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활의 진실에 대한 이해와 믿음 - 누가복음 24:28~3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6:06
조회
5476
2017년 4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부활의 진실에 대한 이해와 믿음
본문: 누가복음 24:28~35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극적으로 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와 대조적으로 어찌 보면 그다지 별로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도 함께 더불어 전하고 있습니다.
극적인 이야기는 잘 알려진 대로 여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이고, 별로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으로,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그 별로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긴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극적인 이야기와 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별로 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가만히 비교해보면 부활에 관한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사건의 현장을 목격하고 그 사태 자체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 같습니다. 시차를 달리하기는 했어도 그 현장의 사태를 파악한 것은 똑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그 사태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자들은 곧바로 증언합니다. 의심하고 따질 겨를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곧 증언합니다. 남자들은 사태를 보고도 의심합니다. 현장을 보고도 이상하게 생각하여 고개를 갸우뚱해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인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 이야기를 봐도 그렇습니다. 긴 이야기의 전체를 읽지 않고 그 후반부를 함께 읽었습니다만, 그 이야기의 전모를 환기해보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바를 따르면, 여인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현장을 목격한 그 날 여인들은 곧바로 그 사실을 사도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베드로는 현장으로 달려가 무덤이 빈 사실을 확인하였지만, 단지 이상하게 여기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그 날 아침 예루살렘에서 한 30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글로바라는 사람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또 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19:25)에 의하면 글로바는 무덤 현장을 지키고 첫 부활의 증인 가운데 한 사람인 마리아의 남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12제자 명단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평소 예수님과 가까이 한 제자 반열에 드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엠마오로 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일관되게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을 계속 화제 삼아 길을 걷는 중 부활한 예수께서 동행하게 되고 대화에 끼어듭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화제의 주인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 제자들은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러한 사태를  말합니다. 아직 그들에게 정체가 인지되지 않은 예수께서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환기하며 당신들이 믿고 따르는 그 메시야가 부활하였다는 것을 어째서 알지 못하느냐고 질책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자신들이 목격하고 알고 있는 현상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들과 함께 한 예수를 평범한 한 동행인 정도로만 아는 가운데 저녁이 되어 자기들의 집에 머물며 식사를 나누는 도중, 함께 한 그분이 부활한 예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제서야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비로소 부활사건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는 자신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제서야 오는 도중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둘러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다른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처음에 의심하였던 다른 제자들 모두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비로소 시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말씀 후반의 증언입니다.

똑같은 현상을 목격하거나 전해 듣고 한편의 사람들은 곧바로 그 사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반면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그 의미하는 바를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사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활사건이 그저 객관적 사실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 대한 깨달음과 수용의 문제, 다시 말해 어떤 진실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대조되는 두 부활 이야기에서, 여성들은 현상을 보고 곧바로 이해하고 믿은 반면 남성 제자들은 한참 후에야 이해하고 믿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아마도 즉각적인 공감을 통한 이해와 믿음,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일종의 논증(논리적 추론[대화]과 경험적 반추[식탁])을 통한 이해와 믿음의 차이가 아닐까요?

