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죄한 사람들이 흘린 피로 지켜지는 세계라면... - 예레미야 22:3[정용택 목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2-14 13:28
조회
5405
2017년 2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죄한 사람들이 흘린 피로 지켜지는 세계라면...
본문: 예레미야 22:3
정용택 목사

1. 유다의 멸망이 왜 므낫세 때문인가?

구약성서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 따르면, 남왕국 유다가 멸망한 것은 주전 586~587년 경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 북왕국과 분열된 이후 르호보암을 시작으로 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 총 20명의 왕이 남유다를 통치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남유다의 발흥과 멸망에 대해 역사적으로 서술하는 구약성서 열왕기하에서는 유다 멸망의 책임을 단 한 명의 왕에게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 왕이 누구인지 한번 맞춰보세요. 그 왕은 12세의 나이로 즉 주전 697년에 왕위에 올라 642년까지, 남왕국 북왕국의 그 어떤 왕보다도 오랜 시간인 55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이스라엘 전체역사에서 최장).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대목이 있습니다. 제가 말한 왕의 사망 및 퇴임년도로부터 유다의 멸망년도까지는 아직 55년 정도가 남아있었습니다. 그 왕이 물러나고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그 시대의 기준으로 봐도 두 세대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 왕 이후로 그의 아들인 아몬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까지 총 여섯 명의 왕이 더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남왕국의 멸망의 책임을 열왕기서는 그 왕 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을까요? 도대체 그의 시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혹은 그 왕은 무슨 크나큰 실정을 저질렀기에 두 세대나 지나서, 그것도 뒤로 여섯 명의 왕이 더 있었는데도, 정작 나라가 멸망한 것의 책임을 역사 속에서 혼자 다 뒤집어쓰게 된 것일까요? 도대체 뭔 짓을 한거죠? 일단 그 왕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성서1 [왕하 24:1-4]
(1)여호야김이 다스리던 해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왔다. 여호야김은 그의 신하가 되어 세 해 동안 그를 섬겼으나, 세 해가 지나자, 돌아서서 느부갓네살에게 반역하였다. (2)주께서는 바빌로니아 군대와 시리아 군대와 모압 군대와 암몬 자손의 군대를 보내셔서, 여호야김과 싸우게 하셨다. 이와 같이 주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은, 자기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서 하신 말씀대로, 유다를 쳐서 멸망시키려는 것이었다. (3)이것은, 므낫세가 지은 그 죄 때문에 그들을 주 앞에서 내쫓으시겠다고 하신 주의 말씀이, 유다에게서 성취된 일이었다. (4)더욱이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예루살렘을 죄 없는 사람의 피로 가득 채운 그의 죄를, 주께서는 결코 용서하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이 본문의 1~2절에서 소개되는 여호야김왕은 남유다의 제18대왕, 요시야의 둘째 아들이며, 아우이자 선왕이었던 여호아하스가 이집트로 끌려가면서 대신 왕위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여호야김 시대부터 이미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의 침공을 당하고 왕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나라가 망할 조짐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멸망을 허용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성서는 전하면서, 정작 그 책임을 여호야김 이전의 왕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3절에 그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로 유다왕국의 제14대 왕이었던 므낫세입니다. 그는 이사야와 함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저 유명한 13대 왕 히스기야의 아들이며, 또 다른 개혁군주인 제16대 왕 요시야의 할아버지였습니다. 선대와 후대 왕이 모두 남왕국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개혁적인 군주들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역사 속에서 망국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대체 므낫세는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토록 역사 속에서 가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죄악, 혹은 그의 시대에 저질러진 종교적 범죄 및 사회적 불의가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므낫세 시대를 성서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직접 보시죠.

