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선한 목자, 이 땅의 통치자들을 향한 경고 - 에스겔 34:1~10; 25~3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6:07
조회
5463
2017년 4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선한 목자, 이 땅의 통치자들을 향한 경고
본문: 에스겔 34:1~10; 25~3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스겔서의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못된 목자들을 규탄하고, 참된 목자로서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긴 본문이지만, 중간을 생략하고 앞부분과 뒷부분을 잘라 읽었습니다. 앞부분은 이스라엘의 못된 목자들을 규탄하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말씀의 메시지는 매우 선명합니다. 본문말씀을 그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어떤 현실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 어떤 희망을 말하는 것인지 해석의 여지없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 붙잡혀 있던 시절 예언자로서 활동한 에스겔은 이 대목에서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포로로 붙잡혀 있어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37장에서 전하고 있는 그 유명한 마른 뼈들의 환생은 그 희망의 극적인 표현이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역시 그 희망을 선포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희망의 선포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이유를 먼저 밝힙니다. 못된 목자들을 규탄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목자가 없기 때문에, 양 떼가 흩어져서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모든 높은 언덕에서 헤매고, 세계 각처에까지 흩어지게 되었는데도, 그 양 떼를 찾으려고 물어 보는 목자가 하나도 없었다.”(2~6)
여기서 목자란 누구를 말할까요? 왕들, 곧 통치자들을 말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들, 곧 통치자들을 목자(牧者)로 비유한 것은 매우 익숙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고대 바빌론에서도, 고대 이집트에서도 흔히 등장하며, 성서의 세계에서 그것은 매우 일반적인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전통시대 우리 사회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있습니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를 목민관(牧民官)이라 했고, 직책 자체도 목사(牧使)가 있었습니다. 오늘 교회의 목사(牧師)라는 호칭도 이런 관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서에서 등장하는 목자라는 호칭은 왕들, 곧 통치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역시 통치자들을 말하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개별적 존재로서 통치자보다는 오히려 국가의 임무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현대의 군주는 다름이 아니라 정당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 근대의 일방적 군주가 아니라 민중들의 주권을 정당하게 위임받은 통치 정당이 오늘날의 군주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지만, 단순히 개별화된 통치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통치세력을 유념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그런 감각으로 본문말씀에 접근한다면 오늘의 현실에서 그 의미를 더욱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문말씀 첫머리는, 못된 목자들 때문에 양들이, 못된 통치자들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규탄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유념해서 봐야 합니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항상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고자 할 때 모든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런 인식의 맥락에서 보자면, 바른 세상을 위한 길은 무엇이 될까요? 이른바 모두에게 ‘내탓이오’라고 인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서 역시 저변에 그런 인식을 깔고 있고, 또 그러한 인식이 갖는 중요성이 있기는 합니다. 모든 인간이 한계 상황을 인정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 인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말씀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선포합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두루뭉실하게 일반화시키지 않고 누구의 잘못인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성서는 사실 이러한 선포가 분명하고, 특히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그 점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사회가 여러 세력들로 나누어져 있고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사태에 대한 책임의 유무 또는 책임의 경중이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엄연한 인간사회의 갈등을, 성서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줄여 말하면, 성서는 인간의 근본적 한계상황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인식으로 인간사회의 문제를 통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명확하게 책임의 유무와 경중을 분별해야 할 때 그것을 분별함으로써 구체적인 대안을 찾도록 하는 지혜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잘못된 현실의 책임소재를 매우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사실 성서에서 너무 익숙한 메시지 아닙니까? 신구약 성서를 통해 익숙한,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못된 목자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약한 양, 병든 양, 상한 양, 흩어진 양, 잃어버린 양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통치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실리는 다 챙기면서도 백성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그래서 백성들이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언자 에스겔은 본문말씀 후반부에서 희망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선한 목자로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하실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16절)
비단 오늘 본문말씀에서뿐만 아니라 성서 전반을 통하여 역시 익숙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성서가 말하는 정의의 핵심요체가 담겨 있습니다. 헤매는 이들을 찾아오고, 길 잃은 이들을 바로 안내하고, 상한 이들을 싸매 주고, 약한 이들을 튼튼하게 해 주는 것, 그러나 살진 이들과 힘센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더 이상 남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정의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이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그렇게 다스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후반부의 말씀 내용입니다.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고, 그 땅에서 해로운 짐승들을 없애 버리겠다. 그래야 그들이 광야에서도 평안히 살고, 숲 속에서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들과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려 주겠다. 내가 때를 따라 비를 내릴 것이니, 복된 소나기가 내릴 것이다.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은 그 소산을 내어 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그들이 멘 멍에의 나무를 내가 부러뜨리고, 그들을 노예로 삼은 사람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하여 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다른 나라에게 약탈을 당하지 않으며, 그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평안히 살고, 놀랄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기름진 옥토를 마련하여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흉년으로 몰살을 당하지도 않고, 다른 나라에게 다시 수모를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나 주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과, 그들이 내 백성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25~30)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요 희망의 말씀입니다. 삶의 기반과 그 뿌리를 뒤흔드는 어떠한 위협으로도 그 백성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갈등하지도 않고, 인간과 인간,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이 갈등하지 않는 평화의 세상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말미의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너희는 내 양 떼요, 내 목장의 양 떼다.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고대의 여러 번역본들이 ‘너희는 사람이요’ 하는 대목을 빼버렸지만, 원문은 분명히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자와 양떼의 비유에서 그 양떼들이 명백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말이 없어도 충분히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말은 이 비유의 의미를 흘려버리거나 엉뚱하게 곡해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쐐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다른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언자 에스겔의 이와 같은 희망의 선포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희망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희망의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들 또한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지금 이 땅에서 바라는 우리들의 희망을 재삼 확인하고 용기를 얻습니다.
이제 일주일 남짓 지나면 우리는 이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중대사를 치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가 우리 역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새삼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지금 개별화된 한 통치자, 한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날 정치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통치체제를 형성하느냐, 어떤 사회를 염원하고 만드느냐 하는 차원에서 이 중대사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파괴되는 환경, 말도 안 되는 개발로 끊임없이 비용을 치러야 하는 현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니라 비범한 현실이 되어버릴 정도로 악화된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 배부른 사람과 대기업은 계속해서 배를 두드리는 반면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중소기업들은 하루하루 버티기 어려운 현실, 여러 소수자들이 차별과 편견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현실을 그대로 용인해서야 되겠습니까?
엄연한 주권국가의 영토에 정당하고 적법한 절차도 없이 무시무시한 군사시설과 무기장치가 설치되는 현실을 그대로 용인해서야 되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차를 몰고 들이닥친 짓도 그렇지만, 그것을 결사적으로 막아내고자 하는 주민들을 보고 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찍어대는 미군 병사들의 짓을 볼 때 그들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본문말씀이 말하는 ‘해로운 짐승들’ 모습 그대로일 뿐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나라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를 나라라 할 수 없습니다. 괴물이요, 해로운 짐승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수모와 고통을 겪지 않는 사회, 우리가 바라는 꿈입니다. 궁극적인 하늘나라에 이르러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를 기대하는 믿음이 지금 현실에서 매순간 순간을 하늘나라로 살고자 하는 믿음을 방해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도록 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것이 성서가 전하는 믿음이요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믿음입니다. 그로부터 벗어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 위에서 실현되어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사람답게 삶을 누리는 희망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다시 새기며,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그 하나님의 정의 동참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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