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적 - 마태복음 12:38~4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5:57
조회
4793
2017년 3월 1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진정한 기적
본문: 마태복음 12:38~42
오늘 찬양예배를 준비한 청년 신도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슬픔을 노래하든 기쁨을 노래하든 모든 찬양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드러냄으로써 부르는 이나 듣는 이 모두가 감동을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순절 기간이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진실을 극적으로 확인하며 감동을 나눈 터에 아름다운 찬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더 없이 기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요나의 기적을 역설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펼치며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 보았으면 합니다.” 여기서 ‘표적’은 예수의 신성을 보여 주기 위한 증거로서 기적을 말합니다. 이미 놀라운 일들을 많이 일으키신 것으로 알려진 예수님에게 또 하나의 표적을 보여주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일까요?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가복음서(8:11~12)는 여기서 끝을 맺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는 이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요나의 이야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낀 복음서 저자는, 요나로부터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 이야기와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구하러 왔던 스바 여왕의 이야기까지 덧붙여 그 의미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열쇠에 해당하는 요나의 표적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요나의 표적이란, 본문에 나온 그대로 요나가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사실을 말합니다. 예언자 요나는 자기 민족을 괴롭힌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이 명을 받은 요나는 도무지 마땅치 않아 엉뚱하게도 다시스, 곧 스페인쪽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도망칩니다. 하지만 배가 풍랑을 맞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뱃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요나를 제물로 삼아 바다를 진정시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의 컴컴한 뱃속에 사흘간 갇혀 있는 도중 회개를 하고 다시 빛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니느웨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합니다.
요나의 표적이 갖는 일차적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입니다. 어둠 속에 갇혔다가 대명천지로 다시 나온 사건입니다. 자기 아집에 똘똘 뭉쳐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건입니다. 자기 민족 밖에 모르다가 세계 만민을 안 사건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다가 타인을 알게 된 사건입니다. 그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바로 그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은, 그 거듭남이 없이 다른 어떤 기적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들에게 그 아집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어떤 기적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바를 따르면, 여기에서 간결하게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것으로 사실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하시고자 한 이야기를 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여기에 두 가지 사실을 덧붙이며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요나로부터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 이야기와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구하러 왔던 스바 여왕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지만 거꾸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로 간주한 사람들이 오히려 지혜롭게 사리분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선포한 이후 과정을 환기해볼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외쳤지만 사실은 여전히 마뜩치 않았습니다. 요나는 기대도 하지 않고 외쳤을 뿐인데, 니느웨 사람들이 정말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요나에게는 그것이 또 불만이었습니다. 여기서 요나는 성장하기를 멈춰버린 어린애와 같습니다.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고, 독단에 빠져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재앙을 면하게 된 것에 화가 나가 나서 또 투덜거립니다. 그러면서 니느웨 성에서 떨어진 곳에 박넝쿨 그늘에 쉬면서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벌레 한 마리가 넝쿨을 갉아먹어버리자 그늘이 사라집니다. 뙤약볕을 맞게 된 요나는 또 투덜거립니다. 세상에 이런 투정꾼이 없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는 압권입니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아집과 독단에 빠진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선포하십니다. 자기만의 아집에 빠져 독단으로 세계 현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좀처럼 그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요나의 미숙함과,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단정한 니느웨 사람들의 지혜로움과 현명함이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마치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스바의 여왕 이야기를 환기한 것은 복잡할 것이 하나 없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바 여왕의 지혜로움을 환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들이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지만 거꾸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로 간주한 사람들이 오히려 지혜롭게 사리분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아는데 자기만 아닌 것처럼 맹신하고 어거지를 쓰는 사람과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큰 진통을 치르고 있습니까? 그 대열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합류하고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지난 한 주간 우리는 얼마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냈습니까? 아무리 공정하게 법리를 따진다 해도 재판관 역시 자신의 경험 세계 한계 안에 있기에 판결이 그 재판관의 인격이나 경험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요나의 경우는 사실 모든 사람들이 지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 내부에서 일부는 밖에서 탄핵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선고는 그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 버렸습니다.