성서2 [왕하 21:1-6, 11-16]
(1)므낫세는 왕이 되었을 때에, 열두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쉰 다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헵시바이다. (2)므낫세는 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그는,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역겨운 풍속을 따랐다.
(3)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고, 바알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으며,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한 것처럼 아세라 목상도 만들었다. 그는 또 하늘의 별을 숭배하고 섬겼다. (4)또 그는 주께서 일찍이 "내가 예루살렘 안에 나의 이름을 두겠다." 하고 말씀하신 주의 성전 안에도 이방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다.
(5)주의 성전 안팎 두 뜰에도 하늘의 별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어 세웠다. (6)그래서 그는, 자기의 아들들을 불살라 바치는 일도 하고,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도 하고, 마술사를 시켜 마법을 부리게도 하고, 악령과 귀신을 불러내어 물어 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많이 하여, 주께서 진노하시게 하였다.
(11)"유다의 므낫세 왕이 이러한 역겨운 풍속을 따라, 그 옛날 아모리 사람이 한 것보다 더 악한 일을 하고, 우상을 만들어, 유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잘못 인도하였으므로, (12)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보내겠다. 이 재앙의 소식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가슴이 내려앉을 것이다.
(13)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 궁을 달아 본 추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을 심판하겠다. 사람이 접시를 닦아 엎어 놓은 것처럼, 내가 예루살렘을 말끔히 닦아 내겠다. (14)내가 내 소유인, 내 백성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을 모두 내버리겠고,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주겠다. 그러면 그들이 원수들의 먹이가 될 것이고, 그 모든 원수에게 겁탈을 당할 것이다.
(15)그들은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였고,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조상 때로부터 오늘까지,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16)더욱이 므낫세는, 유다로 하여금 나 주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도록 잘못 인도하는 죄를 지었으며, 죄 없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예루살렘이 이 끝에서부터 저 끝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다.

너무 죄목이 버라이어티하죠? 무슨 죄의 전시장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므나세와 암몬의 뒤를 이어 므낫세 사후 3년 뒤인 주전 640년에 왕위에 오르는 인물이 바로 요시야입니다. 그는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암몬이 행한 정책을 모두 혁파하는데요.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 모든 것들을 아주 정확히 하나하나 다 찾아서 해체합니다.

성서3 [왕하 23:4-10]
(4)(요시야) 왕은 힐기야 대제사장과 부제사장들과 문지기들에게,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별을 섬기려고 하여 만든 기구들을, 주의 성전으로부터 밖으로 내놓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들판에서 그것들을 모두 불태우고, 그 태운 재를 베델로 옮겼다.
(5)그는 또, 유다의 역대 왕들이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산당에서 분향하려고 임명한,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내쫓았다. 그리고 바알과 태양과 달과 성좌들과 하늘의 별에게 제사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냈다.
(6)그는 아세라 목상을 주의 성전에서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들어 내다가, 그 곳에서 불태워 가루로 만들어서 그 가루를 일반 백성의 공동묘지 위에 뿌렸다.
(7)왕은 또 주의 성전에 있던 남창의 집을 깨끗이 없애었다. 이 집은 여인들이 아세라 숭배에 쓰이는 천을 짜는 집이었다.
(8)그는 유다의 모든 성읍으로부터 모든 제사장을 철수시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게바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그 제사장들이 제사하던 산당들을 모두 부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성읍 성주의 이름을 따서, 여호수아의 문이라고 부르는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의 어귀에 있는 산당들을 모두 헐어 버렸다.
(9)산당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제단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으나,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은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10)그는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는 도벳을 속되게 하여 어떤 사람도 자녀들을 몰록에게 불태워 바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요시야가 벌인 개혁 역시 대단히 버라이어티하죠? 장장 57년 만에 일어난 개혁입니다. 대충 봐도 요시야가 단행한 개혁은 정확히 그의 할아버지가 남겨둔 지난 55년 역사의 유산들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자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른 것이 640년경인데, 그때 그의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주전 648년경에 출생한 것이 됩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왕이었던 사람은 그의 아버지 암몬이 아니라 할아버지 므낫세였습니다. 그는 므낫세 시대의 모든 우상숭배에 어린 왕자 시절에 참여했거나, 또는 그것을 모두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암살당한 후 아직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이룩한 모든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해체한 것입니다. 뭔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이, 보란 듯이 그들의 정책을 철저하게 부정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에 밝혀질 것입니다. 암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열심히, 자기 아버지와 다르게, 자기 할아버지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길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내 유다왕국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요? 앞의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성서4 [왕하 23:26-27]
(26)그러나 주께서는 유다에게 쏟으시려던 그 불타는 진노를 거두어들이시지는 않으셨다. 므낫세가 주님을 너무나도 격노하시게 하였기 때문이다. (27)그래서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을 내가 외면하였듯이, 유다도 내가 외면할 것이요, 내가 선택한 도성 예루살렘과 나의 이름을 두겠다고 말한 그 성전조차도, 내가 버리겠다."