즉각적인 공감을 통한 이해와 믿음이 가능한 것은 일종의 인식론적 특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얼굴만 보고도 어떤 처지에 처해 있는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되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말 안 해도 알아!’ 그 한마디로 충분히 공감을 나타낼 수 있는 경우입니다. 양성 차원에서 보면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사회적 계층의 차원에서 보면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보다 별로 가진 게 없고 소위 별로 많이 알지 못하는 민중들이 그 능력이 더 뛰어납니다. 억울한 일을 더 많이 당하고 그만큼 고통을 더 많이 겪은 사람은 그만큼 타자의 고통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라고 항변하다 보면 곧바로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공감이 이뤄지고 그로부터 어떤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이런 걸 두고 인식론적 특권이라 말합니다. 많은 것을 배워서가 아니라 삶의 조건 자체가 어떤 진실을 깨닫기에 유리한 조건에 있는 경우입니다.
복음서의 서로 다른 부활 이야기에서 부활의 첫 증언자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경우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말씀, 곧 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과는 다른 경우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일단 의심도 많고, 이해력도 딸리고, 그래서 믿음도 부족한 남성 제자들의 이야기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이 바보들아!’ 하는 이야기일까요? 물론 본문말씀 가운데는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한 질책이 분명히 들어 있기는 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질책하는 데 본문말씀의 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남성 제자들의 일부로 대변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도대체 믿기지 않은 사태를 두고 의심하다가 마침내 그 진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 훨씬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제법 긴 두 제자 이야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반부가 증언하고 있는 도상에서의 대화요, 또 하나는 집에서 식탁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분명히 목격하고 알고 있는 현상을 두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우선 기이한 일이라는 것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제자들이었지만, 이들에게서 중요한 사실은 물음을 내팽개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사태를 두고 화제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끝끝내 물음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의 중요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음만으로 답을 찾지 못할 때 예수께서 그들의 대화에 개입하여 성서의 이야기를 환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어떤 본문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이사야의 수난의 종에 관한 예언과 어울립니다. 고난을 겪은 바로 그분이 진정한 메시야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구약성서의 메시지를 환기하고 있는 것은 어떤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이해의 도구를 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단편적 지식 몇 가지를 조합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고, 일종의 세계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세계를 기대하는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전망을 포함하는 것이 세계관입니다.
물론 성서의 본문말씀에서 예수께서 던지신 말씀은 그렇게 포괄적인 것은 아니고, 메시야의 메시야됨에 관한 초점으로 한정됩니다. 영광의 메시야상을 그리고 있느냐, 수난의 메시야상을 그리고 있느냐, 그것을 환기한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께서는 수난의 종으로서 메시야상을 환기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각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문제를 다 해결해주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메시야상을 그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수난의 종으로서 메시야상은 나와 똑같이 고난을 겪는 분이 진정한 메시야라는 통찰을 함축한 것으로 그 메시야상을 바라는 것은 고난을 겪고 있는 자신들에게서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을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대통령이 주권자냐 국민이 주권자냐 하는 차이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제자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으로부터 그 가르침을 받았고, 지금 중요한 이 순간에 또 다시 그 가르침을 환기받고 있는데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아직 몽롱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나누게 되는 순간 진실을 깨닫습니다. 이 장면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늘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밥상의 의미를 다시 환기시킵니다. 밥상공동체를 이루시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 의미에서의 밥상공동체를 강조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실 아주 일상적인 밥상의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일상적인 삶의 단면, 그것이 곧 밥상의 자리입니다. 하루종일 토론을 하고도 몰랐는데, 밥 한 그릇을 나누고서는 금방 압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제거될 수 없는 밥 한 그릇의 진실을 깨닫는 데서 부활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밥 한 그릇의 진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것을 누리는 기쁨과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작가 김훈의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눴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사소한 것들이 부모들의 슬픔에 불을 지른다. 죽은 아이의 목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 빛의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딸아이의 검은 머리채, 처음으로 립스틱 바르고 깔깔 웃던 입술, 아들이 동네에서 축구 하고 돌아온 저녁의 땀 냄새, 학교 가는 아이를 먹이려고 아침 밥상을 준비할 때 찌개가 끓으면서 달달거리는 소리…. 이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인가. 이 사소한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비로소 안다.”
제자들은 어쩌면 그 사소한 일상의 복귀를 통해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시인 고은은 <오일장터>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기도 했습니다. “미안하다 / 나 같은 것이 살아서 오일장 국밥을 사먹는다” 그것은 그저 밥 한 그릇이 아니라 삶의 관계, 그저 우리가 바라는 사소한 일상의 단면에 깃든 온전한 삶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며칠간 제자들의 긴장과 공포가 어땠을까요? 그랬다가 마주하는 식탁에서 비로소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그 가운데 예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실감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분이 고난을 겪은 까닭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 급히 서울 광화문을 다녀왔습니다. 광장에서 외쳐도 안 되어 고공에 오른 노동자들을 위하여 긴급히 기도회를 열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함께 모인 이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부당하게 해고당한 이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해 주소서. 하루 속히 가족들과 따뜻한 밥 한 끼 나누며 하루를 이야기하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노동자가 무슨 죄인입니까? 가난한 것이 무슨 죄입니까? 그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이 어쩌다가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처럼 되어 버렸을까요?

오늘 본문말씀은, 비단 엄청난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슬픔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지각력을 통해 부활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한동안 멍했던 제자들은 가장 일상적인 삶의 한 대목에서 뜻밖에도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밥 한 그릇의 의미를 통해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함께 나누는 밥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 부활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언자인 여인들과 같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우리에게 길이 막혀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그 어떤 단면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이며, 우리의 사소한 일상의 의미 또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부활의 믿음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는 모든 세력을 배척하는 것이요, 서로 살리는 삶의 관계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삶의 관계에서일지언정 그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부활사건의 증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믿음 안에서 부활사건의 증언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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