“이번 탄핵심판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가장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 재판관의 덧붙여진 의견은 의미심장합니다. 민의가 성숙해진 만큼 국가기관의 판단 역시 그에 따라 성숙해지고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을 기대하기보다는 스스로 거듭남으로서 스스로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 우리들 모두가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제목: 진정한 기적
본문: 마태복음 12:38~42
오늘 찬양예배를 준비한 청년 신도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슬픔을 노래하든 기쁨을 노래하든 모든 찬양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드러냄으로써 부르는 이나 듣는 이 모두가 감동을 나눌 수 있게 해 줍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사순절 기간이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진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진실을 극적으로 확인하며 감동을 나눈 터에 아름다운 찬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더 없이 기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요나의 기적을 역설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을 펼치며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적을 보았으면 합니다.” 여기서 ‘표적’은 예수의 신성을 보여 주기 위한 증거로서 기적을 말합니다. 이미 놀라운 일들을 많이 일으키신 것으로 알려진 예수님에게 또 하나의 표적을 보여주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일까요?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가복음서(8:11~12)는 여기서 끝을 맺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는 이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요나의 이야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낀 복음서 저자는, 요나로부터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 이야기와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구하러 왔던 스바 여왕의 이야기까지 덧붙여 그 의미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열쇠에 해당하는 요나의 표적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요나의 표적이란, 본문에 나온 그대로 요나가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사실을 말합니다. 예언자 요나는 자기 민족을 괴롭힌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이 명을 받은 요나는 도무지 마땅치 않아 엉뚱하게도 다시스, 곧 스페인쪽으로 향하는 배를 타고 도망칩니다. 하지만 배가 풍랑을 맞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뱃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요나를 제물로 삼아 바다를 진정시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의 컴컴한 뱃속에 사흘간 갇혀 있는 도중 회개를 하고 다시 빛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니느웨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합니다.
요나의 표적이 갖는 일차적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입니다. 어둠 속에 갇혔다가 대명천지로 다시 나온 사건입니다. 자기 아집에 똘똘 뭉쳐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건입니다. 자기 민족 밖에 모르다가 세계 만민을 안 사건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다가 타인을 알게 된 사건입니다. 그것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바로 그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은, 그 거듭남이 없이 다른 어떤 기적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들에게 그 아집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어떤 기적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바를 따르면, 여기에서 간결하게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것으로 사실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하시고자 한 이야기를 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여기에 두 가지 사실을 덧붙이며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요나로부터 심판 선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 이야기와 솔로몬 왕에게 지혜를 구하러 왔던 스바 여왕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지만 거꾸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로 간주한 사람들이 오히려 지혜롭게 사리분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선포한 이후 과정을 환기해볼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외쳤지만 사실은 여전히 마뜩치 않았습니다. 요나는 기대도 하지 않고 외쳤을 뿐인데, 니느웨 사람들이 정말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요나에게는 그것이 또 불만이었습니다. 여기서 요나는 성장하기를 멈춰버린 어린애와 같습니다.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고, 독단에 빠져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재앙을 면하게 된 것에 화가 나가 나서 또 투덜거립니다. 그러면서 니느웨 성에서 떨어진 곳에 박넝쿨 그늘에 쉬면서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벌레 한 마리가 넝쿨을 갉아먹어버리자 그늘이 사라집니다. 뙤약볕을 맞게 된 요나는 또 투덜거립니다. 세상에 이런 투정꾼이 없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부분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는 압권입니다.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아집과 독단에 빠진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선포하십니다. 자기만의 아집에 빠져 독단으로 세계 현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좀처럼 그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요나의 미숙함과,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단정한 니느웨 사람들의 지혜로움과 현명함이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마치 우리 현실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스바의 여왕 이야기를 환기한 것은 복잡할 것이 하나 없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스바 여왕의 지혜로움을 환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들이 아집에 사로잡힌 이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지만 거꾸로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로 간주한 사람들이 오히려 지혜롭게 사리분별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아는데 자기만 아닌 것처럼 맹신하고 어거지를 쓰는 사람과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큰 진통을 치르고 있습니까? 그 대열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합류하고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지난 한 주간 우리는 얼마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냈습니까? 아무리 공정하게 법리를 따진다 해도 재판관 역시 자신의 경험 세계 한계 안에 있기에 판결이 그 재판관의 인격이나 경험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요나의 경우는 사실 모든 사람들이 지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법재판소 내부에서 일부는 밖에서 탄핵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선고는 그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 버렸습니다.
“이번 탄핵심판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가장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 재판관의 덧붙여진 의견은 의미심장합니다. 민의가 성숙해진 만큼 국가기관의 판단 역시 그에 따라 성숙해지고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을 기대하기보다는 스스로 거듭남으로서 스스로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 우리들 모두가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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