이처럼 요시야의 위대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대한 야훼의 진노가 그치지 않은 이유를 성서는 정확히 다시 한 번 ‘므낫세의 범죄’라고 지목합니다(23:26). 우리가 확인했듯이, 므낫세가 저지른 범죄는 우상숭배, 즉 이방종교 및 이방신 숭배였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종교적 차원의 범죄였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유다왕국의 역사에서 우상숭배를 했던 왕이 비단 므낫세만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 이래로 수많은 왕들과 백성들이 바알을 섬겼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물론 므낫세는 다른 왕들에 비해 매우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자행했고 심지어 성전에다 그것들을 가져다 놓을 정도로 그 행동이 심각한 수준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므낫세만이 저지른, 그 이전의 어떤 왕도 하지 않은 특별한 범죄가 하나 있었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열왕기하의 두 본문들(21장과 23장, 므낫세편과 요시야편 모두)에서도 그 죄가 거듭 언급되고 있지만, 다른 죄들과 함께 열거되고 있는 까닭에 그 독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것은 열왕기와 마찬가지로 므낫세를 멸망의 원흉으로 간주하는 다른 유일한 텍스트인 예레미야서를 보면 보다 명확해집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우리는 므낫세가 저지를 매우 중대한 범죄, 특히 그것이 종교적 차원의 우상숭배를 넘어 사회적 불의의 차원에 해당하는 아주 특별한 범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어떤 특별한 죄 때문에, 요시야 왕이 그렇게도 할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볼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럼 열왕기하 21장이 전하는 므낫세의 우상숭배의 여러 조항들 중에 예레미야서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는 본문을 보겠습니다.


2. 므낫세 시대의 유다왕국: 무죄한 사람들이 흘린 피로 지켜지는 세계

성서5 [렘 15:1-4]
(1)그 때에 주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2)그들이 너에게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어디를 가든지, 염병에 걸려 죽을 자는 염병에 걸려 죽고, 칼에 맞아 죽을 자는 칼에 맞아 죽고, 굶어 죽을 자는 굶어 죽고, 포로로 끌려갈 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3)나는 이렇게 네 가지로 그들을 벌할 것이다. 그들을 칼에 맞아 죽게 하며, 개가 그들을 뜯어 먹게 하며, 공중의 새가 그들의 시체를 쪼아먹게 하며, 들짐승이 그들을 먹어 치우게 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4)내가 이렇게 하여 그들로 세상 만국을 놀라게 할 것이니, 이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유다 왕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열왕기를 제외하고 유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 즉 멸망과 포로로 끌려감의 책임을 므낫세에게 돌리고 있는 다른 유일한 본문이 바로 예레미야서의 이 본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왕 시대부터 남왕국 멸망 직후 바빌론 포로시대까지 활동했던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만일 성서의 기록(렘 1:2)대로, 그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연도가 요시야왕 제13년, 즉 주전 627년이라고 할 때, 만일 이 연도가 그의 출생 연도가 아니라 예언자로서의 활동 시작 연도이며 이것이 그가 성인이 된 이후라고 가정한다면, 그의 출생연도 역시 므낫세의 재위기간 중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예레미야의 출생 연도 및 그의 소명 당시 나이에 대해선 정설이 없음). 즉 그도 요시야와 마찬가지로 유년기를 므낫세 시대에 보냈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가 남긴 예레미야서는 주로 요시야 이후의 유다왕국 마지막 왕들인 여호야김부터 시드기야 시대(598~587년)와 멸망 직후의 상황들(이집트에서의 예언활동)에 집중하고 있지만요. 어쨌든 그 또한 므낫세 시대와 그것에 정면으로 대립했던 요시야 시대를 모두 겪었던 인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므낫세에 대한 앞서의 열왕기의 평가를 예레미야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므낫세의 여러 우상숭배의 범죄사실들 중에, “자식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한 것”(왕하 21:6a)이 있었는데요, 이는 요시야가 금지시킨 일로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있는 도벳을 더럽게 하여 자녀들을 몰록에게 불로 지나가 바치게 하는 일’이었다고 열왕기하는 기록합니다(23:10). 바로 이 대목을 예레미야 역시 세 번에 걸쳐서 아주 중요한 죄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부터 보겠습니다.

