육, 종교) 가운데 유교적 의례와 그 기제들의 정당성 부정, 3) 신분적 수직적 질서에서 만민평등의 수평적 질서로의 변화 등이다.
5-3. 이로부터 민중의식이 자극되어 평등의식이 형성이 형성되었다. 이는 문해인민(文解人民)의 등장과 함께 이뤄진 것이다. 심지어 고유사상인 동학(東學)마저도 서학(西學)에 대립하는 것으로 형성될 정도로 그 파급효과는 적지 않았다. 결국 이는 민족의식의 형성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민족은 평등의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5-4. 개신교의 수용 역시 크게 보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인간관, 더불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요 자매라는 평등한 인간관은 전통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근대적 주체를 형성하는 결정적 계기를 부여한 개신교의 신앙은 그 파급효과가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5-2. 다른 한편 개신교의 수용기에는 근대의 제도와 문물(교육, 의료 등)이 동시에 수용되었다. 이로부터 서구문명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하는 경향 발생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바로 그 성격 탓에 기독교가 근대화 구상에 끼친 영향은 훨씬 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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