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 요한복음 6:55~6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5:59
조회
5301
2017년 3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본문: 요한복음 6:55~65



우리가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교리적 명제를 믿는 것일까요? 아니면 놀라운 어떤 기적을 믿는 것일까요? 아마도 우리 교회에서 계속 신앙생활을 해왔고 말씀나누기에 귀 기울여왔다면, 적어도 그렇게 단순하게 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존적인 결단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객관화된 교리적 명제나 어떤 놀라운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 그리고 나아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를 따라 사는 삶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근본적인 물음 앞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일말의 어떤 양심이 있다면, ‘나는 그 물음에 선뜻 답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이 일기 때문입니다.
줄여 말하면, 신앙은 객관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인 결단과 실천적인 삶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근본적인 물음 앞에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녔던 제자들에게도 그 문제가 결코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6장 말씀 가운데 한 대목을 읽었지만, 쭉 이어지는 요한복음 6장 전체를 한꺼번에 살펴봐야 사실은 본문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전체를 읽을 것 같으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대목만 다시 환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선언하며 그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말했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오늘 본문에 앞서 41절에는 먼저 유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자들까지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66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를 열두 명으로 알고 있는데, 이 말씀을 보면 그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은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다 떠나고 열두 명만 남은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사태가 발생했을까요? 늘 예수님을 곁에서 모시고 따라 다니는 제자들마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렵다고 하게 된 사연이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만한 지식이 없어서였을까요?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말 자체가 어려워서였을까요? 여기에는 그런 차원과는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매우 장황하게 이어진 요한복음 6장의 말씀은 사실 매우 단순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예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선언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다시 환기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은 바로 이 말씀으로 집약됩니다. 유대인들이, 제자들이 도대체 말씀이 어려워서 알아듣기 어렵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말씀을 두고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가룟 유다의 배반과 연결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본래 이 상황은 비단 가룟 유다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부르신 의미를 엉뚱하게 생각하고 있는 여러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분명히 당신의 살과 피를 하늘에서 내려 온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어 곧바로 육과 영을 대비하고 있어 사실 약간의 혼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살, 또는 살과 피를 강조하다가, 육을 부정하고 영을 강조하니 우선 조금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영악하기에 그렇게 이해력이 모자라지 않습니다. 금방 영의 차원으로 상승합니다. 영의 차원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주 손쉬운 돌파구이면서 동시에 그 실체를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그 차원이 손쉬운 돌파구가 될 때 그것은 대부분 실제 육체적 삶과는 무관한 어떤 정신적 차원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치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하늘의 빵으로 삼는 것이 영의 차원을 뜻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전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며 그 전인격을 따라 사는 삶을 뜻합니다. 그것은 육체적 일상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 일상의 삶을 바탕으로 하되, 뭔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요한복음 6장 전반의 문맥에서 그 말씀의 의미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차원이 현재 존재하는 삶과 그 삶의 질서를 말한다면, 영적인 차원은 그 현재 존재하는 삶과 그 삶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똑똑한 유대인 지식인이었던 니고데모는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다 큰 어른이 어머니의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느냐?’고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다시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이겠습니까? 낡은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진실을 몰랐을까요? 아마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신의 실존적인 문제요, 실천적인 문제가 되었을 때 순간 멍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요한복음에는 훗날 니고데모가 예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어(7:50~52) 그가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순간 어리석은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몰이해, 제자들의 몰이해 또한 그런 것입니다. 실존적인 결단과 실천적인 삶을 동반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 그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인간은 알고자 하는 욕구로 충만한 것 같지만, 많은 경우 알고 싶지 않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굳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진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입니다.

요한복음의 6장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맨 앞 부분에는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결론부에 오늘 본문말씀이 나오고, 이어지는 66절에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보십시오. 육의 양식을 나눠줄 때는 오천 명이 와글거렸습니다. 그런데 영의 양식을 이야기하니까 열두 명이 남았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예수님의 진실을 알아먹는 사람이 안타깝게도 그렇게 소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기가 막힌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남은 제자들을 향하여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사건은 놀라운 기적의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보고 놀라고 그 사건의 현장에 운집해 있었지만,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그 사건은 하나의 예비적인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빵을 나눠주는 사람으로 알고 열광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제 스스로 정체를 밝히며 당신 앞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당신의 정체를 밝히고 사람들을 부르는 이 목소리 앞에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소리를 듣고 슬금슬금 자리를 뜹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6:55-58).

과연 이 말이 어려웠을까요? 아니면 이 말이 부담스러웠을까요? 아마도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웠던 것입니다. 새로운 양식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는 생명의 양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스스로 사는 것보다는, 그냥 구경꾼으로 남은 채 가끔 내려주는 빵을 얻어먹는 것이 훨씬 실속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라고 답한 열두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에 진실이 저절로 자명하게 드러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세상의 갈등과 고통이 없을지도, 아니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덜할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그것을 믿고 찾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드러나고 전해집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새기는 사순절 넷째 주일, 그 진실을 새기며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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