성서6 [렘 7:30-34]
(30)"나 주의 말이다. 참으로 유다 백성은, 내가 보기에 악한 일들을 하였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세운 성전 안에다가, 자기들이 섬기는 역겨운 것들을 세워 놓아서 성전을 더럽혔다. (31)또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과 딸들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이라는 산당을 쌓아 놓았는데, 그런 것은 내가 명하지도 않았고,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다.
(32)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오면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를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매장할 자리가 더 이상 없어서, 사람들이 도벳에 와서 시체를 묻을 것이다. (33)그 때에는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에 사는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아무도 그것을 쫓아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34)그 때에는 내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에서, 흥겨워하는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를 사라지게 하겠다. 온 나라가 황무지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인 예레미야서 7장에서 예레미야는 성전에서의 악한 일들을 금하고 사회약자들을 돌볼 것을 명하고, 30절 이하에서 유다 백성들의 ‘악’한 행실을 고발하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불태워 죽인’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언급합니다. 열왕기에서 므낫세가 행한 우상숭배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아바르 ... 바에쉬)(왕하 21:6)로 기술한다면, 예레미야는 이를 ‘불태웠다’(사라프 ... 바에쉬)(렘 7:31b)고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아예 ‘죽임의 골짜기’(게임 하하레가)(32절)라고까지 명명합니다. 이러한 유다의 죄악은 야훼가 ‘상상도 못 한 일’(31절)입니다. 7장에서는 이 일을 유다의 백성들의 죄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지만, 19장에 가서는 분명하게 유다의 왕들의 죄라고 말합니다.

성서7 [렘 19:3-9]
(3)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터이니, 이 재앙은 그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의 귀가 얼얼해질 만큼 무서운 재앙이 될 것이다.
(4)이것은, 그들이 나를 저버리고 이곳을 남의 나라처럼 만들어 놓고,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이나 유다 왕들도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이곳을 죄 없는 사람들의 피로 가득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 (5)그리고 그들은 제 자식들을 바알에게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들을 세움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명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는, 내가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6)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오면, 다시는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를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7)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그들이 전쟁할 때에 원수들의 칼에 찔려 죽게 하고,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의 손에 죽게 하고, 그들의 시체는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
(8)내가 이렇게 이 도성을 폐허로 만들 것이며,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 그러면 이 도성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곳에 내린 모든 재앙을 보고 놀라며, 비웃을 것이다.
(9)그리고 그들은 목숨을 노리는 원수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빠지면, 그들은 제 자식들을 잡아먹고, 이웃끼리도 서로 잡아먹을 것이다.

그들이 자식들을 ‘바알’에게 불태워 바치기 위해 바알의 산당을 세운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는 야훼가 ‘상상도 못 한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죄는 다른 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로 인해 이 일이 벌어졌던 곳은 도벳이나 힌놈이 아닌 ‘죽임의 골짜기’라 불리게 될 것을 거듭 언급합니다. 한 본문만 더 보겠습니다.

