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비교우위가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 - 마가복음 12:41~4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5:58
조회
4971
2017년 3월 1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비교우위가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
본문: 마가복음 12:41~44



오늘 본문말씀은 한국 교회에서 매우 빈번히 선포되는 본문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그 어떤 해석이 없이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쾌한데다가, 그 내용이 헌금을 소재로 하고 있으니 흔히 교회에서 인용하고 선포하기에 더없이 좋은 본문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저 지난 주일 우리가 공동의회에서 가능하면 많은 교우들이 다 참석한 가운데 교회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하자는 결의를 한 바 있는데, 모든 일을 다 포함하지만 그 가운데 재정운영 형편도 온 교우들이 다 알아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도 그 중요한 취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빌미 삼아 재정위원장님의 고충을 대변해드릴까요?^^ 이 말씀을 근거 삼아 그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그렇게 협소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재삼 말씀드리지만, 본문말씀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어떤 해설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의미가 간단명료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러나 과연 이 본문말씀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한 말씀일까요? 한 번 곰곰이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쉬운 말씀일까요?
모든 종교의 전통에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다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교훈에 해당하는 이 말씀은 머리로는 너무나도 이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삶으로는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를 다시 새기고자 할 때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표면의 내용으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더 깊은 말씀의 뜻을 새기기 위해 다시 한 번 본문말씀을 찬찬히 헤아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더욱 분명한 의미는 이 말씀이 자리 잡고 있는 전체적인 문맥 가운데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한 앞뒤의 일련의 말씀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을 하시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한 사건 전후의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대목에 이르러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을 보여 주는 여러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의미를 제대로 새길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을 책망하는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요한 대목에서 그 적대자들과 대비되는 사례로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논쟁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오늘 본문과 직결되는 앞의 이야기를 보면,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논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28~34). 한 율법학자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제사보다 그 어떤 종교적 생활보다 낫다고 단언하십니다. 물음을 던진 율법학자들과 예수님은, 이 점에서 마음이 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고 무슨 겉으로 드러난 도덕율을 지키고 하는 것보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구현하는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체 높은 율법학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자신들의 위신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그 누군가에게 섬김을 받기를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 하나하나도 진정성을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행할 뿐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38~40).
예수님께서 그렇게 율법학자들을 경고하고 계시는데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입니다. 성전 여인의 뜰에서 헌금하는 여인들 가운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가난한 과부는 렙돈 두 닢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한 렙돈이 한 데나리온, 곧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돈의 1/128에 해당한다고 하니까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렙돈 두 닢이니까 하루 일당의 1/64입니다. 2017년 최저시급 6,470원을 적용해 일당을 51,760원으로 할 것 같으면 809원 정도 됩니다(최저시급 10,000원으로 하면 일당 80,000원이니 1,250원). 아이들 과자 한 봉지, 라면 한두 봉지 값이라고 하면 실감날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돈이 지금 그가 가진 돈의 전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내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오늘 이 말씀은 누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들이 섬김 받기를 즐기는 사람들과 달리 이 가난한 과부야말로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체 높은 율법학자들은 보이는 것을 즐깁니다. 겉으로 보이는 의관과,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지위, 그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자신들의 언행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가치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한 그들의 눈에 가난한 과부는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가난한 과부는 존재 자체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혹시 그들의 눈에 들었다면 보잘것없게도 헌금이라고 겨우 동전 두닢 밖에는 하지 못하는 하잘것없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들의 눈에 그 과부의 초라한 행색, 그 과부의 가난함은 곧 그 과부의 별 볼 일없는 인생, 나아가서는 하나님께도 별로 드릴 것 없는 변변찮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의 초라한 행색이 문제가 아니었고, 그가 가진 것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진실로 정성을 다하는 그의 삶이 그 누구의 삶보다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자 봐라. 이 과부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고 스스로 섬김 받기만을 즐기고, 그와 같은 자족적 시각의 한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너희들이 과연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냐?” 예수님께서는 지금 율법학자들에게 그렇게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계신 예수께서는 명백하게 대비되는 사람들의 현실을 이렇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한편 오늘 본문말씀은, 이 말씀이 기록된 초대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는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온전성을 일깨워 주는 말씀으로서 또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부유한 사람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사람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취약한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뒷전으로 밀리거나 멸시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는 두 가지 점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곧 ‘혼자 사는 여인으로서, 가난한 계층의 여인으로서’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가난한 과부를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본문 말씀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교회의 온전한 지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들이야말로 교회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밖에도 여러 측면에서 우리들의 상상력을 촉발시킵니다. 소유의 문제와 그 소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유와 능력에 따른 삶의 태도에 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여러 가지를 함께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말씀을 통한 은혜를 풍족히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오늘 말씀을 통해 중요한 진실을 다시 한 번 새삼 환기하는 것으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남들 보기에 결코 주목받을 만한 처지에 있지도 아니하고, 뿐만 아니라 남들 보기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정도의 정성을 드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그 본인에게는 사실상 자신의 전존재와 다름없는 정성을 드린 주인공의 이야기는 저마다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리의 삶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 소중한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소중한 그 삶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것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어디에 소속해 있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느냐,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하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다 해명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자신의 삶에 대한 진정성을 갖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의 가치는 결정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정성을 다한다면 그만큼 그 삶은 고귀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입니다.
저마다의 삶의 가치는 비교우위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진정성을 다한다면 그 자체로 삶은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모든 것이 시장의 상품가치로 환원되어 그 가운데서 비교우위를 지니는 것만이 최상으로 여겨지고, 교육도, 더욱이 신앙생활도 그에 따라 결정되는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이 진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더욱이 스스로 진정성을 다하는 삶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하나님을 향한 꾸밈없는 정성을 동반한 것이라면 더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할지,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무엇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할지를 일깨워 줍니다. 율법학자들과 같은 삶의 태도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삶의 태도가 오늘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 삶으로 각박한 우리의 삶의 현실 가운데 희망을 퍼뜨리고 진정한 기쁨을 맛보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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