성서8 [렘 32:30-35]
(30)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은 젊은 시절부터 내가 보기에 악한 일만을 하였다.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으로 나를 화나게만 하였다. 나 주의 말이다.
(31)진정 이 도성은 사람들이 세울 때부터 오늘날까지 나의 분노와 노여움만을 일으켜 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그것을 내 눈 앞에서 치워 버리겠다.
(32)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이 왕들이나 고관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이나 유다 사람이나 예루살렘 주민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온갖 죄악을 저질러서 나를 노하게 하였다.
(33)그들은 나에게 등을 돌려 나를 외면하였다. 내가 그들을 쉬지 않고 가르쳐 주고 또 가르쳐 주었으니, 그들은 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4)오히려 그들은, 내 이름을 찬양하려고 세운 성전 안에, 자기들이 섬기는 역겨운 것들을 세워 놓아서 성전을 더럽혔다.
(35)또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딸들을 불태워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쌓아 놓았는데, 나는 절대로 유다 백성을 죄악에 빠뜨리는 이 역겨운 일은 명하지도 않았고,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

예레미야서나 열왕기서뿐만 아니라 역대기서에서도 므낫세의 범죄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힌놈의 골짜기에서 행해진 ‘몰록 제의’입니다. 물론 므낫세 이전에 아하스 왕도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고, 에스겔서 시편 등에서도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의 중대한 범죄 중의 하나로 이것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에스겔서에서는 “나에게 낳아 준 제 아들딸들마저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여 태워 죽였다. […] 그들은 자기 자식들을 잡아 죽여서 우상들에게 바친 바로 그 날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니, 그들이 내 성전의 한가운데서 그런 일을 하였다”(23:37-39)고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므낫세 시대만큼 이 제의를 관례적으로 그것도 왕실이 주도하여 전국가적인 제의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시행한 일은 이스라엘 및 유다의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야훼께서 이런 일은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고 충격적인 발언을 하고 있을까요(사실 레위기나 신명기에서도 이와 동일한 제의에 대한 야훼의 진노가 언급되고 있지만요).

예루살렘 남쪽의 벤-힌놈 골짜기에 있는 도벳에서 벌어진 ‘몰렉 제의’는 앗수르와 아람의 제의 관습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족 종교 안으로 수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다국보다 먼저 멸망한 북왕국에서도 이런 제의가 횡행하였고, 그 때문에 그들의 멸망 원인을 열거하는 본문에서도 이 제의가 등장합니다. 평소에는 이 제의가 대중들 사이에서 자녀를 희생시켜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났지만, 유다나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는 사회 지도층에서, 그것도 왕실에서 더 적극적으로 이러한 제의를 수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현세대가 초래한 사회적 위기를 미래세대의 희생을 통해 해결하려는 매우 위험한 사회적 관행이었던 것입니다.


3. 유다왕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그런데 이 힌놈의 골짜기의 몰록 제의를 언급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본문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런 우상숭배의 죄악상을 단지 종교적 차원으로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무죄한 사람들의 피로 가득차게 만들었다”(19:4)는 것은 이 죄가 종교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차원의 심각한 불의이자 범죄임을 시사합니다. 즉, 무죄한 자들을 죽이는 일들이 단지 자신의 자녀들을 죽이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을 죽이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일은 이미 7장 성전설교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지 말 것을 말하는 가운데도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죄 없는 자들을 죽이고 있는 유다 사회 전체의 죄악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난이 열왕기하에서 므낫세의 범죄를 지적할 때도 언급되고 있었습니다(왕하 21:16; 24:4).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죄 없는 자들을 죽이는 일’이란 단지 종교적 행위로 인해 빚어진 일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됩니다. 종교적 제의 행위(우상숭배)를 통한 국가의 부와 번영, 생존을 모색하던 국가권력이 유다의 백성들로 하여금 힌놈의 골짜기로 자신의 자녀들을, 나아가 무죄한 사회적 약자들을 데려와 불태워 죽이게 했다면, 이는 단순한 ‘우상숭배’의 문제로, 즉 종교적 배교행위로만 비난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힘 없는 이들이 모욕당하고 존엄을 짓밟힌 사회적 불의(不義)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성서9 [렘 7:6-7; 22:3; 26:15]
(6)“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
(3)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
(15)“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자신과, 이 도성과, 이 도성의 주민은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린 죄값을 받을 것이니, 이는 이 모든 말씀을 여러분의 귀에 전하도록 나를 보내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 즉 미래세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제의, 나아가 무죄한 자들을 살해하는 것,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예레미야서 안에서는 하나의 문제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안보의 위협을 받던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평범한 대중들, 나아가 왕실과 고위 지도자들까지도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방종교의 풍습을 자발적으로 수행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자녀들을 이방신을 위한 희생제물로 삼아 불에 태워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왜 므낫세왕이 유다의 멸망의 원인이었는지 아시겠지요? 바로 이 모든 죄악들, 미래세대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가공할만한 집단적 학살이 만연한 시대가 바로 그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국민들 스스로 현재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후속세대를 적들의 위협에 대한 희생양으로 삼을 만큼 미래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놓아버린 시대였고, 자신들 안에서 먼저 보호해야 할 약자들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내몰 만큼 사회통합이나 사회의 재생산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던 그런 잔인한 시대였습니다.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그 미래가 존재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바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원과 미래세대에 대한 돌봄입니다. 유다왕국은 그 두 가지의 사회적 안전망이 무너진 사회였습니다. 그렇기에 야훼의 관점에서 이 사회는 더 이상 재생산될 필요가 없는 사회였던 것입니다.

공동체나 사회의 안녕이 불투명해졌다고 해서 자기들 안의 약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그런 사회, 기성세대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후속세대로부터 모든 기회와 자원을 빼앗아가는 그런 사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므나셋 시대의 유다왕국이 오늘날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몇 십 년 후에 이웃나라에 점령되어 멸망하기 전에 이미 이 나라는 이때부터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길어봐야 50년이었습니다. 이미 그 나라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요시야와 예레미야 두 사람 다 그 므낫세와 암몬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니 왕자였기에 더욱 몰록 희생제의의 제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요시야나, 북이스라엘 배경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예레미야나 그들이 왜 그렇게 므낫세 시대에 대해 부정적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본 므낫세의 유다왕국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곳곳에서 약자들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고, 어린자녀들을 제물로 바쳐가면서까지 위기를 관리하려 했던, 다른 어떤 사회적 통합이나 국가발전 정책은 도모하지 않은 채 내부적으로 희생자 찾기에만 골몰했던 그런 미친 사회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회라면 차라리 멸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끔찍한 하나님의 심판, 혹은 국가의 멸망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준 므낫세와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왕국의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서 굳이 우리 시대의 미래세대, 곧 청년세대가 놓여 있는 삶의 위기상황들에 관해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88만원세대론에서부터 최근에는 삼포세대와 오포세대를 거쳐 칠포세대론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을 잘 아실 것입니다. 칠포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것도 모자라 집과 직장, 인간관계, 그리고 꿈마저 포기한 청년세대의 절망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헬조선이니 수저계급론(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이니 하는 말들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더욱이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이 처한 그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도 새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고대 유다왕국처럼 미래세대에 대한 착취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제를 통해서 자신의 생존을 지속해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복지를 한 사회의 재생산, 즉 그 사회를 특징짓고 있는 사회적 구조들과 사회적 관계들이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며, 발전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특히 노인이나 아동, 장애인, 그 외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로 지칭되는 비노동인구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차원에서 보장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통합 또는 연대를 도모하는 기술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에게 유다왕국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멸망 선포는 사회적 재생산, 더 정확히는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통합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안전보장을 저버린 것에 대한 신적인 심판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세대와 가난한 이들, 무죄한 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을 먼저 희생시킴으로써 그들이 흘린 피를 통해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던 유다왕국은 복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적 재생산에 완벽히 실패한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서의 어떤 계명이나 말씀보다도 이 역사적인 서사 자체가 저에겐 사회복지, 곧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를 신학윤리학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학문적 동기를 제공해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살림교회 공동체와 저의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오늘 함께 나눈 이야기를 통해서, 종교적 경건의 문제와 사회적 정의 실천의 문제가 야훼신앙의 관점에서 결국 동일한 문제임을 깊이 인식하고, 앞으로 그 두 가지를 함께 관심 갖고 실천해나가는 천안살림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 먼저 미래세대와 약한 지체들을 돌보고 그들의 삶을 지원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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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